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영박물관엔 없는 이야기들

향신료, 피, 그리고 바다...동인도회사와 대항해 시대의 영국

함께 읽는 영국 추리 소설,『여덟 번째 불빛이 붉게 타오르면』첫번째 이야기

2026.08.30 | 조회 5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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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태준

1634년 10월, 바타비아 항구에서 사르담 호가 출항을 준비하고 있었다.

오늘날의 자카르타, 당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VOC, Vereenigde Oost-Indische Compagnie)의 아시아 본부였던 이 도시에서, 상선 한 척이 암스테르담을 향해 닻을 올린다. 배에는 향신료와 귀중한 화물이 실려 있다. 그리고 갑판에는 승객들이 탑승해 있다.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탐정이라 불리는 새뮤얼 핍스도 그 중 하나지만, 그는 자유로운 몸이 아니다. 알 수 없는 죄목으로 체포된 채, 처형을 위해 이송되는 중이다.

출항 직전, 부두에 나병 환자가 갑작이 나타나 외친다. 이 배는 저주받았다고. 목적지에 닿지 못할 것이라고. 그리고 그는 불길에 휩싸여 사라지고 만다.

스튜어트 터튼의 소설 『여덟 번째 불빛이 붉게 타오르면(The Devil and the Dark Water)』은 이렇게 시작된다. 17세기 바타비아에서 암스테르담으로 향하는 항해, 그 망망대해 위에서 벌어지는 불가능한 사건들. 하지만 이 소설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 배가 떠나는 세계, 즉 동인도회사가 지배하던 17세기의 세계로 들어가야 한다. 그 세계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그리고 그 화물칸 안에 향신료만이 아니라 무엇이 더 실려 있었는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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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르넬리스 브룸이 그린 「1599년 야코프 판 네크의 제2차 아시아 원정대 귀환」. 네덜란드 상인 야코프 판 네크가 이끈 선단은 인도네시아에서 향신료를 싣고 귀환해 큰 수익을 올렸으며, 이는 이후 네덜란드의 아시아 무역 확대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설립의 기반이 되었다. 출처: Hendrick Cornelisz Vroom - http://www.rijksmuseum.nl/collectie/SK-A-2858, 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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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추 한 줌이 살인의 동기가 되던 시대가 있었다.

오늘날 우리는 향신료를 슈퍼마켓에서 몇 천 원에 산다. 후추, 계피, 정향, 육두구 등등. 요리에 향을 더하는 평범한 재료들이다. 하지만 15세기와 16세기 유럽에서 이것들은 금과 맞먹는 가치를 가졌다. 냉장 기술이 없던 시대에 향신료는 음식의 부패를 늦추고 냄새를 잡는데 쓰이는 필수품이었다. 약으로도 쓰였고, 종교 의례에도 사용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향신료는 부의 상징이었다. 탁자 위에 후추통을 올려놓는 것이 지금의 명품 가방과 같은 의미였다.

문제는 이 귀한 향신료들이 유럽에서 재배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정향과 육두구는 오늘날 인도네시아의 말루쿠 제도(Maluku Islands), 당시 유럽인들이 '향신료 제도(Spice Islands)'라고 부르던 작은 섬들에서만 자랐다. 그 섬들과 유럽 사이의 거리는 지구 반 바퀴였다. 그 사이에서 이슬람 상인들과 베네치아 상인들이 중개 무역을 통해 막대한 이익을 챙겼다. 유럽 왕실들과 상인들은 이 중간 고리를 끊고 직접 향신료를 구하기를 원했다. 그 욕망이 대항해 시대를 열었다.

가장 먼저 나선 것은 포르투갈이었다. 1498년 바스코 다 가마(Vasco da Gama)가 아프리카를 돌아 인도에 도달하는 항로를 개척하면서, 포르투갈은 아시아 무역의 지배자가 되었다. 하지만 그 지배는 오래가지 않았다. 17세기가 시작되면서 두 개의 새로운 세력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바로 네덜란드와 영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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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항해시대인 1630년 네덜란드 지도 제작자 빌럼 블라우가 만든 말루쿠 제도의 초기 지도. 말루쿠 제도는 오늘날 인도네시아 동부에 속하며, 술라웨시섬과 뉴기니섬 사이에 자리한다. 지도의 오른쪽이 북쪽이며, 가장 오른쪽에 테르나테가, 그다음으로 티도레가 표시되어 있다. 정향과 육두구 등 귀중한 향신료의 주요 산지였던 이 지역은 유럽에서 ‘향신료 제도’로 불렸다. 당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VOC)는 향신료 무역을 장악하기 위해 이곳에 교역 거점과 요새를 세웠으며, 산지와 항로에 관한 정보도 중요한 영업 기밀로 관리했다. 출처: Willem Janszoon Blaeu (1571-1638) - http://www.donaldheald.com/s12772.html, 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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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2년, 네덜란드 공화국의 의회는 경쟁하던 여러 무역 회사들을 하나로 합쳐 네덜란드 동인도회사(VOC)를 설립했다. 회사는 아시아 무역에 대한 독점적 권리와 함께 21년간의 특허를 받았고, 특히 육두구, 정향, 메이스 같은 귀중한 향신료를 구매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았다.

