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일에 시간 어때요

요리

먹는 것을 만드는 일 그 이상

2026.01.14 | 조회 7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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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랑한 은둔자. 김토성

혼자 시간을 보내는 것은 낫기 위해서인가, 숨기 위해서인가. 그 중간 어딘가에서.

몇 년전 부터 요리 관련 컨텐츠가 부쩍 많아졌다. 음식을 하는 일을 좋아하다보니 볼거리가 많아져서 즐거웠다. 경연 프로그램은 그다지 좋아하진 않지만 칼과 불의 대결이 요리사를 통해 부딪치는 일은 어찌나 재미있고 흥미진진하던지 가끔은 옆에서 뭐라고 하는지도 안들릴 정도로 집중해서 보곤 했다. 최근 방영한 흑백요리사2도 벌써 끝나버린게 아쉬울만큼 너무 너무 정말 즐겁게 보았다.

 

어릴 때 부터 요리하는게 좋았다. 지금도 잘 하지는 못하지만 그 과정이 재미있다. 결과와 상관없이 오롯하게 그 과정을 전부 즐길 수 있는 몇 안되는 행위다. 요리한 음식이 맛이 없으면 다음에 다른 방식으로 해보고 싶어지고, 맛이 있으면 내가 생각한 조리법이 잘 맞아 들어간게 즐겁다. 어떤 음식이 펼쳐지든 각자 그 나름대로 내게는 다 뜻깊다.

 

혼자 살 때 종종 늦은 저녁시간에 간이 식탁에 앉아 마늘을 깠다. 껍질을 까다보면 번잡한 마음이 뽀얗고 매끈한 마늘처럼 누그러드는 듯 했다. 그냥 그 일이 좋았다. 잘 정리해둔 마늘을 보는 일도 그렇게 만드는 일도. 머리가 복잡할 때면 카레를 만들었다. 누가 만들어도 맛있을 고체 블럭 카레지만 양파를 채썰어 은은한 불에 진한 갈색이 되도록 오래 볶고 당근과 감자는 크게 크게 썰어 넣고 가끔은 등심도 크게 덩어리채 넣어서 어른의 맛을 냈다. 그렇게 냄비 가득 카레를 만들어두면 텅빈 집에 나 혼자여도 아늑했다. 외로움을, 상실감을, 고단함을 음식을 만드는 행위로 달래주었던 것 같다. 보글보글 물이 끓는 소리, 또각또각 칼이 야채를 지나 도마에 닿는 경쾌한 소리, 뜨겁게 달궈진 팬 위로 고기가 올라갔을 때 불과 쇠가 만드는 날카로운 마찰음. 그런 것들이 언제나 마음 한 켠에 있다.

 

해외에서 요리를 해보고 싶어서 뉴욕으로 갔던 친구는 처음엔 한식당에서 나중엔 컨셉이 특이한 양식당에서 일을 했다(뉴욕에서 양식당이라는 표현이 이상하긴 한데 정확히 뭘 하는 식당인지 모르겠다). 당시에 나도 뉴욕에 있었는데 서로 찾을 사람이 없던 우리는 자주 만났다. 난 그 친구의 주방 이야기를 듣는걸 좋아했다. 친구에겐 매일 반복되는 고단한 일상이었겠지만 내겐 경험해 본적 없는, 항상 받아보기만 하던 멋지고 맛있는 음식이 만들어지는 비밀의 공간을 엿보는 듯 한 기분이었다. 그리고 가끔식 친구는 주방에서 잘 쓰지 않는 재료를 내게 가져다 주었다. 그 선물들이 참 좋았다. 말도 잘 통하지 않는 주방에서 정신없이 일만 해도 벅찼을텐데, 어떻게 하면 연어의 껍질이 바삭바삭하게 구워지는지 따위를 궁금해하며 주방을 동경하던 날 생각하며 챙겨준 그 마음이 지금도 참 고맙다.

 

요리를 업으로 생각해보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다만 그 당시 20대 때는 요리 보다 하고 싶은 것들이 더 많았다. 즐거운 일이지만 그게 일로서 할 수도 있는 것인가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해보지 않았다. 나중에 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하면서 작게 식당하면 재미있겠다 수준이었다. 시간이 흘러 요리사라는 직업이, 음식을 만드는 일이 얼마나 고되고 힘든지 알게되면서 요리를 업으로 하는 사람이 될 수는 없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해온 것들을 모두 놓고 고난과 역경을 감당하리라 다짐하며 주방으로 들어갈 용기도 없었다.

