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선물은 의무를 지운다.”
프랑스 신학자 루이-마리 쇼베가 쓴 책의 한 문장입니다.
“모든 선물은 의무를 지운다. 감사의 표시로서 어떤 답례도 요구하지 않는 선물의 수령이란 없다.”
“every gift obligates; there is no reception of anything as a gift which does not require some return-gift as a sign of gratitude”
— Louis-Marie Chauvet, Symbol and Sacrament
쇼베는 선물이 고대 사회에서 하나의 문화이자 사상임을 설명합니다. 이 내용을 읽을 때, 마침 창세기를 읽고 있었습니다. 아내 사라가 죽었을 때 아브라함이 막벨라 굴을 샀던 사건을 창세기 23장과 연결해 보았습니다.
보통은 아브라함이 막벨라 굴을 산 사건을 이렇게 해석합니다. 하나님께 약속 받은 땅을 소유하기 위한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여준 사건이라는 거죠. 그냥 받거나 대여 형식으로 묻을 수 있었지만,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을 얻기 위해 매우 큰 금액을 주고서 땅을 샀다는 겁니다. 이 땅을 사면서 아브라함의 소유를 못 박았다고 읽곤 합니다.
여기에 질문을 덧붙이며 이 이야기를 읽어보려고 합니다.
막벨라 굴을 사다
아브라함은 아내 사라를 묻을 땅을 구해야 했습니다. 그는 아내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 이웃인 헷 족속에게 찾아갑니다. 흥미롭게도 그들의 반응은 무척이나 후했습니다.
“당신은 우리 가운데서 하나님이 세우신 지도자이십니다. 우리 묘지 가운데 가장 좋은 곳에 부인을 모시세요. 저희 가운데 자신의 묘지에 어르신이 부인 모시는 것을 마다할 사람은 없습니다.”
— 창세기 23장 6절, 새한글성경
땅 주인 에브론은 한술 더 떴습니다.
“아닙니다, 어르신, 제 말을 들어 보세요. 그 밭을 제가 어르신께 드리지요.”
— 창세기 23장 11절, 새한글성경
이렇게 말했지만, 아브라함은 구매를 부탁합니다. 사려면 은 400세겔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성경의 다른 본문에 나오는 금액에 비하면 너무 높은 금액이었습니다. 이 대목을 두고 헷 족속과 땅 주인은 더 비싸게 팔기 위해 흥정을 한 것으로 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만약 그들의 말이 속임수가 아니고, 거짓이 아니라 진실이었다면 어떨까요?
더 안정된 소유였을까?
아브라함의 구매를 더 확실한 소유권을 위한 선택으로 보기도 합니다. 구매를 하면 나중에 빼앗기지 않을 수 있는, 영구한 권리를 얻게 되는 것이니까요. 하지만 이런 전제는 오늘날 우리의 체계를 바탕으로 읽는 것 같기도 합니다.
고대에도 그랬을까요? 고대에는 오늘날처럼 영구한 소유권을 사고파는 개념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권리를 주고받는 일에 가까웠다고 볼 수 있습니다.
소유권이라고 하더라도 아브라함에게 이 권리를 안정적으로 보장 받았을 수 있었을까요? 고대 근동의 어떤 법전도 나그네('게르')에게는 법정에 설 권리 자체를 주지 않았습니다. 성경학자 리처드 헤스는 이렇게 씁니다.
“법적인 의미에서 나그네보다 더 큰 위험에 처한 개인은 드물었다. 그런 사람은 그 나라의 시민도, 그 사회의 구성원도 아니었다. 그러므로 고대 근동의 어떤 법전도 이 사람에게 아무런 법적 권리를 부여하지 않았다.”
“From a legal sense, few individuals suffered greater risk than the sojourner or 'alien.' Such an individual was not a citizen of the country or a member of the society; therefore, no law collections in the ancient Near East accorded this person any legal rights.”
— Richard Hess, Leviticus (The Expositor's Bible Commentary)
아브라함은 여전히 그 사회의 시민이 아니었습니다. 성경 번역가 로버트 알터는 '나그네(게르)'라는 단어 자체를 이렇게 풀이합니다.
“이 히브리어는 성경 전체에서 거주 외국인을 가리킨다. 상속받은 땅도 없고 씨족의 보호도 없는 자로서, 과부·고아처럼 취약한 존재다.”
“This Hebrew word, ger, designates a resident alien, who as someone without inherited land or the protection of a clan, is vulnerable, as are the widow and the orphan.”
