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영박물관엔 없는 이야기들

자기 자신을 체포하라는 명령을 받은 영국 스파이의 이야기

히말라야의 파란 양귀비와 혁명기 타슈켄트를 넘나든 한 영국 첩보원의 삶

2026.09.19 | 조회 1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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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태준

1919년 늦가을, 중앙아시아 타슈켄트의 한 사무실에 낯선 남자가 들어섰다. 그는 자신을 세르비아 출신이라고 소개했다. 오스트리아군에서 복무하다 병을 얻어 제대한 뒤, 일자리를 찾아 러시아 땅을 떠돌고 있다고 했다. 유창한 영어를 의심받을 경우에 대비한 설명도 마련해 두었다. 어린 시절 미국에서 살았다는 것이었다.

남자의 말을 듣고 있던 이들은 볼셰비키 정권의 정보요원들이었다. 러시아혁명 직후 창설된 비밀경찰 체카는 혁명의 적으로 지목된 사람들을 추적하고 체포하며, 때로는 재판도 없이 처형하던 조직이었다. 훗날 소련의 국가보안기관 KGB로 이어지는 계보의 출발점이기도 했다. 그런 체카의 사무실을 제 발로 찾아가 일자리를 청한다는 것은 목숨을 건 도박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남자의 이야기는 의심을 사지 않았다. 그는 볼셰비키 측 정보조직에 채용됐고, 영국의 첩보활동을 조사하라는 임무를 받은 채 타슈켄트에서 남서쪽으로 550㎞가량 떨어진 부하라로 향했다.

부하라에 도착한 그에게 얼마 뒤 본부의 전문 한 통이 전해졌다. 거기엔 추적해야 할 영국 첩자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프레더릭 마시먼 베일리.

바로 자기 자신이었다.

이 믿기 어려운 이야기는 베일리가 1946년에 펴낸 회고록 《타슈켄트 임무》에 실려 있다. 그의 증언을 제외하면 당시의 대화와 상황을 낱낱이 확인할 수 있는 자료는 충분하지 않다. 회고록 자체도 영국의 공직기밀법을 피하기 위해 일부 인물과 사건을 감추거나 흐릿하게 처리했다. 따라서 이 장면을 한 치의 과장도 없는 기록으로 단정하기보다는, 한 노년의 첩보원이 뒤늦게 들려준 자신의 이야기로 받아들이는 편이 옳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야기의 큰 줄기는 여러 기록에서 되풀이된다. 베일리는 가짜 신분으로 볼셰비키 측 정보조직에 들어갔고, 그들의 요원이 되어 부하라로 파견됐으며, 그곳에서 자신을 추적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후 그는 목표물이 아프가니스탄으로 달아났다는 거짓 정보를 흘린 뒤, 정반대 방향인 페르시아, 오늘날의 이란으로 탈출할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영국인 베일리는 어쩌다 타슈켄트까지 흘러들어 갔을까. 영국은 왜 지금의 우즈베키스탄 한복판에 정보요원을 보냈으며, 볼셰비키는 어째서 그토록 집요하게 그를 쫓았을까. 이 기묘한 이야기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먼저 19세기 아시아의 지도를 펼쳐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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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더릭 마시먼 베일리. 출처: Unknown author - http://www.uzlit.net/pdf/mission-tashkent.pdf, Public Domain

 

***

 

당시 영국은 인도 아대륙을 지배하고 있었다. 오늘날의 인도와 파키스탄, 방글라데시를 아우르던 영국령 인도는 대영제국에서 가장 크고 중요한 식민지였다. 영국인들이 인도를 제국의 ‘왕관에 박힌 보석’이라고 불렀을 만큼, 그곳의 인구와 자원, 시장은 제국의 번영을 떠받치는 기둥이었다. 영국의 입장에서 인도를 잃는다는 것은 단순히 하나의 식민지를 잃는 데 그치지 않고 제국 전체의 토대가 흔들리는 일이었다.

문제는 그 북쪽에서 러시아제국이 끊임없이 남쪽으로 내려오고 있었다는 점이다. 러시아는 19세기 내내 중앙아시아로 세력을 넓히며 오늘날의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일대를 차례로 장악했다. 영국은 러시아군이 언젠가 아프가니스탄을 넘어 인도까지 내려올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러시아 역시 영국이 인도를 발판 삼아 중앙아시아로 올라와 자국의 남쪽 국경을 위협한다고 의심했다.

