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28일, 영국 스코틀랜드 자치정부가 독립 찬반을 주민들에게 직접 묻는 주민투표를 위한 법안 초안을 마련해 공개하고 영국 정부에 주민투표를 치를 권한을 스코틀랜드 의회로 넘기라고 촉구했다는 기사가 나왔습니다.
영국 안에 스코틀랜드가 있는 거 아닌가? 영국은 잉글랜드? 그럼 스코틀랜드는 뭔가. 자치정부는 무엇이며 독립 이야기는 왜 나오나. 스코틀랜드가 하나의 나라라던데 그럼 영국은 뭔지.
앞으로 총 2편의 글을 통해 영국, 잉글랜드, 스코틀랜드의 복잡한 동거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오늘은 그 첫번째 이야기입니다.
스코틀랜드의 수도 에든버러 전경. 에든버러는 오랜 금융업의 역사를 지닌 도시로, 2020년 세계 13위이자 유럽 4위의 금융 중심지로 평가됐다. 출처: Andrew Colin, CC BY 2.0
2026년 5월 26일, 에든버러의 스코틀랜드 의회에서 오래된 질문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스코틀랜드는 영국을 떠나 독립국가가 되어야 하는가.’
이날 의원들은 찬성 72표, 반대 55표로 영국 중앙정부에 독립 주민투표를 허용해 달라고 공식 요청하는 안을 통과시켰다. 독립을 가장 중요한 정치적 목표로 내세워 온 스코틀랜드 국민당(SNP)은 5회 연속 스코틀랜드 의회 선거 승리를 발판 삼아, 한동안 굳게 닫혀 있던 독립의 문을 다시 두드렸다.
그러나 런던의 대답은 단호했다. 버넘 총리는 새로운 독립 주민투표를 허용할 수 없다며 요청을 거부했다. 대신 스코틀랜드의 지방자치단체에 더 많은 권한을 넘기는 방안을 제시했다. 독립이라는 큰 문은 닫아 둔 채, 자치라는 작은 창문을 조금 더 열어 주겠다는 뜻이었다.
한국 독자에게는 이 모든 이야기가 다소 낯설고 복잡하게 들릴 수 있다. 우리는 흔히 영국을 하나의 나라로 생각하지만, 정식 명칭인 ‘그레이트브리튼 및 북아일랜드 연합왕국’이 보여주듯 영국은 잉글랜드·스코틀랜드·웨일스·북아일랜드가 하나의 왕관과 중앙정부 아래 묶여 있는 연합국가다. 네 지역은 같은 여권과 통화를 사용하면서도 저마다 다른 역사와 문화, 정체성을 간직하고 있다. 교육과 법률, 종교적 전통도 서로 다르고, 축구장에서는 각자의 깃발을 들고 별도의 국가대표팀으로 맞선다.
앞선 칼럼에서는 영국이 왜 월드컵에 하나의 대표팀이 아니라 네 팀을 내보낼 수 있는지를 살펴봤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보다 더 근본적인 질문과 마주하게 된다. 그 네 구성원 가운데 하나인 스코틀랜드가 이제 축구팀뿐 아니라 국가 자체도 따로 꾸리겠다고 나선 것이다.
한 나라 안에서 오랜 세월을 함께 살아온 이들은 왜 다시 갈라서려 하는가. 스코틀랜드는 어쩌다 영국의 일부가 되었으며, 300년 넘게 이어진 결합은 왜 오늘날까지도 완전한 하나 됨으로 굳어지지 못했을까. 이 질문의 답을 찾으려면, 안개가 내려앉은 스코틀랜드의 성과 전쟁터, 왕관과 의회가 서로의 운명을 놓고 맞섰던 수백 년 전의 역사로 돌아가야 한다.