그런데 이 회사는 단순한 무역 회사가 아니었다. VOC는 군대를 보유할 수 있었고, 요새를 건설할 수 있었으며, 아시아 국가들과 조약을 맺을 수 있었다. 사실상 국가의 권한을 위임받은 기업이었다. 전성기의 VOC는 약 5만 명의 직원을 보유했고, 1602년부터 1799년 해산까지 네덜란드에서 동인도로 거의 5000번의 항해를 했으며, 100만 명 이상의 사람들을 아시아로 실어 날랐다.

이 모든 것의 물질적 결과가 바타비아였다. VOC는 1619년 자카르타를 공격해 점령하고 바타비아라는 이름으로 아시아 본부를 세웠다. 오늘날의 자카르타다. 소설 속 사르담 호가 출항하는 바로 그 도시. 그곳은 단순한 무역 항구가 아니라, 네덜란드가 아시아에 이식한 유럽의 복제본이었다. 운하가 있었고, 요새가 있었으며, 창고와 법원과 심지어 교도소까지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한 것은 향신료였다. VOC는 아시아에서 구입한 향신료를 유럽에서 14배에서 17배 높은 가격으로 팔 수 있었다. 그 이윤이 바타비아를 세웠고, 함대를 키웠으며, 네덜란드의 황금 시대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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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1년 네덜란드 식민도시 바타비아의 모습. 오늘날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북부에 건설된 바타비아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아시아 무역과 식민 통치를 위한 핵심 거점이었다. 출처: Jan Janssonius / Clement de Jonghe - TU Delft, 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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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은 이 무대에서 어떤 위치에 있었는가.

영국 동인도회사(EIC, East India Company)는 VOC보다 2년 앞선 1600년에 설립되었다. 하지만 초기의 EIC는 VOC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VOC는 선박과 병력에서 영국 경쟁자를 압도했고, 두 회사는 아시아 전역의 무역 거점을 놓고 끊임없이 경쟁하며 서로를 견제했다. 

두 회사의 경쟁이 가장 폭발적으로 표출된 사건이 1623년 암보이나 학살(Amboyna massacre)이었다. 오늘날 인도네시아 말루쿠의 암본 섬에서 VOC가 영국 동인도회사 소속 무역상 10명을 고문하고 처형한 사건이었다. 음모를 꾸몄다는 혐의였지만, 영국은 이를 용납할 수 없는 만행으로 규탄했다. 이 사건은 영국과 네덜란드 사이의 오랜 앙금을 만들었고, 이후 세 차례의 영란 전쟁(Anglo-Dutch Wars, 1652–1784)으로 이어지는 갈등의 씨앗이 되었다.

소설의 배경이 1634년이라는 것은 이 맥락에서 의미심장하다. 암보이나 학살로부터 11년이 지난 시점. 영국과 네덜란드가 표면적으로는 협력하면서도 내면적으로는 깊은 불신을 품고 있던 시기. 사르담 호 안에 탄 사람들이 서로를 의심하는 것은, 단순히 소설적 장치가 아니라 그 시대의 공기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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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3년 8월 10일 벌어진 스헤베닝언 해전. 제1차 영국·네덜란드 전쟁의 마지막 대규모 해전으로, 잉글랜드와 네덜란드 공화국 함대가 오늘날 네덜란드 헤이그 인근의 스헤베닝언 앞바다에서 맞붙었다. 네덜란드 함대는 해상 봉쇄를 돌파하는 데 성공했지만, 지휘관 마르턴 트롬프가 전투 중 전사하는 등 큰 피해를 입었다. 출처: Jan Abrahamsz Beerstraaten - www.rijksmuseum.nl : Home : Info, 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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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는 17세기 유럽인들에게 완전히 다른 세계였다.

육지에서는 법이 있었다. 왕의 권위가 있었고, 교회의 도덕이 있었으며, 이웃의 시선이 있었다. 하지만 대양 위에서는 이 모든 것이 흐려졌다. 배는 그 자체로 하나의 독립된 세계였다. 선장이 절대 권력을 가졌고, 선원들은 수개월간 좁은 공간에 갇혀 있었으며, 무슨 일이 벌어져도 바깥에 알릴 방법이 없었다.

이 고립이 소설의 핵심 조건이다. 사르담 호 안에서 살인이 일어난다. 범인이 배 안에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 하지만 도망갈 곳도, 도움을 청할 곳도 없다. 밀실과 망망대해가 결합된 가장 완전한 형태의 고립.

