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의의 명령에 명예로 맞선 꼿꼿한 화살
미 육사출신 공수-특수작전부대 장교 이언 피시백은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현지에서 자행된 구금자 고문 등 가혹행위 실태를 실명으로 폭로, 2005년 '구금자 처우법(일명 피시백 법)'을 제정하게 한 주역이다. 그는 17개월간 군 내부에서 공식 절차를 밟아 불의에 항변했으나 국방장관의 의회 해명과 군당국의 공식조사에서도 거짓과 은폐가 반복되자 내부고발을 감행했다.
미 육사출신 공수-특수작전부대 엘리트 장교로, 부시-체니-럼즈펠드로 이어지는 '네오콘(Neocon)' 군사권력의 인권 불의에 맞선 이언 피시백이 지난해 11월 19일 한 서민 사설 요양병원에서 외롭게 숨졌다. 향년 42세.
이라크-아프간 전장에서 그가 맞닥뜨린 실상은 그의 원칙과 사뭇 달랐다. 구금자를 발가벗기고, 구타하고, 뼈를 부러뜨리고, 물고문하고, 죽이겠다고 으르고, 실제로 죽이고, 기절할 때까지 가혹하게 체벌하고, 잠을 재우지 않고, 저체온증에 걸릴 만큼 극한 환경에 방치하기…. 가학적 고문에 익숙해진 병사들은, 알카에다 정보 수집이란 명분에 아랑곳 않고 유희의 소일거리로 그런 행위를 일삼곤 했다.
공화당 상원 군사위원회 소속 존 매케인 의원과 존 워너 위원장에게 보낸 2005년 9월 16일 서신에 그는 이렇게 썼다. "어떤 이는 '알카에다의 잔혹함에 비하면 우리의 행위는 별 게 아니다'고 했습니다. 도대체 언제부터 미국의 도덕이 알카에다를 기준으로 삼게 된 것입니까? 미국은, 그리고 우리의 행위는, 독립선언과 헌법이 명시하고 있듯, 보다 높은 기준을 따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안보를 위해서는 우리의 이상도 희생시킬 수 있는 것입니까? (…) 역경에 처하면 저버릴 수 있는 이상이라면 그 이상은 결코 우리의 것이 아닐 것입니다. 저는 싸우다 죽을지언정, 미국을 지탱하는 이상의 작은 일부도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 책 <남아있는 나날> 가즈오 이시구로
내가 내린 그 작은 결정은 일대 전환의 계기가 되었다. 다시 말해 그 결정이 상황을, 훗날의 사태를 낳게 될 숙명적인 길로 내몰았다고까지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 어쨌거나 때늦은 깨달음에 의지해 과거를 뒤져 보노라면 그러한 ‘전환점’들이 도처에서 눈에 띄게 마련이다. (…) 그러나 이런저런 순간에 다르게 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상상하고 앉아 있어 본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마음만 심란하게 만드는 건지도 모른다. 사실, ‘전환점’이 어쩌고저쩌고 하지만 내가 그런 순간들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는 것은 이렇게 돌이켜 볼 때뿐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오늘날 그런 상황들을 되돌아보면 내 인생에서 정말 중요하고 소중한 순간들로 다가온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물론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다. 오히려 나와 켄턴 양의 관계에서 엉뚱한 것들을 솎아 낼 수 있는 날이, 달이, 해가, 끝없이 남아 있는 줄만 알았다. 이런저런 오해의 결과를 바로잡을 기회는 앞으로도 무한히 많다고 생각했다. 그때는 그처럼 사소해 보이는 일들이 모든 꿈을 영원히 흩어 놓으리라고 생각할 근거가 전혀 없는 것 같았다.
# TV 없는 윤여정의 거실
할머니, 엄마보다 언니란 호칭이 어울리는 이 일흔넷의 배우가 사는 평창동 집을 몇 해 전 예능 프로그램에서 본 적이 있다. 건축 취재를 하면서 얻은 깨달음이 있다면, 한 사람의 진면목은 먹고 자고 쉬는 집이라는 공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드러난다는 것이다. 정리하고 어지럽힌 흔적마저도 집주인이 만든 일상의 잔상이니까.
56년째 영화와 드라마를 밥벌이로 삼아온 배우의 거실에 TV가 없다는 게 인상적이다. 후배 가수가 이유를 묻자, 윤여정이 답한다. "얘, 나, 테레비 싫어해!"
주인을 빼닮은 집을 보니, 20~30대 밀레니얼 세대가 왜 그들 인생의 곱절을 살아온 윤여정에게 환호하는지 알 것 같았다. '취향 존중'을 최고 가치로 삼는 젊은 세대의 눈에, 윤여정은 보기 드문 '취향 있는 어른'이다. 취향을 가진 어른은 꼰대일 수가 없다. 내 취향이 확실하기에 남의 취향에 왈가왈부하지 않는다. 인간 본성에 탐닉한 계몽주의 작가 라 로슈푸코의 말처럼 "생각이 비난받을 때보다 취향이 비난받을 때 자존심은 더 큰 상처를 입는다"는 사실을 잘 아니까.
댓글
의견을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