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는 어릴 때부터 조그만한 슬픔이 있었다.
시간을 거슬러 그 예민하고 여린 아이에게로 돌아갈 수 있다면,
이렇게 이야기 해주고 싶다.
“정말 별 거 아니야.“
”정말 별 거 아니야.“
*
사실은 아빠 이야기를 누구에게도 쉽게 꺼내지 못했었다.
정말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그런데 포와 메 앞에서는 이상하리만큼 아무렇지 않았다.
여러 주제를 넘나들던 우리의 대화는 어느덧 가족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졌는데,
건강상 이유로 아이를 가질 수 없었던 포와 메의 진솔한 이야기 뒤에
나도 자연스레 내 조그만한 슬픔, 가족사를 테이블 위로 꺼내놓았다.
그러다 문득 다시 한번 이런 생각이 들었다.
‘뭐야? 진짜 별 거 아니잖아..?’
마음이 한층 더 홀가분하다.
*
엄마는 나와 언니가 성인이 될 때까지 서류상 이혼을 미뤄왔다.
아빠랑 같이 살지도 않으면서.
그런 엄마가 내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어쩔땐 화도 났다.
아빠가 있다고 할 수도 없고, 없다고 할 수도 없는 내 상황이 성가시고 불편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그냥 그런 상황이 슬펐다.
*
아빠 없이 엄마의 사랑만으로도 충분했다.
엄마와 나는 보이지 않는 탯줄로 끈끈이 연결돼 있었기 때문이다.
조그만한 슬픔이 한 번씩 찾아와도
엄마 품에서 잠들면 언제나 안심할 수 있었다.
엄마가 차려주는 따끈한 집밥을 먹으면 모든 게 깨끗이 나았다.
그가 내게 준 사랑은 이런 것들이다.
나보다 일찍 집에 도착해서
밥 짓는 냄새를 폴폴 풍기는 것
하루도 거르지 않고
내가 눈뜨기 전에 항상 먼저 일어나 분주하게 아침을 준비하는 것.
살아있는 제철 식재료로 맛있게 요리해서 계절을 잘 느낄 수 있게 해준 것.
내가 제일 좋아하는 딸기철이 되면 잊지 않고 퇴근길마다 딸기를 사와주던 것.
교복 와이셔츠는 항상 뽀송뽀송하게 삶아서 빳빳이 다려주던 것.
소풍이 있을 때면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도시락을 싸주던 것.
꼭 깻잎으로 두른 김밥에 터질듯한 유부초밥, 참치 마요네즈가 들어간 샌드위치.
그것은 나를 웃게 만드는 그만의 필살기였다.
언제 어디서든 맨 앞 자리에서 나를 응원하고 있던 사람.
아름다울 미에 볕 경, 아름다운 빛깔을 가진 미경.
이리도 부지런히 사랑 주는 사람에게서
내가 태어났다.
*
나는 사랑받는 것을 참 좋아한다.
내가 원하는 사랑을 받고 있다는 기분을 느끼는 것이 얼마나 기쁜 일인가.
*
말을 정말로 예쁘게 하는 한 남자를 만났고, 그와 결혼했다.
깊고 맑은 눈을 가진 사람이라
그의 눈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으면 자주 눈물이 흘렀다.
내 안에 고여 있던 조그만한 슬픔들이 하나씩 씻겨 나갔다.
내가 그토록 듣고 싶었던 말,
“그래, 정말 별 거 아니야. 라니한텐 라니가 가장 소중해.”
하고 끊임없이 말해주며 한없이 다정하게 안아주던 사람.
그는 사랑받는 것을 진심으로 좋아하는 나에게
나의 서른번째 생일 날,
동시에 우리가 아끼고 사랑하는 모든 이가 한 자리에 모인 결혼식 날,
나의 생일을 다함께 축하하는 노래를 만들어 가장 큰 목소리로 불러주었다.
‘내가 주고 싶은 것 보다, 그대가 정말로 원하는 선물을 줄 테야.
너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두 모였네. 노랠 부르네.
축복으로만 오늘을 가득 채우자. 축하해, 축하해 생일.
라니의 서른번째 생일.‘
그는 내가 좋아하는 따뜻한 포의 모습을 많이 가지고 있다.
*
우리는 신혼여행도 치앙마이로 떠나왔다.
여느 신혼여행과 다른 점이 있다면, 내 짝꿍 훈이에게는 장모님과 처형인 우리 엄마와 언니가 함께 동행하는 스케줄이 포함돼 있었다.
여러가지 이유로 해외를 아직 한 번도 나가보지 않은 언니에게 꼭 주고 싶은 선물이었다.
그리고 서로를 소개해 주고 싶었다.
나를 있게 한 가족과 내가 선택한 가족들을.
사랑이 한데 모인 날,
그날을 잊을 수가 없다.
원하는 사람들로부터, 원하는 사랑을 듬뿍 받고 있는 딸을 보는 엄마의 마음은
내가 엄마가 되어서나 어렴풋이 알 수 있을까?
엄마와 메가 손을 꼭 잡고,
언니와 내 짝꿍 훈이, 포가 앞장서서 치앙마이 거리를 거닐던 그 장면은
내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을 것이다.
*
내게도 아빠가 생겼다.
나와 다른 언어를 쓰는 엄마도 한 명 더 늘었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살갑고 다정한 아들이 하나 더 생겼다.
우리는 이제 한 가족이다.
그 조그만한 슬픔은 슬픔으로 머물지 않고
거대한 사랑을 만들어냈다.
*
릴라와디, 영어로는 플루메리아.
태국 치앙마이에서 알게 된 이 꽃의 꽃말은
‘It’s lucky to see you. 당신을 만난 건 행운이에요.’
나한테 와줘서 고마워요 모두.
이번 주는 꺼내야 할 고백들이 많아 시간이 조금 오래 걸렸어요.
더 부지런한 사랑으로 소중한 구독자분들께 다가가겠습니다.
오늘도 제 이야기에 귀기울여 주셔서 고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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