— Robert Alter, The Hebrew Bible: A Translation with Commentary
법적 보장은 시민권에서 나옵니다. 그가 가진 권리는 나그네로서 과연 얼마나 보장 받았을 수 있었을까요? 우리는 성경의 다른 이야기를 통해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세겜에서 벌어진 일
손자 야곱도 훗날 세겜에서 아브라함과 똑같은 방식으로 땅을 삽니다. 흘려 읽고 넘어가기 쉬운데, 창세기 33장 19절에서 야곱은 은 100크시타(화폐 단위)를 주고 하몰에게 땅을 삽니다.
돈을 주고 산 땅은 안전했을까요? 야곱의 딸 디나가 하몰의 아들 세겜에게 욕을 당하고, 아들들이 그 가족과 도시에게 보복하게 됩니다. 이 사건이 벌어지고 난 뒤 야곱이 탄식합니다.
“너희가 나를 불행으로 몰아넣었다. 이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 곧 가나안 사람들과 브리스 사람들 사이에 내 평판이 나빠지게 만들었다. 내 사람은 얼마 안 되는데 그들이 뭉쳐서 나를 치면 나와 내 집이 멸망하리라.”
— 창세기 34장 30절, 새한글성경6
합법적으로 땅을 산다는 것이, 침략과 보복으로부터 안전을 제공해 주지는 않습니다. 침략 속에서 합법적 권리가 내 땅을 지켜 주지는 못합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은 실제로 안전을 다른 방식으로 확보하려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이 그랄 왕 아비멜렉과는 조약을 맺은 장면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명예를 걸고 여기서 나한테 맹세하시오. 나와 내 자손과 후손한테 신의를 저버리는 행동을 하지 않겠다고요. 내가 그대에게 잘해 주었듯이, 그대도 나에게 또 그대가 나그네로 사는 이 땅에 잘해 주시오.”
— 창세기 21장 23절, 새한글성경7
서로 언약하고, 우물가에 나무를 심었습니다. 이것이 그 시대에 안전을 보장해 주었습니다. 관계, 언약, 소속이 안전에 더 중요한 요소였습니다.
관계를 향한 제안
이렇게 보면, 막벨라 굴에서 아브라함이 한 일은 단순히 소유의 안정성을 얻으려는 선택만은 아니었습니다.
앞서 쇼베의 말을 떠올려 봅시다. 쇼베에게 선물은 단순한 호의가 아닙니다. 받는 사람에게 응답을 요구하고,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 사이의 관계를 새로 묶는 상징적 교환입니다.
무덤은 수십 년, 수백 년 동안 그 집안과 족속들이 가져가야 하는 중요한 땅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준다는 것은 단기 임대가 아닙니다. 야곱까지도 그 무덤을 썼던 것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사실상 주는 것과 다름없는 제안이어야 합니다. 짧게 사용하라는 뜻이었다면, 상대도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헷 족속의 호의는 매우 자비롭고 파격적인 호의였습니다. 이 호의를 받는 순간, 아브라함은 헷 족속과 오래 이어질 관계 안으로 들어갑니다. 감사로, 의무로, 자기 평생을 넘어 후대까지 이어질 관계입니다. 힘없는 나그네에게 그것은 결코 작은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관계의 모양을 바꾸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그 길을 그대로 받지 않습니다. 굳이 은 사백 세겔을 주고 삽니다. 관계를 거절한 것이 아닙니다. 관계의 모양을 바꾼 것입니다.
구매는 그 땅에서 합법적인 권리를 주지만, 위험을 제거해 주지는 않습니다. 아브라함은 여전히 나그네였습니다. 살아가기 위해 헷 족속과 관계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후원의 그늘' 아래 들어가는 관계는 거부합니다. 쇼베의 말로 돌아가 봅시다. 모든 선물은 빚을 남긴다.
후원을 받는 관계 속에서 아브라함은 땅과 안전을 받는 대신, 다른 것을 요청받을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하나님 백성으로서 선택할 수 없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땅은 아브라함에게 타협할 수 없는 영역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 땅은 하나님께서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땅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땅인가. 헷 족속의 호의로 받은 땅인가. 아브라함은 그 모호함을 피하고 싶었던 것 아닐까요?
안타깝게도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법적인 서류 한 장은, 힘없는 자를 오래 지켜 주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자본주의 시스템은 종이에 적힌 금액으로 필요한 것을 얻을 수 있다고 약속하지만, 이 종이 쪼가리 한 장은 하루아침에 빵 하나도 얻지 못할 휴지 조각이 되어 버리기도 합니다.
우리는 무엇을 안정이라고 부르고 있을까요? 힘 있는 사람의 우산 아래 들어가는 것일까요? 더 좋은 것을 포기하고 말씀대로 살아갈 자유를 지키는 것일까요? 신앙은 더 쉬운 길이 아니라, 더 자유로운 길을 걷기 위해 행동에 나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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