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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례가 간단하든 복잡하든 참여자는 몸과 마음에 변화를 느낄 수 있다. 우리는 서로 연결하고, 두터운 유대를 느끼고, 새로운 질서에 몸을 맡긴 채 공동체에 뿌리내린다. 야생의 동물들이 지키는 의례를 인간은 점점 더 소홀히 하고 있다.
모녀 사이로 짐작되는 코끼리 두 마리가 불과 몇 분 내지는 몇 시간 만에 다시 만나서 “코를 치켜 올리고 우레 같은 소리로 울부짖”은 다음 “서로의 코를 상대의 입가로 가져갔다.” 악수인 셈이다. 그런 다음 두 코끼리가 같은 방향으로 나란히 서서는 “갑자기 볼일을 시원하게” 보는 것으로 인사가 마무리되었다. “떨어진 시간이 얼마나 흘렀든 관계없이 코끼리 가족은 만날 때마다 그것을 기념하는 의미를 담아 인사한다.”
동물원의 우두머리 암컷 코끼리가 안락사 한 뒤 그와 친했던 두 코끼리는 “밤새 번갈아 가며 조용히 죽은 친구를 찾아갔다. 절대 죽은 친구를 혼자 누워 있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갈 때마다 각자 주기적으로 죽은 친구의 몸에 흙을 뿌려 덮어주었다.” 다음 날 아침 죽은 코끼리의 몸 위에는 5밀리미터가 넘는 흙이 덮였다.
인간은 코끼리, 고래, 늑대를 비롯한 의식이 있는 모든 존재와 연결되어 있다. 우리가 점점 잊어 가고 있는 야생의 의례를 되살림으로써 우리는 자연에서 인간이 차지하는 위치를 확인하고, 자연의 일부로 다른 동물들과 공존할 지혜와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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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장류 보노보인 ‘판바니샤’는 과제를 수행한 보상으로 먹을 것을 받았는데 이를 부러워하는 다른 보노보들의 시선을 느끼고는 보상을 거부했다. 연구자를 바라보며 다른 보노보들을 가리키기까지 했다. 연구자가 다른 보노보들에게도 먹을 것을 주자 그제야 판바니샤는 자신의 보상을 받아들고 먹었다. ‘공정함’ 또는 ‘형평성’에 대한 감각이 있다는 의미다.
인간이 동물의 감정, 특히 고통에 공감하는 일은 누군가의 시각에서는 쓸데없는 일일지도 모른다. 동물의 고통이 줄어든다고 해 당장 인간이 경제적 이득을 얻는 것도 아니니까 말이다. 그러나 동물을 향한 공감은 결국 사회적 약자에 대한 공감 능력과도 연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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