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화랑의 「그러니까... 편지#3」

  발자크의 소설을 읽다가 이 글을 쓰고 있다. 그의 가만히 바라만 보아도 바스라질 것 같이 나약하고 또 한편으론 언젠가의 날갯짓처럼 무척 힘 있고 우아한 문장들. 가만히 눈에 담는다. 때때로 이런 유려한 문장들을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은 채 조용히 읽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나는 가슴 벅차게 행복해지곤 한다.

  결론은 꽤나 행복하다는 것이다. 어디론가부터 바람이 불어오고(황사가 짙어지고..) 사실 감당할 수 없는 슬픔들이 도처에 넘쳐흐르지만, 미약한 나는 영영 그것을 모르고, 몇 개의 문장을 읽고 커피를 목에 넘기며 감히 감격해한다. 감각들을 힘껏 긴장시키지도 않고, 내게 흘러오는 것들과 시간과 함께 내게서 흘러가는 것들을 바라보면서.

  어제는 새 회사에 면접을 보고 돌아오는 길에 시간이 남아 단골 미용실에 들렀다. 어쩌다보니 나는 미용실을 두 군데 다니는데, 한쪽은 커다랗고 미용사가 예닐곱 쯤 있는 곳이고, 다른 한 곳은 집 바로 건너편 건물 2층 구석에 자리 잡은 화분이 아주 아주 많고(미용실 의자를 천으로 가려두면 누구도 그곳을 미용실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아주머니 미용사가 홀로 운영하는 작고 오래된 미용실이다.

  나는 두 곳 모두의 단골로 도회적인 미용실엔 주기적으로 펌을 하러 가고 작은 미용실엔 커트를 목적으로 가고 있다. 작은 미용실 쪽은 사실 다니기 시작한지 얼마 되진 않았는데, 일종의 동네 사랑방 같은 곳이라 너무 친근한 느낌이 들어 바로 내적 단골이 되어버렸다. 그도 그럴것이 처음 미용실에 가자마자 웬 익힌 대추에 호두를 끼운 간식(손수 실링기로 포장한 듯 단단하고 작은 비닐에 싸여 있었다)을 주셔서 손에 꼭 쥐고 커트를 받았다. 커트가 끝나고 돌아갈 때는 펌을 하고 계시던 다른 아주머니와 함께 얘기나 하자고 차를 권유하기도 하셨다. 항상 친절하시고 자식 자랑도 귀엽게 하신다. 몇 번 가지도 않았는데 벌써 나도 그 집안 사정을 대강이나마 알고 있다. 굳이 단점을 꼽자면 직접 전화를 걸어 예약을 하고 가야한다는 점인데, 저렴한 가격과 아주머니의 꼼꼼한 커트 실력(뭔가 예스러운 스타일의 커트랄까. 확실히 요즘 미용실들과는 차이가 느껴진다. 가위질을 굉장히 많이 하고 상대적으로 여러 층의 레이어를 내는 것에 집중한다)과 친절함이 그 사소한 단점을 크게 상쇄하고도 남는다고 생각한다.

  어제는 커다란 미용실 쪽에 갔다. 나의 건방진 말총머리는 그냥 두면 좀처럼 말을 듣지 않고 사방으로 뻗치며 심지어 눈을 찌르기 때문에, 종종 펌으로 힘을 빼줘야 한다. 스타일에 엄청나게 신경을 쓰는 편은 아니지만 펌을 해주지 않으면 조금만 자라도 눈을 찌르곤 하기 때문에 주기적으로 방문한다. 

  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으면 매번 비슷한 대화가 이어진다. 날씨 이야기를 하고 근래에 있었던 일에 대해 가볍게 묻는다. 꽃구경은 다녀오셨어요? 아니요. 그냥 지나가다 좀 봤습니다. 하하하. 호호호. 하는 식이다. 그리고 때가 되면 항상 하던 것처럼 하면 될까요 하고 물어오고, 나는 고개를 끄덕이거나 요청사항을 간략하게 전달한다. 담당 미용사분은 말이 많지 않은 편이라 좋다. 작은 미용실의 아주머니처럼 특유의 친근함을 갖추면 괜찮을지 몰라도 보통은 미용사분이 말이 너무 많으면 조금 피곤하다고 느낀다.

  어제는 펌을 하며 대차게 졸았다. 어렸을 적부터 미용실에 가면 십중팔구는 잠에 들었다. 나이를 좀 먹고 나선 꽤 괜찮아진 편이지만 지금도 종종 졸거나 잠에 들어버린다. 미용실의 작은 소음들 사이에서 누가 머리를 계속 만져주면 나도 모르게 잠에 들어버리는 것이다. 미용사분들이 불편해하실 것을 생각해서 고쳐야지 하고 마음먹어보지만 이렇게 매번 실패하고 만다.

  발자크의 소설 속 주인공처럼 나 또한 존재에 대해 가능한 사유하고, 존재의 기능과 존재의 이유에 대해 골몰하고, 자신을 가능한 객관적으로 관조하고, 사물 자체의 속성과 나와의 연관성에 대해 생각하고, 그리고 또 사건, 나를 둘러싼 그 수많은 사건들 그리고 그것들을 바라보던 나의 마음과 그 마음의 깊이와 그 언젠가 한겨울처럼 차갑던 마음의 온도와 그 모든 것들을 기화시키던 사랑과 순간의 감정들과...

  그저 행복 하고 싶다고 생각하면서도 좀처럼 그것과 조금도 가깝지 않은 행위들과 언어들과 표정들을 반복했던 시간들이 있었다. 유리병 속 가득 찬 물을 떠다니는 모래와 먼지들처럼, 나를 어지럽고 혼란스럽게 만들던 수많은 감정들과 사건들이 마침내 고요히 가라앉을 시간이 왔다고 – 생각해본다. 오후의 카페에서 보드랍고 달콤한 기억들을 더듬어보면서. 마침내 그 시간이 왔다고. 오늘은 그렇게 생각해본다. 어제는 세월호 10주기였다. 시청역 3번 출구로 나가 동네를 오랫동안 정처 없이 걸었다. 기억의 집에는 가지 않았다. 가지 못했다.

마음을 움직이는, 움직였던 문장들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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