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주🏺

국화주,
음력 9월 9일 중양절(수유절)이 되면 높은 산에 올라가 수유가 열린 가지를 꺾어
머리에 꽂고 사기를 물리치기 위해 마시던 절기주(節氣酒) 중 하나다.

절기에 따라 마시는 절기주.
1년 12달, 매달 2번의 절기가 있으니,
절기주를 챙긴다는 말은 즉,
1년에 24번 정식으로 술을 마신다는 것이다. (역시 술의 민족답다)

대표적인 절기주를 이야기하면,
정월 초하루(음력 1월 1일)에 마시는 '도소주'
정월 대보름(음력 1월 15일)에 마시는 '귀밝이술'
청명(음력 2~3월)에 마시는 '청명주'
단오(음력 5월 5일)에 마시는 '창포주'
한가위(음력 8월 15일)에 마시는 '동동주'
납월(음력 12월)에 마시는 '납주'
그 외에도 많이 있다.

이 중에서 햇살이 한가득 내리쬐는 날이면 생각나는 술이 있다.
해당 절기에 먹어야 더욱 맛있는 술이겠지만,
나에겐 오늘같이 햇살이 가득한 맑은 하늘이 보일 때면 생각나는 술이다.
바로 청명에 마시는 '청명주'다.

마음까지도 맑아지는, 청명주(淸明酒)

고희든-청명의 시간

오늘의 글은 ⬆️위 노래를 들으면서 읽어보길 추천한다.
처음 청명주를 마셨을 때 나의 기분을 참 잘 표현해주는 노래다.

전통주이자 약주이기에 누룩이 들어 있어서 따를 때는 묽고 찐하게 떨어졌다.
그러나 마시는 순간 고급스러운 정종을 마시는 기분이 들면서 부드럽고
달달하며 상큼하기까지 해서 기분이 좋아지는 술이었다.

개인적으로 나는 단 술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다.
백거이의 시 중에 이런 시 구절이 있다. 

이 구절을 보는 순간 난 백거이와 참 잘 맞지 않을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마 앞으로 종종 나의 글 속에서 백거이의 이야기가 등장할 것 같다.)
아무튼, 청명주는 이런 나의 취향에 맞지 않는 달달하고 상큼한 술이었지만,
너무 반해서 눈 깜짝할 새에 한 병을 다 마셔버렸다.

청명주는 24절기 중 '청명'에 담가 마신 술이다.
'청명'은 하늘이 차츰 맑아진다는 의미를 갖고 있으며, 봄에서 여름으로 바뀌는 시기의 절기다.
조선 후기 성리학자인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나는 평생 청명주를 가장 좋아한다."

약주이면서 절기주인 청명주.
청명주를 만드는 재료는 딱 3개다.

백미(쌀), 정화수(물), 누룩.

대체 이 3가지 재료가 무엇이길래 이렇게 맛있는 술이 나올 수 있을까.

술도 결국 물이다

1830년 실학자 최한기의 <농정회요>에는 이런 말이 있다.
(※농정회요 : 농촌 생활 전반에 걸친 내용을 적은 책)

이 말을 보는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다.
모든 것은 기본이 가장 중요하다.
3가지 재료만 갖고 만들어진 청명주,
결국 이 청명주의 핵심은 물이지 않을까.

이 물은 우리가 지금 현재 마시는 삼*수, 백*수, 아이*스 같은 물이 아니다.
정화수다.

그럼 대체 정화수는 무엇일까?
정화수는 이른 새벽에 길은 맑고 정결한 우물물이다.
신앙 행위의 대상이면서 매체가 되는 우물물로 맑고 정갈함을 함축하고 있다.
흔히 사극을 보면 물 한잔 떠서 "비나이다" 할 때의 바로 그 물이라는 것이다.

동의보감 속에서도 정화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동의보감에 나오는 물 가운데 으뜸으로 꼽히는 것이 바로 정화수인데,
정화수는 입에서 냄새가 나는 것을 없애고, 얼굴빛이 좋아지게 하며, 눈에 생긴 군살과 눈자위를 막이 가리는 병을 없애주는 데 효능이 있다고 한다.
또한 평한 기운을 갖고 있어 술을 마신 뒤에 생기는 설사도 그치게 한다고 한다.

이렇게 신성하고 정갈한 정화수로 만드는 술이기에 더욱 귀하고 맛이 깊다고 느끼는 것이지 않을까. 그렇기에 달고 기분이 맑아지며 청아해지는 술을 만들 수 있었던 것 아닐까.

그러나 청명주의 재료에서 정화수가 전부는 아니었다.

1700년대 순한글로 적힌 조리서인 <음식보>에 청명주를 만드는 방법이 나와있다.

우리술의 주인공은 누룩

물과 술의 가장 큰 차이가 알코올의 유무라면,
3가지 재료에서 가장 중요한 건 다른 무엇보다도 누룩일 것이다.

