[Vol.28] 🌻 애정하는 가수 특집 - 9와 숫자들 편

12월의 둘째 날에 편지를 드리게 된 숑🌻입니다. 한 해의 마지막 달을 상기시키기라도 하듯 어제부터 날씨가 부쩍 추워졌어요. 옷깃을 정신없이 여미게 될지언정 이제 완연한 겨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역병과 함께 맞는 두 번째 연말이기도 하네요. 희망적인 뉴스는 여전히 요원하지만, 모두들 잘 살아낸 한 해만큼 담담하게 매듭짓는 연말이 되시길 바랍니다.

지난 주 로이🍄를 시작으로 애정하는 가수 특집을 한 편씩 보여드리게 됐지요. 이번에 제가 소개하고 싶은 아티스트는 밴드 '9와 숫자들'입니다. 이름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 보컬 9(송재경)을 주축으로 멤버 모두 숫자 예명을 쓰고 있어요(기타 0, 드럼 3, 베이스 4). 특집으로 이 밴드를 오롯이 소개할 수 있어 정말 기쁩니다! 왜냐면 언젠가 레터에서 언급하고 싶었지만 좋은 노래가 너무 많아 도저히 한 곡만을 고를 수가 없었거든요.

9와 숫자들과의 첫 만남은 대학생 때였어요. <창세기>를 처음 듣고, 당장 시집의 한 페이지로 만나도 이상하지 않을 노랫말을 보고 충격에 빠져 몇 번을 반복 재생했지요. 소박하고 서정적인 멜로디부터 담담한 보컬, 예술적인 가사까지... 공연장에서 느낀 정성과 위트까지 더해져 가장 좋아하는 밴드를 꼽을 때 결코 뺄 수 없는 이름이 되었어요. 그들의 노래에 위로 받던 기억이 자주 떠올라 어딘가 항상 빚을 지고 있다는 느낌도 듭니다.

누군가에게는 생소한 밴드일 수도, 또 누군가에게는 그 자체로 설레고 반가운 이름이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구독자님에게 9와 숫자들은 어떤 밴드인가요? 아무쪼록 고심 끝에 골라본 세 곡을 즐겁게 듣고 또 읽어주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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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숨바꼭질

내가 생각하는 9와 숫자들의 여러 키워드 중 하나는 '긍정'이다. 나는 노래도 사람도 이야기도 생에 대한 긍정이 강한 것을 사랑한다. 그런 창작물에 자주 몸을 기대고 싶고, 그런 사람에게서 배어나오는 영감에 온 정신이 휩싸이는 순간이 좋다. 그런 의미로 곡을 주로 쓰는 보컬 송재경의 사고회로―멜로디 전개부터 곡의 소재, 어휘 선정에 이르기까지―는 매번 놀라울 만큼 내 감상을 뒤흔든다. 무심히 '노래 좋네' 하며 듣다가도 가사를 곱씹다가 이마를 치느라 거북목이 치료될 정도.. 아니 주접은 여기까지 해야겠다.

2집 [보물섬]의 타이틀곡 <숨바꼭질>은 왜인지 여름보다 코끝이 시리기 시작하는 날씨에 떠오르는 곡이다. 출근길 대중교통에서도 이 노래와 함께면 단전부터 산뜻한 긍정이 꼴꼴 차오르곤 했다. 대책없이 희망을 주는 긍정이라기보다 세상의 아름다운 것들을 체에 걸러 가장 맑은 부분만을 적확한 언어로 포착한 느낌. 열렬하지 않아도 늘 우리 곁에 있는 감정이 이만큼 소중하다고 전해주는, 내게 9와 숫자들의 음악은 늘 그런 존재다.

<숨바꼭질>의 노랫말은 음미할 때마다 마음이 평안해진다. 타인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은 때, 내 진심을 알아주며 따사로운 체온을 건네는 단 한 사람의 행동이 나를 구원하기도 한다. '그대는 자꾸 헝클어진 나를 풀어내'와 같이 섬세하고 문학적인 가사는 언젠가의 향수를 데려온다. 체온과 같은 온도의 물에 들어가듯 편안하게. 반복해서 경험해도 부담스럽지 않은 농도로 말이다.