영국(연한 초록색) 내 스코틀랜드의 위치 (짙은 초록색). 출처: Blank map of Europe (with disputed regions).svg: maix (talk)derivative work: Alphathon /'æɫfə.θɒn/ (talk) - This file was derived from: Blank map of Europe (with disputed regions).svg:, CC BY-SA 3.0
1707년, 스코틀랜드가 사라진 날
1707년 1월 16일, 에든버러의 스코틀랜드 의회는 나라의 운명을 가를 표결에 들어갔다.
결과는 찬성 110표, 반대 67표. 의원들은 잉글랜드와의 합병 조약을 승인했다. 그것은 단순히 두 나라가 손을 잡는다는 결정이 아니었다. 중세부터 이어져 온 스코틀랜드 왕국과 그 의회가 독립된 정치적 존재로서 막을 내리는 선택이었다. 의회는 자신의 손으로 자신의 소멸에 표를 던졌다.
마지막 회의가 열린 것은 그해 3월 25일이었다. 의사당 밖 세인트 자일스 대성당의 종탑에서는 노래 한 곡이 울려 퍼졌다고 전해진다. 축복과 환희로 가득해야 할 합병의 날이었지만, 그 곡의 제목은 묘하게도 ‘내 결혼식 날에 나는 왜 이리 슬픈가’였다.
합병은 결혼에 비유됐지만, 에든버러의 공기에는 축제보다 장례식에 가까운 쓸쓸함이 감돌았다.
당시 스코틀랜드의 최고위 법관이자 의회 의장이었던 시필드 백작은 모든 절차가 끝난 뒤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이제 오래된 노래 하나가 끝났구나.”
스코틀랜드가 낳은 국민시인 로버트 번스는 수십 년 뒤 더욱 쓰라린 언어로 그날을 되돌아봤다. 그는 스코틀랜드가 “잉글랜드의 금에 사고팔렸다”고 노래했다. 조국을 넘긴 이들을 향해서는 “한 무리의 악당들”이라는 말도 서슴지 않았다.
그렇다면 스코틀랜드는 왜 스스로 독립을 내려놓았을까.
두 나라의 관계는 합병 이전부터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1603년, 잉글랜드의 엘리자베스 1세가 후계자 없이 세상을 떠나자 스코틀랜드 국왕 제임스 6세가 잉글랜드 왕위까지 물려받았다. 스코틀랜드에서는 제임스 6세, 잉글랜드에서는 제임스 1세였다. 이때부터 두 나라는 같은 군주를 섬겼지만, 의회와 법률, 재정과 국경은 여전히 따로였다. 한 사람이 두 개의 왕관을 썼을 뿐, 두 나라는 아직 하나가 아니었다.
한 세기가 흐른 뒤, 불안한 동거를 끝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졌다. 잉글랜드는 북쪽의 스코틀랜드가 프랑스와 손잡거나, 가톨릭계 왕을 받아들여 안보를 위협할 가능성을 걱정했다. 스코틀랜드는 잉글랜드가 지배하던 광대한 해외 식민지와 무역시장에 접근하기를 원했다. 왕위 계승과 종교, 안보와 무역이 한데 얽힌 협상이 시작됐다.
그러나 스코틀랜드를 협상장으로 내몬 가장 절박한 힘은 가난이었다.
1690년대 말, 스코틀랜드는 가난한 북유럽의 변방에서 벗어나 무역 강국으로 도약하겠다는 꿈을 품었다. 오늘날 파나마에 해당하는 다리엔 지역에 식민지를 세우고, 대서양과 태평양을 연결하는 교역의 거점을 만들려 했다. 정부의 후원을 받은 ‘스코틀랜드 아프리카·인도 무역회사’에는 귀족과 상인뿐 아니라 평범한 시민들까지 앞다퉈 재산을 투자했다. 작은 나라가 모은 자본의 상당 부분이 이 하나의 꿈에 걸렸다.
그러나 다리엔의 자연은 스코틀랜드인들에게 너무나 가혹했다. 열대성 질병과 식량 부족이 정착민들을 덮쳤고, 스페인의 적대와 잉글랜드의 비협조까지 겹쳤다. 배를 타고 떠난 이들 가운데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식민지는 버려졌고, 투자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다리엔 계획’이라 불린 이 모험의 실패는 스코틀랜드 경제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한 나라의 미래를 바꾸겠다는 꿈이 오히려 나라를 파산에 가까운 궁지로 몰아넣은 것이다.