누룩은 술을 만드는 효소를 갖고 있는 곰팡이를 곡류에 번식시킨 것이다.
다시 말해 곡물을 이용해서 술을 발효시키기 위한 발효제라는 것이다.
이것이 왜 필요한 걸까?

와인이나 과실주는 그 과실이 갖고 있는 당을 이용해서 에탄올을 만들어내는데,
우리술의 주 재료인 쌀은 당이 주원료가 아니기 때문에
쌀 속에 있는 전분을 당으로 바꾸는 과정이 필요하다.
바로 그 과정에서 누룩 속의 효모가 효소들을 만들어서
전분을 당으로 바꿔주는 것이며, 동시에 그 당을 에탄올로 만들어주는 것이다.
다시 말해 누룩은 술 제작의 부스터 역할을 하는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청명주는 '한영석 청명주'다.
한영석 명인은 국내 유일의 누룩 명인이다.

한영석 명인은 처음부터 술을 만들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가 누룩과 만나게 되었던 그 시작은 바로 식초였다.
식초를 연구하고 있던 그는 "좋은 술이 좋은 식초가 된다"라는 말을 듣고,
가양주연구소에 가서 술을 배우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다 그곳에서 "좋은 누룩이 좋은 술을 만든다"라는 말을 듣고,
그는 누룩에 빠지게 되었던 것이었다.

위 말들처럼 좋은 술이 나와야 좋은 식초가 되는 것이고,
좋은 술을 만들기 위해서는 좋은 누룩이 나와야 한다.
다시 말해 누룩을 망치게 되면 술뿐 아니라 식초도 만들 수 없다는 의미다.

그런데 옛날에는 식초가 식재료를 넘어서서 의약품으로도 쓰였기에,
좋은 식초를 만들기 위한 술을 제작하는 것이 너무 중요했던 것이다.
그래서 당시 저잣거리에서는 좋은 누룩을 판매하는 가게까지 있었다.

은국전.
은국(銀麴)은 좋은 누룩을 비유적으로 말하는 것이다.
좋은 누룩은 누룩을 쪼갰을 때 속이 썩지 않고,
하얀 백국과 황국이 골고루 퍼져 있는 것인데,
마치 이 색이 은색과 같아서 누룩을 은국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이렇게 누룩은 우리술을 만들 때 중요한 재료인 것이다.
누군가는 누룩의 역할에 대해서 이렇게 정리하기도 했다.

맛과 향을 결정짓는다는 말처럼 똑같은 쌀과 물을 썼지만,
어떤 누룩을 쓰는지에 따라 맛과 향이 달라진다.
누룩은 각 나라의 독특한 기후와 환경에도 영향을 받는다.
생긴 모양, 제조법, 발효기간에 있어서도 많은 차이를 보인다.

우리나라의 경우, 
산간지역은 넓고 얇은 누룩,
평야지역은 두껍고 작은 누룩,
제주지역은 작고 얇은 누룩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누룩의 형태도 품질에 큰 영향을 준다.

누룩의 지름이 너무 짧으면 수분이 너무 발산되어서
균이 잘 침투되지 않아 숙성이 불량하고,
너무 얇으면 빠르게 숙성되지만 향미가 좋지 않고,
술찌꺼기가 많이 주량이 적어진다.
반대로 너무 두꺼우면 내부의 수분이 발산되기 어려워
내부 온도가 높아질 가능성이 있고, 제조 후 건조도 어려워진다.

또한 누룩은 밟는 정도에 따라서 술맛이 달라진다고 하는데,
이에 대한 기록 중에 참 재밌는 기록이 하나 있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언제부터 술을 마셨고, 언제부터 누룩이 등장했을까?

한국에서 누룩을 처음 사용했던 시기는 삼국시대 이전으로 추측하고 있다.
기록에 따라 술 이야기가 처음 등장하는 것은 <고삼국사기>다.

고구려는 세운 주몽(동명왕)신화를 보면,
"천체의 아들 해모수가 능신 연못가 수궁에서 유화라는 여자에게 술을 먹여 취하게 한 다음 주몽을 낳았다."는 기록이 있다.

1123년 중국의 서긍이 쓴 <고려도경>을 보면 한국의 술에 누룩을 사용했다는 기록도 볼 수 있다.
또한 술은 의약품으로도 쓰였으니 아주 오래전부터 술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였다고 할 수 있다.

이쯤 되니 정말 우리는 배달의 민족이 아닌 술의 민족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거기다 지금은 특정 주조장에서 술을 만들고 있지만,
예전에는 각자의 집에서 술을 직접 내리고 빚을 정도로
집집마다의 술 맛이 다양했던 가양주 문화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명인들이 술을 제조할 뿐이지 각 집집마다 술을 제조하고 있지는 않다. 

