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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머런 감독은 10여년간 해양 탐사 다큐멘터리를 세 편이나 제작했다. 2012년에는 직접 설계에 참여한 심해 잠수정을 타고 가장 깊은 바다인 태평양 서쪽의 마리아나 해구에 다녀왔다. 에베레스트산 높이를 뛰어넘는 수심 11㎞, 그 심연의 바다를 혼자서 잠수한 최초의 탐험가로 기록됐다. ‘대체 그곳에 왜 갔나요?’ 사람들의 질문에 캐머런 감독은 망설임 없이 답했다.
“어린아이라면 그런 질문은 하지 않을 겁니다. 해구가 거기 있고, 아직 가본 적이 없으니, 잠수정을 만들어서 가지 않을 이유가 없잖아요?”
‘침묵의 세계(The Silent World)’에서 쿠스토는 중력을 거스르고 인간에게 허락되지 않은 세상을 유영하는 기분을 이렇게 묘사한다.
“바닷속에 들어가면 사람들은 그곳의 색채와 빛의 오묘함을 즐길 수 있으며 바다가 고독하게 홀로 독백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무아경의 세계로 돌아가 바닷물을 손가락으로 휘저어 보며 물장난을 치기도 한다. 그러다 보면 그 사람은 자기가 그 어떤 장벽을 뚫고 넘어온 특권이 부여된 인간이라고 느끼게 된다.”
때로는 어린아이 같은 무모함으로 무작정 몸을 던져야 알 수 있는 세상이 있다. ‘첨벙’ 소리와 함께 두 세계의 경계를 깨버리고 바다에 뛰어드는 순간처럼 비로소 ‘직접’ 해보아야만 만날 수 있는 세상이 있다. 1년 365일 탐험가의 마음으로 매 순간 모든 것을 새로이 보고 매일 모험을 떠나며 살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나 살아가는 와중에 가슴 한켠에서 아주 작은 호기심이 일렁인다면, 그 순간만은 무심히 지나치지 않으려 한다. 쿠스토가 그랬듯, 캐머런 감독이 그랬듯, 그것이 나를 어디로 데려갈지는 아무도 모르니까 말이다.
# 주저하는 근본주의자 —모신 하미드
나는 비교하지 않으려고 노력했어요. 뉴욕이 라호르보다 더 부유한 것을 받아들이는 건 그래도 괜찮았지만, 마닐라도 그렇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건 힘들었어요. 나는 내가 장거리 선수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어깨 너머로 흘깃 보고, 자기보다 앞서 가는 친구가 선두가 아니라 뒤처진 이들 중 하나라는 사실을 깨닫기 전까진 자신이 그다지 형편없지 않다고 생각하는 장거리 선수 말이죠. 어쩌면 바로 그런 이유에서 나는 마닐라에서 내가 전에 하지 않던 행동을 했는지도 몰라요. 품위가 허락하는 한, 더 미국인처럼 행동하고 또 말하려 했던 거죠.
사실, 우리 인간이 불에 구운 동료 동물들의 고기에 둘러싸였으면서도, 꽃들의 유혹적인 몸짓에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걸 보면 참 대단해요. 우리는 대단한 존재들이에요. 무의식적으로 죽음과 생식의 연관성 — 그러니까 유한함과 무한함 사이의 연관성 — 을 감지하는 게 우리 본성인지 모르죠. 그리고 실제로 우리는 영원히 살려고 자식을 낳는 건지도 모르고요.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뉴욕에서 나 자신을 위해 만들려고 시도했던 새로운 삶의 토대가 탄탄하다고 믿었는지 어떤지는 잘 모르겠어요. 분명히 믿고는 싶었죠. (…) 내가 얼마나 앞을 못 보았는지 돌아보면 충격적이에요. 재앙이 다가오고 있다는 징조는 어디에나 있었어요. 뉴스에도, 거리에도, 내가 사랑하게 된 여자의 상태에도 있었어요.
그런 여정들은 내게, 자신의 테두리가 어떤 관계에 의해 흐릿해지고 침범당하면, 되돌리는 일이 늘 가능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시켜 줬어요. 아무리 노력해도, 우리는 전에 우리 자신이라고 생각했던 자율적인 존재로 되돌아갈 수 없는 거죠. 우리의 일부는 이제 밖에 있고, 외부의 일부가 이제 우리 안에 있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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