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이 부족해서 이뤄지지 않은 걸까?

아들을 살려 낸 어머니도, 아들을 잃은 어머니도 같은 믿음이었습니다

2026.11.03 | 조회 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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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히브리서 11장, 믿음 장을 보며 이렇게 말하곤 합니다. “바라는 것을 믿음으로 붙들면 실상이 된다, 그러니 의심하지 말고 믿고 선포하라.” 믿음을 가지고 인내하면 결국 기적이 일어난다는 이야기도 합니다. 하지만 믿고 기도하고 선포해도 현실이 뒤따라오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현실 앞에서 내 믿음의 부족함을 탓하곤 합니다.

 

하지만 히브리서를 자세히 보면 믿음이 부족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뒤에 나오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는 사람들이 간절히 바라는 모습이 아닙니다. 시작부터 아무것도 얻지 못한 채 죽음을 맞이한 사람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믿음이 무언가를 이루게 하는 기적이 아니라는 것을 아벨 이야기부터 보여줍니다.

 

가인의 동생 아벨은 이 땅에서 이룬 것이 무엇일까요? 제물을 드렸고, 형에게 살해당합니다. 믿음이 만들어낸 현실은 죽음이었습니다. 물론, 그것이 끝은 아닙니다. 아벨을 두고 “죽었지만, 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아직도 말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아벨이 얻은 것은 성취나 기적이 아니라 증언이었습니다.

 

히브리서에서 믿음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룸(기적)이 아니라 드러냄(증언)입니다. 우리는 기적이 나타난 이야기와 죽음으로 끝난 이야기, 두 극단을 동시에 다루는 에피소드를 살펴보겠습니다.

 


 

돌려받은 아이, 돌려받지 못한 아이

 

11장 35절에는 서로 반대되는 두 이야기가 나옵니다.

 

믿음으로 여자들은 죽었다가 부활한 가족을 다시 맞이하였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고문을 당하면서도 더 좋은 부활의 삶을 얻고자 하여, 구태여 놓여나기를 바라지 않았습니다.
— 히브리서 11장 35절, 새번역

 

앞의 이야기는 엘리야와 엘리사 이야기인듯 합니다(열왕기상 17장, 열왕기하 4장). 엘리야와 엘리사는 각각 죽은 아들을 살려주었죠. 그 어머니들은 믿음으로 자녀를 다시 얻었습니다.

 

뒤의 ‘어떤 이들’은 마카비(마카베오)서에 나오는 순교자들, 곧 늙은 서기관 엘르아잘과 일곱 형제와 그 어머니를 떠올릴 수 있습니다. 개신교에서는 외경으로 분류되어서 낯선 이야기일 수도 있어서 소개합니다.

 

율법이 금한 돼지고기를 먹으라는 왕의 강요에 형제가 차례로 고문당해 죽었습니다. 어머니는 하루에 일곱 아들이 죽는 것을 지켜보았습니다. 둘째 아들은 숨을 거두며 이렇게 말합니다.

이 우주의 왕께서는 당신의 율법을 위해 죽은 우리를 다시 살리셔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할 것이다.  
— 마카베오하 7장 9절, 공동번역

 

어머니는 또 마지막 남은 막내에게 말합니다. “하느님의 자비로 내가 너를 너의 형들과 함께 다시 맞이하게 될 것이다.”(29절)

 

믿음은 두 가지 극단적 결과로 갈립니다. 어떤 여자들은 부활한 가족을 얻습니다. 반대로 어떤 여자는 믿음으로 자녀를 잃습니다. 후자의 어머니 믿음이 모자라서 아들들이 죽은 것이 아닙니다. 살아 돌아온 아이도, 돌아오지 않은 아이도 같은 믿음입니다.

 

히브리서는 양쪽에서 무엇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걸까요? 무게중심은 기적보다 고난에 실립니다. 첫번째 부활한 자녀도 결국 죽음을 맞이합니다. 마카비서의 어머니는 “더 좋은 부활(35절)”을 얻기 위해 고문을 당하고 죽음을 맞습니다. 아들이 다시 살아난 어머니 이야기는 더 좋은 부활을 믿는 믿음의 이야기로 연결됩니다. 믿음이 현실 속에서 고통으로 이어진 이야기에 더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10장에는 당시 히브리서 독자들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들은 모욕과 환난으로 구경거리가 되었고, 감옥에 갇힌 사람들과 고통을 나누었고, 소유를 빼앗겼습니다(10장 32–34절). 11장의 하이라이트도 고난으로 막을 내립니다. 조롱, 채찍, 결박, 감옥, 돌, 톱질, 칼. “세상은 이런 사람들을 받아들일 만한 곳이 못 되었습니다.”(38절) 편지를 받은 사람들에게 믿음은 기적보다 고통의 현실이었습니다.

