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가 신 포도를 먹었는데, 자식들의 이가 시다.”

에스겔 18장에서 당시 속담을 가져옵니다. 윗세대가 저지른 일의 쓴맛을 다음 세대가 물고 있다는 말입니다. 죄 때문에 나라가 망해서 포로로 끌려왔습니다. 정작 포로로 살아가는 세대는 그 죄를 지은 당사자는 아닌데 고통을 겪으며 살아갑니다. 이것은 부당한 연좌제로 보아야 할까요? 아니면 후손으로서 치러야 할 책임으로 보아야 할까요?
한 사람의 증조부가 저지른 일과 관련해서 그 후손들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요? 자신들이 저지른 죄를 감추려고만 하는 태도를 우리는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시간이 많이 지났으니 이제 그만 용서해야 할까요? 그들이 직접 저지른 것도 아닌데 비판하는 것은 너무 과한 것일까요?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은 이것입니다. 죄는 어디까지 이어질까? 책임은 어디까지 물어야 할까?
법적 책임과 도덕적 책임
유대인 랍비 조나단 색스(Jonathan Sacks)는 성경에 나오는 두 가지 상충되는 내용을 이야기합니다.
“사랑을 수천 대에 이르도록 보존하고, 잘못과 범죄와 죄악을 용서해 준다. 그러나 잘못을 벌하지 않고 계속 내버려두지만은 않는다. 아버지의 잘못 때문에 아들 손자 삼사 대에 이르기까지 벌을 내린다.”
— 출애굽기 34장 7절, 새한글성경
후손들이 부모와 그 윗대의 죄로 인해 고통을 받을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반면, 이런 말씀도 있습니다.
“아버지를 자식 때문에 죽이면 안 되고, 자식을 아버지 때문에 죽여서도 안 됩니다. 사람마다 자기 죄에 대해서만 죽여야 합니다.”
— 신명기 24장 16절, 새한글성경
연좌제 적용을 금지하는 내용입니다. 조나단 색스는 법적 책임(legal responsibility)과 도덕적 책임(moral responsibility)를 구분합니다. 한 개인은 자신만이 그 법적 책임을 집니다. 하지만 죄는 법적 책임을 지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우리의 행동은 누군가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지속적으로, 때로는 3-4대에 이르기까지.
친일파의 행적, 나라를 팔고 자신들의 이익만을 누렸던 이들이 저지른 일이 결코 개인의 법적 책임으로 끝날 수 있을까요? 제대로 심판을 못하기도 했지만, 그들이 만든 세상, 그 상처와 영향은 100년이 지난 지금까지 역사 속에서 이어지고 있으니까요. 친일파 자손에게 “조상이 죄인이었으니 너도 죄인이다”라고 따지려고 이 얘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역사 속에서 우리는 선조의 열매를 먹고 있습니다. 그 열매가 때론 쓴 뿌리일 수도 있습니다. 누군가에겐 그것이 달콤한 열매일 수도 있지요. 내가 벌인 일은 아니어도 내가 누군가 벌인 일의 열매를 먹고 있다면 우리에게도 도덕적 책임이 있습니다. 싼 커피와 초콜릿을 먹으면서 그 뒤에서 벌어지는 참상을 외면하기만 한다면 피로 얼룩진 음식으로 배를 불리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물론, 개인이 다 해결할 수는 없는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문제를 정직하게 마주해야 할 도덕적 책임이 있습니다. 내가 직접 저지른 것이 아니더라도 내가 누리는 빛의 그림자까지 볼 수 있는 공동체적 인식이지요. 이러한 인식이 없다면, 내가 미칠 수 있는 공동체적, 시대적 영향을 과소평가하고 행동할 수 있습니다. 후대에 미칠 환경파괴의 영향을 생각하지 않는 태도와 다를 바가 없겠지요.
죄의 무게를 이기는 희망
우리는 죄의 무게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죄는 나만의 것이 아닙니다. 옆으로 넓게 퍼질 뿐만이 아니라, 아래로 흘러갑니다. 내가 존재하지 않는 시간 그 아래까지.
희망은 죄의 무게를 이길 힘이 있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에스겔과 예레미야는 같은 속담을 인용하면서 더는 이렇게 되지 않을 것이라는 하나님 말씀을 전하며 희망을 이야기합니다.
“(예언자) 여호와의 말씀이 나에게 내려오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 “이 무슨 일이냐? 너희가 이스라엘 땅에서 입버릇처럼 이 말을 하고 있다니! ‘익지 않은 열매를 먹는 사람은 부모인데, 무디어지는 것은 자식의 이빨이다.’ 내가 살아 있음을 걸고 분명히 말해 둔다. ― 주 여호와의 말씀입니다. ― 너희가 이스라엘에서 더는 입버릇처럼 이 말을 하지 않게 될 것이다.”
—에스겔 18장 1–3절, 새한글성경
“그런 날들에는 사람들이 더는 이렇게 말하지 않을 것이다. ‘익지 않은 열매를 먹은 사람은 부모인데, 무디어질 것은 자식의 이빨이다.’”
— 예레미야 31장 29절, 새한글성경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를 이겼다고 말합니다. 죄가 가진 파괴력이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여전히 우리의 삶과 이를 넘어선 이들까지 미칠 만큼 강력합니다. 하지만 종말에 이르러 새로운 세상이 펼쳐질 것을 부활로 보여주셨고, 또 약속하셨다는 것을 통해 우리는 죄의 무게가 역전 가능한 것임을 믿고 살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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