🌻 검은 돌

2016년 발매한 3집 [수렴과 발산]의 수록곡이다. 앨범의 영문 부제는 'Solitude and Solidarity(고독과 연대)'. 혼자 내면으로 수렴하는 시간으로부터 고독이, 세상 밖으로 걸어나와 주변을 향해 끝 모르고 발산할 때 연대가 이루어진다는 의미를 담았다고 한다. 이미 앨범명에서부터 이 밴드는 삶의 가장 단순한 공식을 노래한다. 나와 타인은 끝내 겹칠 수 없지만 홀로 쌓은 에너지를 이따금 서로에게 뻗을 뿐이라는 것.

작년에 혼자 제주도 동쪽으로 여행을 떠난 적이 있다. 작은 마을에는 시선을 두는 곳마다 검은 돌이 소담한 높이로 담을 이루고 있었다. 송송 뚫린 구멍으로 물이 잘 빠져나가 제주에는 현무암이 많다고 했던가. <검은 돌>에는 용암으로 흘러나와 '가장 낮은 땅의 대장'이 된 현무암에 대한 묘사가 등장한다. 더불어 뜨거웠던 20대에 대한 회고를 담은 노랫말이기도 하다.

먼 제주까지 날아가지 않아도 이 노래는 일상 곳곳에서 나를 일으켰다. 까맣고 서늘한 밤바람을 쐬던 모든 순간, 특히 피로를 지고 집까지 걸어가는 퇴근길에 어울렸다. 나의 어떤 일부가 까맣고 딱딱하게 굳어버린 것처럼 느낄 때마다 '뜨거웠던 어제의 내가 범인'이라고. 만성적인 후회와 고질적인 낙심이 찾아온다면 그만큼 '유랑하던 어제의 내가 범인'이라고 삶을 가르쳐주는 것만 같았다. '성가신 흉터'가 남았기에, 구멍으로 물을 흘려보내는 현무암처럼 어떤 자극에는 유연하게 대처하는 어른이 된 건지도 모른다.

9와 숫자들이 말하는 인생은 내가 지향하는 삶의 태도와 닮은 부분이 많다. 어쩌면 그들의 노래를 꾸준히 들으며 방향을 차츰 틀어온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자리잡은 나의 기본값이 다행히 맘에 든다. 고독으로 수렴하는 시간을 반기게 되었다. 고독과 연대는 등을 맞대고 공존하는 두 이름이라는 사실을 늘 손에 쥐고 있으려 한다. 그렇게 축적된 에너지가 있어 때때로 타인을 향할 수도 있는 법이니까.

🌻 높은 마음

살아오면서 마음과 몸이 가장 낮은 곳으로 머문다고 느낄 때 자주 꺼내 들었던 노래다. 내게 있어 그 시기는 취준생 무렵이었다. 어제 받은 불합격 통지에 슬퍼할 겨를 없이 다른 회사의 면접과 코앞으로 닥친 졸업 시험을 동시에 준비해야 할 때. 자비 없이 쏟아지는 일정에 버겁다가도 이미 지나간 좌절보다 지금의 감사한 일을 자주 생각하려 했다. 바쁜 시기에 긍정적인 마음이 들어 다행이라고 느꼈다. 아마 이 노래의 가사를 속내에 크게 써 붙이고 다닌 일도 마음가짐에 유효했으리라.

떄때로 인생이 '아무도 찾지 않는 연극, 그 속에서도 조연인 내 얘기'처럼 느껴진다. 매일 이벤트에 둘러싸인 주인공보다 비슷한 쳇바퀴를 구르는 조연의 삶이 나와 더 가까워보일 때. <높은 마음>을 듣고 있으면 연극이 끝난 후 혼자 남은 조연일지라도 내가 나를 알아준다면 아무렴 좋다는 결말에 다다르게 된다. 어디 대단히 내놓지 않더라도 나만은 옳은 길로 가는 스스로를 지지하고 싶어진다. 낮은 몸이지만, 누구보다 높은 마음으로.

저마다 생각하는 '높은 마음'의 정의가 다르리라고 생각한다. 최근 가수 이무진이 9와 숫자들의 음악에 대해 이야기한 영상 클립을 봤다. 그는 9와 숫자들이 '과제 같은 음악'을 한다고 말했다. 처음 들었을 때 모순처럼 들리기도 하지만 고뇌할수록 새로운 깨달음을 가져다준다고. 나 또한 9와 숫자들이 내준 과제를 인생의 어느 시절마다 통과하며 스스로를 정의해나갔던 것 같다. 말하자면 이들의 노래는 무한하다. 오래 들어도 나의 해석에 따라 또 다른 감상을 얻으니까. 해가 바뀐 뒤 내가 생각하는 '높은 마음'은 또다른 색을 띠고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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