두 제국은 정면으로 맞붙기보다 국경 너머에 군인과 외교관, 탐험가와 첩보원을 보냈다. 이들은 현지 군주의 의중을 살피고, 산길과 강줄기를 측량하며, 상대국의 군사적 움직임을 기록했다. 아프가니스탄과 페르시아, 티베트와 중앙아시아를 무대로 이어진 이 오랜 경쟁을 훗날 사람들은 ‘그레이트 게임’이라고 불렀다.

이름만 들으면 두 제국이 벌인 장대한 전략게임처럼 느껴지지만, 그 무대에서 살아가던 사람들에게는 결코 낭만적인 게임이 아니었다. 영국과 러시아가 지도를 펴놓고 국경과 세력권을 저울질하는 동안, 그 사이에 놓인 나라와 민족들은 침략과 압박, 전쟁과 분열을 겪어야 했다. 강대국의 탐험은 종종 침략의 예고편이었고, 그들이 그린 지도는 때로 군대가 따라갈 길이 됐다.

프레더릭 마시먼 베일리는 바로 이 그레이트 게임의 황혼기에 등장한 인물이었다. 그는 1882년 당시 영국령 인도의 라호르, 오늘날 파키스탄에 속하는 도시에서 영국 왕립공병대 장교의 아들로 태어났다. 영국에서 교육받은 뒤 샌드허스트 왕립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인도군 장교가 된 그는 티베트어를 비롯한 여러 언어를 익혔다. 군인이었지만 탐험가였고, 첩보원이면서 자연학자이기도 했다.

1903년에는 영허즈번드 원정대의 일원으로 티베트에 들어갔다. 이름은 ‘원정대’였지만 실상은 영국령 인도군을 앞세운 군사적 침공에 가까웠다. 러시아가 티베트에 손을 뻗고 있다는 영국의 의심에서 시작된 원정이었다. 그러나 정작 라사에 들어간 영국은 러시아의 영향력이 자신들이 두려워했던 것만큼 크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젊은 베일리는 그 제국주의적 원정의 일부였다. 그러나 그는 무기와 군장만 챙긴 군인이 아니었다. 위험한 땅으로 들어가면서도 나비를 담을 채집통을 들고 다녔다. 군사적 가치가 있는 지형과 정보를 살피는 한편, 곤충과 새, 식물을 관찰하고 수집하기 위함이었다.

오늘날의 시선으로 보면 군사 첩보와 자연과학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일처럼 보인다. 그러나 제국주의 시대의 탐험가들에게 이 둘은 군대와 식민정부가 낯선 땅을 이해하고 지배하는 데 필요한 지식을 만드는데 필수적인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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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3년 모스헤드와 베일리가 떠난 티베트 탐험의 이동 경로를 표시한 지도. 출처: Frederick Marshman Bailey - http://pahar.in, Public Domain

1913년, 베일리는 측량사 헨리 모스헤드 대위와 함께 히말라야의 창포 협곡으로 들어갔다. 당시 지리학계에는 반세기 가까이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가 하나 남아 있었다. 티베트고원을 따라 동쪽으로 흐르던 얄룽창포강이 히말라야 산속으로 들어간 뒤 어디로 이어지는지 아무도 정확히 알지 못했다. 그 물줄기가 인도의 브라마푸트라강과 이어질 것이라는 추측은 있었지만, 깊고 험한 협곡이 사람들의 접근을 좀처럼 허락하지 않았다. 강은 산속으로 사라졌고, 그 너머에는 오랫동안 지도의 공백만 남아 있었다.

두 사람은 거의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협곡을 헤치며 강의 경로를 지도 위에 옮겼고, 베일리는 그 여정에서 200종에 이르는 나비 2,000마리를 수집했다.

그러나 그의 기억에 가장 깊이 남은 것은 거대한 협곡도, 지도 위에서 모습을 드러낸 강줄기도 아니었을지 모른다. 롱추 계곡의 숲 가장자리를 지나던 어느 날, 베일리는 돌과 눈으로 뒤덮인 풍경 한가운데 피어 있는 파란 꽃을 발견했다. 히말라야의 차갑고 황량한 빛 속에서 그 꽃은 믿기 어려울 만큼 선명한 푸른빛을 띠고 있었다. 그는 꽃을 꺾어 수첩 사이에 눌러 넣었다.

훗날 유럽에서 그 꽃이 재배돼 세상에 공개되자 사람들은 낯선 푸른빛에 매혹됐다. 히말라야 파란 양귀비로 알려진 그 식물에는 베일리의 이름을 딴 메코놉시스 베일레이(Meconopsis baileyi)라는 학명이 붙었다. 그 꽃은 지금도 히말라야의 돌과 눈 사이에서 잠시 피어났다 사라지며, 한때 나비채를 들고 세계의 끝을 걸었던 첩보원의 이름을 되풀이한다.