다시 돌려놔, 가양주

집집마다 있던 가양주 문화는 1900년대부터 수난을 겪게 된다.

1905년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된 후, 일제는 자신들이 직접 술을 제조해 막대한 이익을 창출하고자 우리 전통주를 막기 시작했다.
그리고 1909년 모든 술에 세금을 매기는 주세법이 시작되었다.
이후 1916년에는 주세령을 반포하며 가양주 문화를 말살하기 시작했다.

주세령은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이때부터 가양주 제조는 '제한면허제'로 변경되었으며,
사실상 금지와 다를 바 없는 현실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렇게 1916년 36만 개소에 이르렀던 가양주는
1929년 265개소, 1932년 1개소로 줄어들게 된다.

거기다 일제는 각 고을마다 주류 공장을 지정해 생산하기 시작했는데,
당시 일본에서 들여온 '주정'이라 불린 에탄올을 술에 섞어
일본식 청주로 둔갑시키면서 우리 전통주의 문화를 변질시켰다.

우리 전통주는 일제의 통제 하에 품질과 규격이 단일화되었고,
계속된 주세령 강화 및 개정 법에 따라 전통주는 설 자리를 잃게 되었다.
1945년 해방이 되었으나 전통주의 수난은 달라지지 않았다.

1952년 6·25 전쟁이 시작되고, 이후 1956년 먹을 곡식도 부족했기에
'양곡보호령'이 선포되며 일본식 청주를 제외한 쌀로 빚은 술은 불법이 되었다.
그러다 80년대에 들어 다시 양곡시장이 호전되었으며,
86'아시안 게임, 88' 서울 올림픽을 계기로 우리의 문화를 부활시키자는 명목으로
일제에 의해 끊어진 전통주의 맥을 복원하는 작업이 시작되었다.

언제나 이런 기록을 보면 무너져 있던 우리의 전통은 80년대에 살아나게 되었는데, 이때 당시 우리가 아시안 게임과 올림픽을 개최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정말 상상도 하고 싶지 않다.  

요즘은 크라우드 펀딩으로 다양한 전통주가 등장하고 있으며,
여러 전통주를 판매하는 식당과 술집도 등장하고 있다.
그러나 전통주라는 말마저도 왠지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그냥 우리술, 한국술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나에게 이런 생각을 일깨워준 곳 역시 전통주를 판매하는 술집이다.
수원 행궁동에 위치한 '팔딱산'.
이곳에서 꼭 한영석 청명주는 마셔보길 추천한다.

안주 없이 마셔도 괜찮다면,
술만 구매해서 편의점에서 파는 얼음컵을 활용해 야외에서 노상을 해보길 추천한다. (포장하면 20% 할인까지 되니 말이다.)
저절로 상쾌해지는 기분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또 다른 약주, 하향주(荷香酒)

한영석 명인의 술을 알고 난 후,
우연히 크라우드 펀딩에서 그가 빚은 또 다른 술을 하나 더 발견하게 되었다. 

바로 하향주(荷香酒).

하향주는 연꽃 향이 나는 술이라는 의미다.
그 역사는 신라시대까지 올라가는데,
신라 중기 비슬산 중턱에 위치한 도성암이 병란으로 모두 차 버렸고,
이때 성덕왕이 도성암을 다시 지으며 인부들에게 제공하기 위해 빚었던 술에서 시작되었다.
이후 조선 광해군 때 비슬산이 천년 요새로서 군사들이 주둔하고 있었고,
당시 주둔대장이 왕에게 이 술을 드렸더니 독특한 맛과 향이 천하 약주라고 칭찬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 후 매 10월 상달에 조정에 바쳤던 술이 바로 하향주다.

군주들이 즐겨 마시는 술,
대인이 먹는 술로 알려져 있으며
동의보감에도 "맛이 달고 독이 없으며 열과 풍을 제거하고 피로와 갈증, 폐를 치유한다"라고 적혀 있을 정도다.

한영석 하향주는 조선시대 하향주를 충실하게 재현했으며,
연꽃향을 강화시키기 위해 발효 온도를 낮추고 발효 기간도 60일로 늘렸다.
그래서인지 술을 따는 순간 연꽃 속에 파묻혀 있는 것 같은 느낌이 가득해진다.

두 술 모두 가볍게 먹기 참 좋은 술이다.
왠지 모르게 선비들이 좋아하던 약주를 이야기했더니 사극 드라마 속에 나오는 주인공들에 이 술들을 비유해보고 싶어졌다.

'청명주'는 구르미 그린 달빛의 이영(박보검) 같으며,
'하향주'는 구르미 그린 달빛의 김윤성(진영) 같다.

전통술이라 부르는 지금의 문화가 우리술이라 불리는 날이 올 때까지
약주와 사랑에 빠져 있어야지.
그렇게 또 크라우디에서 청주와 약주를 주문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