 

11장에는 믿음으로 무언가를 얻고 이룬 이야기도 있습니다. 앞서 부활한 자녀 이야기처럼, 핵심은 ‘얻었다’가 아닙니다. 11장의 마무리는 이렇게 맺습니다.

 

이 사람들은 모두 믿음으로 말미암아 훌륭한 사람이라는 평판은 받았지만, 약속된 것을 받지는 못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계획을 미리 세워두셔서, 우리가 없이는 그들이 완성에 이르지 못하게 하신 것입니다.
— 히브리서 11장 39–40절, 새번역

 

믿음의 모범을 보여준 사람들 모두가 약속된 것을 받지는 못한 것으로 정리합니다.

 

이룸이 아닌 드러내는 믿음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 히브리서 11:1, 개역개정

 

그럼 왜 믿음을 바라는 것의 실상이라고 말했을까요? 믿으면 바라는 것이 실재가 된다는 뜻일까요? 개역개정이 ‘실상’으로 옮긴 말은 휘포스타시스(ὑπόστασις)입니다. 이 말은 본래 밑에 서 있는 것, 곧 실체·실재를 뜻합니다.

 

히브리서는 1장 3절에서 같은 말을 씁니다. 아들은 “하나님의 본체대로의 모습”이시라는 그 ‘본체’가 휘포스타시스입니다. 예수님을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실재를 드러내시는 분으로 설명할 때 쓴 표현입니다(헬무트 쿠스터, TDNT 8권).

 

그 뒤에 나오는 단어도 함께 볼 필요가 있습니다. ‘증거’로 옮긴 엘렝코스(ἔλεγχος)는 사전에서 “어떤 것이 참임을 보이려고 증거를 제시하는 행위, 입증”으로 풀이됩니다. 법정에서 상대의 주장을 반박하려고 내놓는 논증을 가리키던 말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드러내 보이는 입증을 말하고 있습니다.

 

11장이 1절을 어떻게 풀어가는지 보면 더 분명해집니다. 1절에 말한 ‘보이지 않는 것’은 3절에서 다시 나옵니다. “믿음으로 우리는 세상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졌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보이는 것은 나타나 있는 것에서 된 것이 아닙니다.”(3절) 믿음이 세상을 지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지었고, 믿음은 보이는 세상 뒤에 있는 보이지 않는 근원을 알아봅니다.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들에 대하여” 경고를 받고 방주를 지었고(7절), 홍수는 왔습니다. 모세는 “보이지 않는 분을 마치 보는 듯이 바라보면서” 견뎌 냈습니다(27절). 11장 내내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을 만들어 내는 자리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이고, 보이지 않는 것을 드러내는 자리에 있습니다.

 

옛 주석가 오이쿠메니우스는 이 구절을 한 줄로 줄였습니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것으로 보여 준다”(ἀποδείκνυσι δὲ ὁρατὰ τὰ ἀόρατα, TDNT 2권, 각주에서 재인용).

 

히브리서에서 믿음은 내가 바라는 것을 만드는 힘이 아닙니다. 그저 드러낼 뿐입니다.

 

믿음은 그 자체로, 자기가 상상하는 무엇이든 실재로 불러낼 힘을 갖고 있지 않다. 창조하는 능력은 하나님께 있다.
It does not in itself have the power to conjure up the reality of whatever it imagines. The creative power resides with God.
— Sigurd Grindheim, The Letter to the Hebrews (Pillar New Testament Commentary, 2023)

 

첨부 이미지

 

우리 없이는

 

성취가 없으면 허무함으로 끝날 것 같습니다. 훌륭한 믿음을 가진 이들의 이 땅에서의 삶은 너무 가혹해 보입니다. 하나님은 왜 이렇게 하실까요?

