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일에 시간 어때요

달리기를 좋아한다는 것

나도 몰랐던 내가 잘하는 것

2025.10.15 | 조회 6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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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랑한 은둔자. 김토성의 프로필 이미지

명랑한 은둔자. 김토성

혼자 시간을 보내는 것은 낫기 위해서인가, 숨기 위해서인가. 그 중간 어딘가에서.

오랫동안 비가 왔다.

비를 싫어하진 않지만 가을은 하늘이고 햇빛이고 공기고 뭐고 다 이쁘고 청초하니까 화창한 날이 좀 그립긴 했다. 오늘 창문을 열어보니 건물 사이로 파란 하늘이 빼꼼하게 보이는데 너무 반가웠다. 그리고 그 사이로 헌트릭스의 골든도 우렁차게 울려 퍼졌다. 아침부터 무슨 일인가 싶었는데 집 근처 초등학교 운동회 날이었다. 운동회인데 비가 안와서 엄청 좋았겠다. 아니나다를까 아이들의 소리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가을 운동회.

푸른 하늘은 높고 말은 살찌고 나도 살찌고 골목마다 살랑이는 시원한 바람에 몸도 마음도 의자에 앉아 있을 수 없는 아이들을 위한 대형 이벤트. 집에서 싸준 김밥도 먹을 수 있고 친구들에게 내가 뭐 잘한다고 대놓고 뽐내고 칭송받을 수 있는 기간 한정 버프가 있는 날. 

하지만 난 운동회때 칭송받아 본 적이 거의 없다. 달리기는 항상 꼴찌 아니면 꼴찌와 엇비슷했고 손등에 찍히는 등수 도장은 3 이상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그렇다고 다른 운동을 잘하는 것도 아니었기에 뽐낼만한 건 까불대는 거 말고는 없었다. 왠지 모르게 내가 있는 팀은 박터트리기도 줄다리기도 번번이 졌다. 단체 줄넘기는 그나마 좀 했는데 아쉽게도 운동회 종목에는 없었다. 축구도 농구도 잘하는 편은 아니라서 그냥 운동 신경이 없나보다 했다.

 

그렇게 가을 운동회 몇 번 하다 보니 중학생이 되었는데 하필이면 입학한 학교의 오래된 선배 중 한 명이 엄청 유명한 마라토너라서 개교기념일이면 서울대공원에 모여 미니 마라톤을 해야 했다. 게다가 등수 구간별로 체육 시험 성적에 반영되니 안 뛸 수도 없었다. 체육 시간이 제일 싫었는데 마라톤을 뛰려니 마음이 심란하고 손바닥에 땀이 났다.

 

5월의 서울대공원.

심히 불편한 마음을 담아 인상을 쓰고 달리기 시작했다. 갑자기 10초, 20초도 아니고 1분도 넘게 뛰어야한다니. 벌써 숨이 차고 팔다리가 몸에 잘못 붙어있는 것만 같고 오만 데가 다 불편했다. 어떻게든 덜 뛰어보려 지나가는 코끼리 열차에 매달렸다 떨어지고, 툴툴거리며 뛰는 둥 마는 둥 했는데 옆으로 선생님이 지나갔다. 처음엔 몰랐는데(아마 알려줬지만 기억을 못했겠지) 학생들뿐 아니라 선생님들도 같이 뛰었다. 항상 무섭고 진지하던 국사선생님이 헤어밴드를 하고 콧물까지 흘리며 열심히 뛰시는 모습을 보니 나도 좀 진지하게 뛰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을 다잡고 제대로 뛰어보니 생각보다 뛸만했다. 흡흡 하하 하고 리듬에 맞춰서 숨을 들이마시고 내뱉고 힘들랑말랑 한 정도로, 걸을까 아님 계속 뛸까하는 생각이 올라오면 아직 좀 더 뛰어도 되겠다 싶은 수준으로 뛰었다. 아마 5, 10km 정도밖에 안 되는 코스였을 텐데 어찌나 길게 느껴지던지 가도 가도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다. 다행히 이제 진짜 못해먹겠다 싶을 쯤에 결승선이 보였다. 꽤 상위권으로 들어와서 놀라웠다. 그 때 알았다. 내가 빨리는 못 뛰어도 오래 뛰는 건 좀 잘하는구나.

 

그 후로는 누가 운동 좋아하냐고 물으면 좋아하진 않는데 달리는 건 좋아한다고 말하게 되었다. 그리고 달릴때 마다 항상 즐거웠다.

 

오늘 같은 날에 뛰면 정말 즐겁다. 맑은 공기와 채도 높은 주변 풍경들 덕분에 TV 전시관에서 틀어놓은 어딘지 모르겠으나 쨍쨍하고 멋진 풍경 속을 달리는 것 같다. 빛이 사물들에 부딪히고 잘게 부서져서 흩뿌려놓은 조각들 위로 달리는 요즘은 한발 한발이 더 들뜬다.

겨울에 달리는 것도 좋다. 추워서 나가는게 쉽진 않지만 천천히 뛰다 보면 몸이 슬슬 달아오르는 게 더 잘 느껴지는데 이게 겨울 달리기의 맛이다. 한참 뛰고 난 뒤 몸에서 흰 연기가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걸 보는 것도 좋아한다. 추운 공기속을 가르고 흐르는 땀의 궤적을 느끼는 것도 좋다. 한참 뛰고 몸이 달아오르면 겨울의 찬 공기에 덕분에 내 안에 뜨거운 피가 돌아다니고 있다는 게 느껴진다. 그럴때면 그게 '난 지금 살아있어' 와 동의어같다. 쓰다 보니 나 겨울에 뛰는 걸 더 좋아하는 건가. 추워서 잘 나가지도 않으면서 말이다.

 

달리기는 좋아하면서 여태 10km 마라톤밖에 나가본 적이 없다. 그동안 오래 뛰지 않기도 했고 좋아했다는 걸 잊고 있었다. 달리기엔 갑자기 살이 너무 찐 것 같아, 움직이면 힘들어, 날이 더워, 일하고 와서 피곤해, 술마셔야해, 약속이 있어서, 미세먼지 때문에, 추워서 감기 걸릴거 같아서 처럼 변명들이 달리기 위에 덕지덕지 붙다 보니 까먹었나보다.

 

살다 보니 소질이 없다고 생각했던 분야에서 의외로 잘하는 것을 발견하기도 하고 가끔은 그게 즐겁기까지 할 때가 있다. 내게는 달리기가 그렇다.

 

때로는 마라톤 평원을 상상하며 뛰고,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궤적 속에서 이 달리기 코스처럼 어딘가엔 항상 끝이 있다고 위로받으며 달리기도 한다.

달리다보면 처음에는 몸 구석구석이 삐그덕거리다가 어느 시점이 지나 하나 둘 씩 맞아 떨어지면서 잘 윤활된 기어들이 맞물려 돌아가는 것 같은 순간이 좋다. 너무 숨이 차고 힘들어서 그만 멈추고 싶은데 조금 더 참았다가 목표지점에 도착해서 온몸에 힘을 탁 풀어버리는 통쾌한 순간도.

 

하루키의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다시 읽고 싶어지는 요즘이라 혼돈의 책장에서 꺼내어 책상 위에 두었다. 내일 아침에 비가 오지 않으면 달리기를 하고 읽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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