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일에 시간 어때요

레고

Play Unstoppable

2025.10.29 | 조회 56 |
0
|
명랑한 은둔자. 김토성의 프로필 이미지

명랑한 은둔자. 김토성

혼자 시간을 보내는 것은 낫기 위해서인가, 숨기 위해서인가. 그 중간 어딘가에서.

못 본 지 5, 6년은 된 것 같다.

그래도 1년에 한번은 연락을 한다. 1년에 하루는 생일이니까. 그간 잘 있었냐고 별일 없냐고 나도 별일은 없다고. 그리고는 다음에 보자는 말을 잘있으라는 말처럼 한다.

 

우리는 같은 동네에 살았다. 18살쯤에 친해지기 시작했던 것 같다. 친구의 친구였다. 보통 그 나이대 아이들은 친구의 친구가 곧 친구가 된다. 친구라는 단어의 무게가 무겁던 때, 누구와도 쉽게 친해지고 쉽게 멀어지지 못하는 그런 시기의 친구다. 공부는 좀 했던 것 같은데 어쩌다 보니 나와 함께 재수를 했다. 술은 잘 못하지만 술자리는 좋아하고 술게임을 잘했다. 대학에 들어가고 군대에 가고 서로 각자의 일을 하다 보니 만나는 횟수가 점점 적어졌다. 난 여전히 술을 좋아했고 친구는 이제 술을 마시지 않는다. 퇴근하고 저녁에 만나서 밥만 먹기에는 아쉬우니까 난 술 마시는 친구를 찾았고 그 친구는 열심히 운동을 했다. 어쩌다 생일 즈음에 생각이 나면 친구 집 앞으로 찾아가 친구를 불러내서 초코파이라도 주면서 생일 축하한다고 말해줬다(지금은 카톡으로 선물을 보내지만).

 

올해 생일에도 선물을 보내며 별일 없음을 확인하는 안부 인사를 하고 어김없이 다음에 보자는 말을 하려 했는데 갑자기 친구가 본인의 별일을 이야기했다. 우울증이 심해서 사람을 잘 만나지 못한다고. 아침, 저녁으로 세로토닌을 먹고 끼니마다 항우울제도 먹지만 쉽지 않다고 했다.

 

그치 쉽지 않지. 나아가는 것도, 나아지는 것도, 심지어 가만히 서 있는 것도.

 

나름의 노력인지 새로운 취미를 만들었다고 했다. 밤에 혼자 조용히 레고를 조립하고 있으면 그게 그렇게 좋다면서 요즘 조립한 레고들 사진을 보여줬다. 좋은 취미라고 대답했다. 친구는 해적왕이 되고 싶은지 고잉 메리 호를 만들었다.

 

매일 새로운 하루가 주어질 때 나에게 이 하루를 어떻게 살 것인지 선택할 수 있는 옵션들이 있다. 아침에 야심차게 밥을 먹고 회사에 갔다가 저녁에는 친구를 만나지만 틈틈이 여행 계획을 짜는 알찬 하루를 보낼 수도 있고, 어제 과음한 탓에 조금 축 처진 하루를 보내지만 기운 내서 저녁에 운동을 가는 무서운 하루를 보낼 수도 있다. 그리고 새로운 하루가 주어지지 않도록 삶을 스스로 끝내는 선택지도 있다.

 

친구랑 얘기하다 보니 삶을 마무리하는 선택지가 있던 시기가 떠올랐다. 그해 겨울의 차가운 공기는 찢어질 듯 팽팽하게 부풀어 올라 있었다. 눈이 시릴 만큼 파란 하늘아래 나 혼자 밖에 없던 때. 밖이 환할 수록 내 안은 더 어두워지기만 했다. 혼자서 견디기 힘들었고 하루하루 버티는게 힘겨웠다. 그러다 어느 순간 더 이상 힘들지 않았다. 아마 그때 부터 내 존재를 어떻게 지울 것인지 고민했던 것 같다.

 

그러다 다시 살아갈 힘을 얻은건 그저 그런 것들 덕분이었다.

누군가의 잃어버린 기억에 대한 이야기라던가, 추운 겨울 병실 안 티비에서 본 내가 사는 동네 근처를 보여주던 아침 교통 방송이라던가, 무심코 집어 든 시집의 사막에 대한 시라던가 그런 별것 아닌 것들.

왜 그런 것들이었는지 나도 잘 모르겠다.

 

아이슬란드에서 빙하 트래킹을 하다 보면 중간중간 동그랗게 녹아서 파인 곳들이 있다. 가이드는 저 구덩이는 대부분 작은 돌멩이 때문에 생긴다고 했다. 흰 빙하 위에 돌멩이 하나가 놓여있으면 그 돌멩이가 태양빛을 받아 달궈져서 그 주변을 조금씩 녹여서 저렇게 된다고 설명했다. 아마 그 별것 아닌 것들이 내게는 돌멩이지 않았나 생각해본다.

 

며칠 전에 책장에 놓인 레고를 보고 친구 생각이 났다.  맥라렌 F1 차량 레고를 선물로 보냈다.

이 넓은 우주에 가끔씩 널 생각하는 사람이 여기 한명 더 있다는걸 알려주고 싶었다.

일 년에 적어도 한번은 널 생각하니까 기억하라고.

레고든 뭐든 친구가 돌멩이를 찾으면 좋겠다.

 

오늘은 누자베스를 들으며 글을 썼다.

 

다가올 뉴스레터가 궁금하신가요?

지금 구독해서 새로운 레터를 받아보세요

✉️

이번 뉴스레터 어떠셨나요?

명랑한 은둔자. 김토성 님에게 ☕️ 커피와 ✉️ 쪽지를 보내보세요!

댓글

의견을 남겨주세요

확인
의견이 있으신가요? 제일 먼저 댓글을 달아보세요 !
© 2025 명랑한 은둔자. 김토성

혼자 시간을 보내는 것은 낫기 위해서인가, 숨기 위해서인가. 그 중간 어딘가에서.

뉴스레터 문의saturnkim202@naver.com

메일리 로고

도움말 자주 묻는 질문 오류 및 기능 관련 제보

서비스 이용 문의admin@team.maily.so

메일리 사업자 정보

메일리 (대표자: 이한결) | 사업자번호: 717-47-00705 | 서울특별시 성동구 왕십리로10길 6, 11층 1109호

이용약관 | 개인정보처리방침 | 정기결제 이용약관 | 라이선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