잉글랜드와의 합병은 그 막다른 길에서 제시된 탈출구였다. 합병이 이뤄지면 스코틀랜드 상인들도 잉글랜드의 식민지와 무역망에 들어갈 수 있었다. 잉글랜드는 스코틀랜드에 약 39만8,000파운드에 이르는 ‘등가금(Equivalent)’을 지급하기로 했다. 이 돈에는 새 국가의 부채를 함께 부담하게 된 스코틀랜드를 보전한다는 명분이 붙었지만, 상당액은 다리엔 계획으로 손실을 본 투자자들을 구제하는 데 쓰였다. 그 투자자들 가운데에는 합병안을 심의하고 표결한 유력 인사들도 적지 않았다.
그래서 합병은 처음부터 의심을 받았다. 국익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는가. 아니면 경제난에 몰린 지배층이 잉글랜드의 돈을 받고 나라를 넘긴 거래였는가. 번스가 노래한 “사고팔린 민족”이라는 기억은 바로 이 의혹에서 태어났다.
마침내 1707년 5월 1일, 합병법이 발효됐다. 스코틀랜드 왕국과 잉글랜드 왕국은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이라는 하나의 국가가 됐고, 두 의회는 런던 웨스트민스터에 자리 잡은 새로운 영국 의회로 통합됐다.
그러나 스코틀랜드의 모든 것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스코틀랜드는 독자적인 의회와 왕국의 지위를 잃었지만, 고유한 법률 체계와 장로교회, 교육제도는 지켜냈다. 사람들은 여전히 자신을 스코틀랜드인이라 불렀고, 잉글랜드와 다른 역사와 언어, 노래를 기억했다.
지도 위에서 국경은 희미해졌지만, 마음속의 경계까지 지워진 것은 아니었다.
스코틀랜드 왕국은 사라졌다. 그러나 스코틀랜드라는 나라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끝내 사라지지 않았다.
1707년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연합조약 스코틀랜드 측 공식 인증본. 이 조약은 두 왕국을 하나로 통합해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을 탄생시키는 토대가 됐다. 출처: Scottish Parliament - http://collections.europarchive.org/ukparliament/20090701100701/http://www.parliament.uk/actofunion/actofunion_interactive.html, Public Domain
스코틀랜드는 어떻게 영국 안의 ‘나라’인가
한국에서는 흔히 ‘영국’과 ‘잉글랜드’를 같은 뜻으로 사용한다. 그러나 잉글랜드는 영국 전체가 아니다. 영국의 정식 명칭은 ‘그레이트브리튼 및 북아일랜드 연합왕국’이며, 잉글랜드·스코틀랜드·웨일스·북아일랜드라는 네 개의 ‘나라’로 이루어져 있다.
여기서 말하는 ‘나라’는 대한민국이나 일본처럼 독립된 주권국가를 뜻하지 않는다. 국제사회에서 영국을 대표하는 주권국가는 하나뿐이다. 외교 관계를 맺고, 군대를 운용하며, 여권을 발급하고, 유엔 회원국으로 활동하는 주체도 영국이다. 스코틀랜드는 독자적인 외교권이나 군대, 화폐를 가진 독립국가가 아니다.
그럼에도 영국에서는 스코틀랜드를 단순한 지방이나 행정구역이 아니라 ‘나라(country)’라고 부른다. 잉글랜드에 편입돼 사라진 지역이 아니라, 본래 독립된 왕국이었던 스코틀랜드가 잉글랜드와 합쳐져 더 큰 국가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영국은 하나의 나라가 주변 지역을 흡수해 만든 단일국가라기보다, 서로 다른 역사와 정체성을 지닌 나라들이 결합해 형성된 연합왕국이다.
