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일에 시간 어때요

부산에 가면

가을에 생각하는 그 여름의 부산

2025.10.22 | 조회 8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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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랑한 은둔자. 김토성

혼자 시간을 보내는 것은 낫기 위해서인가, 숨기 위해서인가. 그 중간 어딘가에서.

전에 살던 집 앞엔 계수나무가 있어서 계절의 길목 저편에서 가을 발소리가 들릴 때쯤이면 달콤한 향기가 났다. 집 앞 공터에 떨어진 작고 동글동글한 하트 모양 계수나무 잎들 사이로 달달한 냄새가 나면 바로 집에 들어가지 않고 나무 밑 벤치에 앉아 나무를 올려다보며 가을을 기다리곤 했다.

 

이사 온 집 근처에는 계수나무가 없다는걸 <제철 행복>을 읽다가 깨달았다. 매년 풍기던 달콤한 냄새가 올해는 없었다는걸 모르고 있었다니 계수나무가 알면 섭섭해할 일이다. 만나지 못해 섭섭한 것들이 또 있다면 뒷산 산책로와 선정릉에 떨어져 있던 귀여운 도토리와 솔방울. 다람쥐나 청설모가 먹고 난 솔방울은 새우튀김처럼 생겼는데 올해는 하나도 보지 못했다. 나도 모르게 잘 챙기고있던 제철 행복을 올해는 놓쳐버렸다. 아쉽긴 하지만 이번에는 평소에 잘 즐기지 못했던 제철 가을 하늘을 매일매일 마음껏 즐기고 있으니 괜찮은 것 같기도 하다.

 

요즘 하늘은 한순간도 지루할 틈이 없다. 내가 붓놀림이 조금만 예사롭지 않았다면 매일 하늘을 그릴 테고, 귀가 좀 더 밝고 머릿속 오선지가 더 진했다면 하늘을 연주할 곡을 썼을텐데 할 줄 아는 게 보고 걷는 것 뿐이라 틈틈이 바라보고 하늘 밑을 걸었다. 그래도 좋기만 한 걸 보니 제철이 맞나보다.

 

한창 가을이 제철이긴 하지만 여름이 막상 가버리면 서운하다. 한창때는 결별하고 싶기만 하다가 가버리면 아쉽고 서운한 계절은 여름뿐이다. 그래서인지 녹록치 않은 일이 많았더라도 뜨거웠던 여름의 기억은 뜨겁지는 않은 반짝이는 여름의 풍경으로 남는다. 마치 투명한 레진을 부어 만든 오브제처럼 단단하고 아름답다. 한여름 해변가의 선크림 냄새처럼 어떤 여름들은 내 마음 한편에 차곡차곡 쌓인다. 따뜻함이 담긴 단단하고 투명한 기억들은 부서지지 않는다.

 

부산이 그렇다.

해운대 해변에 친구와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던 여름밤에 우리가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 기억나진 않아도 단단한 발자국처럼 선명하게 마음 어딘가에 새겨져 있다. 도우너와 둘리가 떠다니던 광안리의 빛나는 밤하늘과, 눅눅한 책냄새 사이에서 서울의 역사를 담아둔 책을 발견했던 보수동의 어느 책방의 기억도 전부 여름이다. 그래서인지 가끔은 서점을 돌아다니다 구석에 고인 진한 책냄새 속을 지날 때면 부산이 생각난다. 백열등 같은 부산의 여름. 그런 단단하고 변하지 않는 따뜻한 기억들이 좋다. 그래서 부산이 좋다.

 

최백호의 <부산에 가면>이라는 노래를 좋아한다. 두텁고 진한 최백호의 목소리를 따라가다 보면 저 끝에 광안리가 있다. 어제 잠실역을 걸으며 듣던 최백호의 목소리에서 여름을 생각하고 부산을 떠올렸다.

 

<부산에 가면> 첫 구절은 '부산에 가면 다시 너를 볼 수 있을까'인데 매번 그게 '부산에 가면 다시 나를 볼 수 있을까'로 들린다. 그래서 이 노래를 듣다보면 부산의 여름 속에서 밝고 행복했던 그때의 내가 보고 싶어진다.

 

5년 전 겨울 바다를 보며 썼던 글이 있다.

'아직은 살아갈 수 있다는 마음을 다잡는 순간은 오랫동안 변하지 않는 곳의 순간을 들여다보고 올 때인 것 같다.'

 

이제는 '변하지 않는 따뜻한 기억들도'라고 덧붙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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