 

40절이 이유를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계획을 미리 세워두셔서, 우리가 없이는 그들이 완성에 이르지 못하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 없이는’을 뒤집으면 ‘오직 우리와 함께’가 된다고 폴 엘링워스(Paul Ellingworth)는 풀이합니다(The Epistle to the Hebrews, NIGTC).

 

옛 족장과 사사와 예언자와 왕과 순교자들이 소망의 최종 목표를 얻지 못한 이유는 그들 쪽의 실패가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의 일부였다.
The reason that the patriarchs, judges, prophets, kings, and martyrs of old did not obtain the ultimate object of their hopes was not a failure on their part, but rather was part of the divine plan.
— Harold W. Attridge, The Epistle to the Hebrews (Hermeneia, 1989)

 

히브리서에서 완성은 공동체가 함께 이른다. 옛사람들은 새 언약의 신자들과 하나가 되기까지 거기에 이를 수 없었다.
In Hebrews, completion is reached by the community together. The ancients could not reach it until they could be united with the believers under the new covenant.
— Sigurd Grindheim, 같은 책

 

히브리서 11장은 한 사람이 믿음으로 무엇을 이루었는지에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믿음의 크기가 달라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실패해서도 아닙니다. 약속으로 받을 것이 없어서도 아닙니다. 모두가 함께 완성에 이르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완성으로 문을 닫기보다는, 인내 속에서 다른 이들도 함께 하도록 성취의 문을 열어놓으십니다.

 

4세기의 설교자 요한 크리소스토무스는 바로 이 구절을 강해하면서 더 짧게 말했습니다(John Chrysostom, 『히브리서 강해』 28편 2장). 우리가 모두 한 몸이라면, 그 몸은 부분부분이 아니라 다 함께 면류관을 쓸 때 더욱 기쁘다고.

 

믿음이 좋은 사람은 이루고 약한 사람은 못 이룬다는 셈법은 히브리서 11장에서 자리를 잃습니다. 완성은 개인의 상태에 따라 각자에게 배당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 전체가 함께 받는 것입니다.

 

시대를 초월한 연대

 

결국 믿음은 우리 삶 속에서 이뤄내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걸까요? 기적이 아닌 드러냄과 증언이라는 다른 성격의 이룸은 있습니다. 믿음은 흔히 생각하는 ‘소망’이 현실이 되게 하는 것에 앞서, 믿음으로 이어지는 ‘연대’를 만들어냅니다.

 

11장에서 나온 믿음의 선조들은 하나님께 “증언되었습니다”(2절, 39절). 12장 1절에서는 그 ‘증인’들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 증언을 받은 사람들이 이제 우리에게 하나님을 증언하는 사람들이 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증언을 받은 사람들이 이제, 신실하게 견딤으로써 하나님을 증언한 사람들이 된다.
Those who received the testimony from God are now those who have by their faithful endurance given testimony to God.
— Harold W. Attridge, 같은 책

 

시대를 초월해 그들의 삶은 우리를 잇습니다. 현실 속에서 믿음으로 고난을 당하는 이들에게, 그것이 끝이 아니라고, 우리 삶에는 보이지 않는 것이 있다고, 믿음으로 보고 있는 것이 진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증언의 손에 이끌려, 그분이 인내로 열어놓은 문으로 함께 들어갑니다. 손과 손이 이어진 끝에는 십자가를 먼저 지시고 우리를 위해 죽으신,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이 빚어내는 드러냄을 통해, 혼자처럼 보이는 그 삶을 사람들과 연대로, 그 연대로 이뤄지는 하나님 나라와 그 나라의 완성으로 이끄십니다. 오늘도 우리는 누군가와 믿음의 끈으로 이어져 여기에 와있고, 우리의 삶도 내일의 누군가의 손을 잡고 달려나갈 것입니다.

 


 

믿음이 부족해서 현실이 시궁창이라고요? 히브리서는 그렇게 묻지 않습니다. 대신, 이렇게 말을 건네는 듯합니다. 당신에게 건네는 수많은 손을 보라고. 믿음으로.

 

그러므로 이렇게 구름 떼와 같이 수많은 증인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으니, 우리도 갖가지 무거운 짐과 얽매는 죄를 벗어버리고, 우리 앞에 놓인 달음질을 참으면서 달려갑시다.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이신 예수를 바라봅시다.
— 히브리서 12장 1–2절, 새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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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원 드림

상식과 신앙 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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