쉽게 말하면 영국이라는 큰 국가 안에 스코틀랜드라는 역사적 나라가 존재하는 구조다. ‘영국인’은 법적 국적에 가깝고, ‘스코틀랜드인’은 역사와 문화, 공동체에 뿌리를 둔 정체성에 가깝다. 두 정체성은 서로를 반드시 밀어내지 않는다. 한 사람이 영국 시민이면서 동시에 스코틀랜드인일 수 있다.
스코틀랜드의 면적은 약 7만8,000제곱킬로미터로 대한민국의 약 80퍼센트에 이르지만, 인구는 약 550만 명으로 한국의 10분의 1 남짓이다. 그레이트브리튼섬의 북쪽 약 3분의 1을 차지하며, 남쪽으로 잉글랜드와 국경을 맞댄다. 두 지역 사이에는 출입국 심사도, 국경 검문소도 없다. 기차나 자동차를 타고 오가다 보면 길가의 표지판 하나가 국경을 알릴 뿐이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국경이 사라졌다고 해서 모든 차이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스코틀랜드에는 에든버러에 자리한 자체 의회와 정부가 있다. 교육과 보건, 주택, 사법, 지방행정처럼 주민들의 일상에 가까운 분야는 대체로 스코틀랜드가 스스로 결정한다. 반면 외교와 국방, 이민, 통화처럼 영국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사안은 런던의 영국 의회와 중앙정부가 담당한다.
이를테면 스코틀랜드 학교의 교육과정이나 의료정책은 에든버러에서 정할 수 있지만, 스코틀랜드만의 여권을 만들거나 독자적으로 다른 나라와 조약을 체결할 수는 없다. 상당한 자치권을 가졌지만, 주권까지 가진 것은 아닌 셈이다.
이 구조는 한국의 지방자치와도 다르다. 한국의 시도는 중앙정부가 법률로 설치한 행정구역이지만, 스코틀랜드는 영국이 탄생하기 전부터 존재했던 왕국이자 정치공동체였다. 현재의 스코틀랜드 의회 역시 단순한 지방의회보다 훨씬 넓은 입법권을 가진다. 다만 법적으로 최종 주권은 여전히 런던의 영국 의회에 있다.
흥미롭게도 영국에서 가장 큰 구성국인 잉글랜드에는 잉글랜드만을 위한 별도의 의회가 없다. 영국 의회가 잉글랜드의 국내 문제까지 함께 다룬다. 반면 스코틀랜드와 웨일스, 북아일랜드에는 각각의 의회 또는 자치 입법기관과 정부가 있다. 영국의 국가 구조는 좌우가 꼭 맞는 퍼즐이라기보다, 서로 다른 역사적 타협을 이어 붙여 만든 오래된 조각보에 가깝다.
이 때문에 같은 영국 안에서도 제도가 달라진다. 스코틀랜드는 잉글랜드·웨일스와 구별되는 법률 체계와 교육제도, 종교적 전통을 유지한다. 대학 학부 과정은 전통적으로 4년인 경우가 많고, 형사재판의 구성과 절차도 잉글랜드와 다르다. 같은 여권과 파운드화를 사용하면서도 학교와 법원, 병원에서는 서로 다른 규칙이 적용될 수 있다.
문화의 결도 뚜렷하다. 영어 억양은 물론이고 문학과 음악, 전통복식과 역사적 기억이 다르다. 스코틀랜드에는 영어 외에도 스코츠어와 스코틀랜드 게일어가 살아 있다. 국제 축구대회에서는 영국 단일팀이 아니라 스코틀랜드 대표팀이 별도의 국기와 국가를 앞세워 경기에 나선다.
무엇보다 다른 것은 마음속에 그려진 지도다.
2022년 인구조사에서 스코틀랜드 주민의 65.5퍼센트는 자신의 유일한 국가 정체성을 ‘스코틀랜드인’이라고 답했다. 영국인과 스코틀랜드인이라는 정체성을 함께 선택한 사람도 있었고, 영국인으로만 자신을 규정한 사람도 있었다. 같은 땅에 사는 이들조차 자신이 속한 나라를 서로 다르게 그리는 것이다.