작가 스튜어트 터튼은 인터뷰에서 다음과 밝혔다. 어린 시절부터 애거사 크리스티를 읽으며 자란 그는 크리스티식 미스터리를 직접 쓰겠다고 오래전부터 마음먹었지만, 단순히 그 전통을 모방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했고, 자신만의 독창적인 장치를 마련하기로 했다고. 그리고 그 장치가 결국 17세기 대양이었다고 말이다.

그 고립 속에 온갖 인간군상이 모인다. VOC의 권력자들, 그 아래에서 일하는 선원들, 배 위에 탄 귀족 여성들, 그리고 체포된 탐정과 그의 경호원. 17세기 유럽 사회의 계급과 권력과 편견이 그 좁은 갑판 위에 압축되어 있다.

작가는 리버풀 대학교에서 영문학과 철학을 공부했고, 상하이에서 영어를 가르친 뒤 런던과 두바이 등지에서 여행 저널리스트로 일했다. 세계를 돌아다닌 그가 17세기의 항해를 선택한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여행 저널리스트로서 그는 이동한다는 것이, 낯선 세계로 들어간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몸으로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이동이 가장 극단적인 형태로 구현된 것이 대항해 시대의 항해였다.

사르담 호가 바타비아를 떠나 암스테르담으로 향하는 항해는 단순히 A에서 B로 가는 이동이 아니다. 그것은 두 세계 사이를 건너는 것이었다. 아시아와 유럽, 식민지와 본국, 향신료와 금화,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한 인간의 탐욕과 용기와 잔인함 사이를.

그 배 위에서 악마가 나타난다. 하지만 이 소설을 읽는 동안 독자는 계속 묻게 될 것이다. 악마는 바다에서 왔는가, 아니면 처음부터 인간들 사이에 있었는가.


함께 생각해볼 질문들

  • 사르담 호처럼 완전히 고립된 공간에 다양한 사람들이 모일 때, 인간 사회의 어떤 면이 드러나는가. 법도, 도망갈 곳도 없는 상황에서 사람들은 어떻게 행동하는가. 당신은 그런 상황에서 어떤 사람이 될 것 같은가.
  • 소설은 1634년을 배경으로 하지만, 그 시대의 탐욕과 폭력과 불의는 오늘날과 완전히 단절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역사의 어두운 면을 어떻게 기억해야 하는가. 그 역사를 배경으로 한 소설을 읽고 즐기는 것도 역사를 이해하는 하나의 방식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가.

읽으면서 들으면 좋은 음악

  • Nick Cave & The Bad Seeds –  'The Ship Song' (1990) 닉 케이브의 이 곡은 바다와 항해와 떠나보냄에 관한 음악이다. 17세기 바타비아에서 암스테르담으로 향하는 배 위에서,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닻을 올리는 사람들을 생각하며 듣기를 권한다. 바다는 언제나 돌아옴을 보장하지 않았다.  

다음 화 예고

사르담 호는 움직이고 있다. 육지는 보이지 않는다. 도망갈 곳이 없다. 배 위의 모든 사람이 용의자이며, 동시에 모든 사람이 피해자가 될 수 있다. 살인이 일어났다. 하지만 어떻게 일어났는지가 불가능하다. 목격자도 없고, 흔적도 없으며, 논리적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밀실 살인(locked-room mystery). 추리 소설의 가장 오래된 장치 중 하나다. 안에서 잠긴 방, 창문도 잠겼고, 피해자는 혼자였다. 하지만 죽어 있다. 어떻게? 이 불가능한 질문이 독자를 페이지에 붙들어 놓는다.

그런데 배 위의 밀실은 육지의 밀실보다 훨씬 더 완전하다. 방 하나가 잠긴 것이 아니라 세계 전체가 잠긴 것이다. 파도에 둘러싸인 배라는 공간은 그 자체로 하나의 거대한 밀실이다. 안에 있는 사람은 나갈 수 없고, 밖에 있는 사람은 들어올 수 없다.

2화에서는 밀실 살인이라는 장치의 역사를 따라간다. 1841년 에드거 앨런 포(Edgar Allan Poe)가 밀실 살인의 원형을 만든 이래, 이 장치가 어떻게 발전해왔는지를. 특히 영국 추리소설의 황금기에 이스라엘 쟁위스(Israel Zangwill), 존 딕슨 카(John Dickson Carr) 같은 작가들이 밀실이라는 개념을 어디까지 밀어붙였는지를 살펴본다. 그리고 왜 독자들은 불가능한 것이 가능해지는 순간에 이토록 강렬하게 반응하는지를 생각해본다.

논리가 무너지는 순간, 인간은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한다. 더 깊이 생각하거나, 아니면 악마를 믿거나.

사르담 호의 선원들은 올드 톰을 믿기로 했다. 하지만 아렌트는 아직 생각하는 쪽을 선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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