 

얼마전 친구들을 불러 집에서 심야식당을 열었다. 심야식당 드라마처럼 내가 마스터가 되어 이러저런 음식을하고 도란도란 이야기를 하며 술을 마시는 이벤트를 난 심야식당이라고 부른다.

심야식당을 열기로 공표하고 그 주 내내 신이 났다. 무슨 요리를 할지, 술은 어떤걸 준비할지 즐거운 고민들이 가득했다. 제철음식은 먹어야하니까 방어를 하자. 수산시장에 간 김에 그날 선도가 좋은 것들을 조금 더 사 보자. 새우와 우니도 좀 있으면 좋겠네. 이런 부푼 마음을 가지고 수산시장에 갔다. 적당한 크기의 방어를 1/4 정도 필렛을 뜨고 석화와 단새우, 우니 등을 샀다. 쌀쌀한 날에 수산시장을 돌아다니고 있자니 상쾌한 흥분감이 올라왔다. 한번 밖에 하지 않지만 내 업장이 있는 오너 쉐프가 된 마음이랄까. 술도 요리에 어울리게끔 페어링하려고 이것저것 골라보면서 궁합을 상상하는 일이 재미있었다.

석화는 찹한 양파와 레몬즙, 타바스코만 뿌리고 기름기가 덜한 방어 부위를 작게 다이스해서 양파와 화이트 발사믹으로 버무렸고 단새우와 우니는 구운 감태에 싸서 먹는 전체요리를 냈다. 굴을 위한 사케와 마셨는데 머릿속에 생각했던 맛과 비슷해서 기분이 좋았다. 본식은 노른자 간장에 재워뒀던 방어 절반, 아무것도 하지 않은 방어 절반, 굴 감바스(굴 알 아히요) 그리고 새우 완자탕을 냈다. 전부 맛을 생각해보면서 어떤 술과 어느 시점에 먹으면 좋겠다고 계획하고 만들긴 했지만, 뭐 언제나 그렇듯 계획대로 되진 않았다. 하지만 재료를 준비하고 다듬고 붓고 끓이고 다지고 하는 그 모든 과정이 정말 즐거웠다. 맛있게 먹는 친구들도 그 친구들과 함께하는 순간들도 전부 빠짐없이 행복하기만 했다.

 

그 날은 정신없이 마냥 즐겁기만 해서 덜 느꼈는데 며칠 지나서 차분히 생각해보니 난 요리하는 일을 정말 즐거워한다. 혼자 마늘을 다듬고 카레를 끓이던 때 보다 훨씬 많이 그리고 진지하게.

 

잘하든 못하든 그 자체가 좋은 일을 찾아서, 아니 이미 예전에 찾긴 했는데 그게 더 좋아져서 감사하다. 그리고 그 일은 인간이 살아가기 위해 꼭 필요한 일이니 꽤 멋지지 아니한가.

내일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카레를 만들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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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명랑한 은둔자. 김토성의 프로필 이미지

    명랑한 은둔자. 김토성

    0
    about 2 months 전

    요리는 최애 무엇인가요라는 말은 최애 요리는 무엇인가요라는 말인데요. 자정을 2분 남기고 퇴고 1도 없이 보내다보니 요딴 망측한 문장이 나오네요.

    ㄴ 답글 (1)
  • 옐의 프로필 이미지

    1
    about 2 months 전

    마지막 문장이 이상하다고 전혀 느끼지 못했어요🤣 좋아하는 음식은 있는데 가장 좋아하는 요리가 뭘까 고민했는데, 딱히 떠오르진 않더라구요. 그치만 요리를 하기 위해 재료를 준비하는 시간이 제일 좋아요. 숫돌로 잘 갈아진 칼로 나무 도마 위에서 썰 때요!

    ㄴ 답글
  • 임클의 프로필 이미지

    임클

    1
    29 days 전

    와 심야식당 진짜 멋져요. 요리는 정말 멋진 기술인 것 같아요. 다른 사람과 나눌 수 있다는 점에서요. 저도 누군가를 위해 잘 차려진 요리 한 상 대접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저는 최애 요리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제일 많이 해먹는 건 토달볶이에요. 손이 많이 안 가고 설거지거리가 거의 안 나온다는 점 때문에요. 최근에서야 깨달은 건데 설거지가 무서워서 요리를 못 한다는 건 세상의 아름다움을 많이 놓치고 사는 일 같더라고요. 앞으로는 설거지를 두려워 말아야 겠다고 생각했어요. 좋은 글 감사해요! 생일도 축하드려요! 좋아하는 사람들과 맛있는 저녁 나누시길요!

    ㄴ 답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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