따라서 스코틀랜드 독립을 둘러싼 논쟁은 단순히 한 지방이 중앙정부에서 떨어져 나가려는 움직임이 아니다. 역사적 나라로 남아 있되 주권은 갖지 못한 스코틀랜드가, 지금의 자치에 머물 것인지 완전한 국가로 돌아갈 것인지를 묻는 문제다.
영국은 하나의 국가다. 그러나 그 하나 안에는 자신을 여전히 나라라고 기억하는 여러 나라가 함께 살고 있다. 스코틀랜드의 독립 문제는 바로 이 독특하고도 모순적인 문장에서 시작된다.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경계에 세워진 표지판. 스코틀랜드를 찾은 여행객들을 영어와 스코틀랜드 게일어로 맞이하고 있다. 출처: Welcome to Scotland sign on the A1 by kim traynor, CC BY-SA 2.0
“이것은 스코틀랜드의 석유다”
현대의 스코틀랜드 독립운동에 불을 붙인 것은 오래된 전쟁의 기억만이 아니었다. 차가운 북해 아래에서 솟아오른 검은 기름이 독립을 다시 현실의 언어로 바꾸어 놓았다.
1960년대 후반부터 북해에서 대규모 유전이 잇달아 발견됐고, 1970년에는 스코틀랜드 동쪽 해역에서 거대한 포티스 유전이 확인됐다. 영국이 산유국으로 변모할 가능성이 보이자 스코틀랜드 국민당(SNP)은 1970년대 초 강렬한 구호를 내걸었다.
“이것은 스코틀랜드의 석유다.”
주장은 단순하고도 강력했다. 스코틀랜드 앞바다에서 석유와 가스가 나오는데, 그 수입과 세금은 런던의 영국 국고로 들어간다. 스코틀랜드가 독립한다면 그 부를 스코틀랜드의 산업과 복지, 미래 세대를 위해 사용할 수 있다는 논리였다.
독립 반대론자들은 애초에 ‘스코틀랜드 해역’이라는 표현부터 신중히 써야 한다고 맞섰다. 북해의 자원은 국제법상 스코틀랜드가 아니라 영국이라는 주권국가의 대륙붕에서 개발됐으며, 정확히 어느 유전과 수입이 독립 스코틀랜드에 귀속될지는 양국의 협상과 해양 경계 설정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석유는 독립운동에 중요한 상징을 안겼다. 이전까지 독립 반대론자들이 던진 가장 무거운 질문은 “스코틀랜드가 혼자서 먹고살 수 있겠는가”였다. 북해 유전은 독립론자들에게 그 질문을 되받아칠 근거를 주었다. 가난하기 때문에 영국에 남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영국에 남아 있기 때문에 자신의 부를 제대로 누리지 못한다는 주장이 가능해졌다.
독립론자들이 자주 꺼내는 비교 대상은 북해 건너 노르웨이다. 노르웨이는 석유와 가스에서 얻은 막대한 국가 수입을 장기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1990년 국부펀드의 법적 기반을 마련했고, 1996년부터 자금을 적립했다. 그렇게 쌓인 돈은 훗날 세계 최대 규모의 국부펀드로 성장했다. 독립론자들은 스코틀랜드도 일찍 주권을 가졌다면 비슷한 미래를 만들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석유가 언제까지나 독립의 보증수표가 될 수는 없다. 국제유가는 끊임없이 출렁이고, 북해 유전의 생산량은 과거의 정점을 지났다. 세계가 기후위기에 대응해 화석연료에서 벗어나려는 시대에 석유를 새로운 국가의 경제적 토대로 삼는 것이 과연 지속 가능한지도 의문이다. 한때 스코틀랜드의 미래를 밝혀 줄 불꽃처럼 보였던 석유는 이제 독립 경제의 불확실성을 보여주는 그림자이기도 하다.
북해의 스코틀랜드 해역에서 이뤄지는 석유 시추. 북해 석유는 1970년대부터 스코틀랜드 독립운동의 경제적 근거이자 중요한 정치적 상징이 됐다. 출처: Stephen (danrandom) from UK - Flickr, CC BY 2.0
석유가 경제적 자신감을 키웠다면, 1979년의 주민투표는 정치적 상처를 남겼다.
그해 3월, 스코틀랜드 주민들은 자체 의회를 설치하고 일부 국내 정책을 스스로 결정할 것인지를 묻는 투표에 참여했다. 이것은 영국에서 탈퇴할지를 묻는 독립 주민투표가 아니라, 영국 안에 남은 채 권한을 런던에서 스코틀랜드로 넘겨받을지를 묻는 분권 투표였다.
투표에 참여한 사람 가운데 51.6퍼센트가 찬성했다. 반대는 48.4퍼센트였다. 단순히 찬반만 놓고 보면 분권안이 승리한 셈이었다.
그러나 투표 전에 영국 의회가 법안에 삽입한 특별 조항이 길을 막았다. 찬성표가 투표자의 과반을 차지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전체 등록 유권자의 40퍼센트 이상에 이르러야 한다는 조건이었다. 투표율이 약 64퍼센트에 그치면서 찬성표는 전체 유권자의 약 33퍼센트에 머물렀다. 결국 분권안은 시행되지 못했고, 관련 법률도 폐기됐다.
표결 자체가 무효가 된 것은 아니었다. 다수의 찬성을 얻었지만 법률에 설정된 문턱을 넘지 못한 것이었다. 그러나 많은 분권 지지자에게 그런 법적 구분은 공허하게 들렸다. 찬성이 반대보다 많았는데도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기 때문이다.
스코틀랜드 정치의 기억 속에서 1979년은 ‘이기고도 진 투표’로 남았다. 이 경험은 웨스트민스터가 스코틀랜드의 뜻을 공정하게 받아들일 것인지에 대한 불신을 키웠고, 이후 분권과 독립을 요구하는 움직임에 오랫동안 연료를 공급했다.
18년 뒤, 다시 기회가 찾아왔다.
1997년 토니 블레어가 이끄는 노동당이 집권하자 새 정부는 스코틀랜드 분권을 주요 개혁 과제로 추진했다. 그해 9월 열린 주민투표에서는 두 가지 질문이 제시됐다. 스코틀랜드 의회를 설치할 것인가. 그리고 그 의회에 일정한 조세 조정 권한을 줄 것인가.
첫 번째 질문에는 74.3퍼센트, 두 번째 질문에는 63.5퍼센트가 찬성했다. 1979년의 근소한 과반과는 비교하기 어려울 만큼 분명한 선택이었다.
그 결과 1999년, 1707년 문을 닫았던 스코틀랜드 의회가 292년 만에 에든버러에서 다시 열렸다. 새 의회와 스코틀랜드 정부는 교육과 보건, 사법, 주택과 지방행정 등 일상생활에 밀접한 분야를 결정하게 됐다. 이후 세제와 복지에 관한 권한도 점차 확대됐다. 그러나 외교와 국방, 이민, 통화, 헌법과 같은 핵심 권한은 여전히 런던의 영국 의회와 중앙정부에 남았다.
일부에서는 분권이 독립 요구를 잠재울 것이라고 기대했다. 스코틀랜드가 자신의 일을 더 많이 결정할 수 있게 되면 굳이 영국을 떠날 이유도 줄어들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새 의회는 독립운동을 잠재우기보다, 스코틀랜드가 스스로 통치할 수 있다는 감각을 키웠다. 에든버러에는 다시 정치의 중심이 생겼고, 스코틀랜드만의 정책과 선택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자치는 독립의 대안이었지만, 동시에 독립을 상상할 수 있게 만드는 연습장이기도 했다.
(남은 이야기는 다음 주 2편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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