베일리에게 탐험과 자연학, 첩보활동은 각기 다른 세 개의 삶이 아니었다. 나비의 미세한 무늬를 구별하는 눈과 낯선 언어의 억양을 익히는 귀, 지도에 없는 길을 더듬어 찾아가는 감각은 모두 같은 뿌리에서 나온 능력이었다. 훗날 타슈켄트에서 그를 살린 것도 총이나 화려한 장비가 아니라 그 오랜 관찰과 적응의 습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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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말라야 파란 양귀비. 출처: Axel Kristinsson from Reykjavík, Iceland - Himalayan Blue Poppy, CC BY 2.0

 

***

 

1917년 러시아에서는 두 차례 혁명이 일어났다. 먼저 2월혁명으로 황제가 물러나면서 수백 년을 이어온 제정 러시아가 무너졌고, 같은 해 10월에는 레닌이 이끄는 볼셰비키가 권력을 잡았다. 그러나 혁명으로 혼란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옛 제국의 광대한 영토는 더 깊은 전쟁 속으로 빠져들었다.

볼셰비키의 적군과 이에 맞선 여러 반볼셰비키 세력, 이른바 백군이 곳곳에서 충돌했다. 여기에 제정 러시아로부터 벗어나려는 민족주의 세력과 독립운동가들, 군벌과 외국 군대까지 뒤엉켰다. 어제의 동맹이 오늘의 적이 되고, 도시의 주인이 하루아침에 바뀌는 시대였다. 법과 국경은 무너졌고, 굶주림과 전염병, 폭력이 사람들의 일상을 삼켰다.

영국을 비롯한 제1차 세계대전의 연합국도 이 내전에 발을 들였다. 처음에는 독일과 오스만제국이 러시아 영토에 남아 있던 전쟁포로와 군수물자를 이용하지 못하게 한다는 명분이 앞섰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개입은 볼셰비키에 맞선 세력을 돕는 방향으로 바뀌었다. 영국군은 러시아 북부와 캅카스, 시베리아뿐 아니라 카스피해 동쪽, 오늘날의 투르크메니스탄에서도 군사작전을 벌였다.

이런 상황에서 볼셰비키가 영국인을 순수한 외교 상대로 받아들일 리 없었다. 그들에게 영국은 내전에 군대를 보낸 적국이었으며, 영국의 정보요원은 혁명을 무너뜨리려는 공작원이었다.

영국 역시 중앙아시아의 혼란을 먼 나라의 일로 여기지 않았다. 타슈켄트에서 남쪽으로 내려가면 아프가니스탄이 나오고, 그 너머에는 영국령 인도가 있었다. 영국 정부는 독일이나 오스만제국의 요원, 또는 볼셰비키 혁명가들이 이 길을 따라 인도로 들어가 반영 운동을 지원할 가능성을 두려워했다. 실제로 영국의 지배에서 벗어나려던 인도 민족주의자들 가운데 일부는 독일과 러시아에서 도움을 구하고 있었다.

1918년 영국 정부가 베일리를 타슈켄트로 보낸 것은 이런 배경에서였다. 그의 임무는 새로 들어선 볼셰비키 세력의 의도를 파악하고, 독일과 오스트리아계 전쟁포로들이 아프가니스탄을 거쳐 인도로 이동하는 것을 막는 한편, 인도의 반영 세력과 중앙아시아 사이에 어떤 연결이 형성되고 있는지를 살피는 것이었다.

물론 베일리가 처음부터 어둠 속에 숨어든 비밀요원이었던 것은 아니다. 처음에는 영국 정부의 대표라는 신분을 내걸고 비교적 공개적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러시아 내전에서 영국의 군사개입이 본격화하자 그의 처지는 급변했다. 타슈켄트와 외부를 잇는 길은 끊겼고, 주변에 있던 동료들은 하나둘 도시를 떠났다. 얼마 전까지 외교사절로 사람들을 만나던 그는 어느 순간 체카가 뒤쫓는 첩자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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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년 티베트에서 촬영된 사진. 가장 오른쪽이 베일리. 출처: Arthur Hopkinson - http://tibet.prm.ox.ac.uk/photo_BMH.D.98.1.html, Public Domain

그 무렵의 타슈켄트는 지금처럼 우즈베키스탄의 평온한 수도가 아니었다. 제정 러시아가 중앙아시아를 지배하기 위해 세운 행정 중심지였고, 혁명 뒤에는 볼셰비키의 지역 거점이 됐다. 거리에는 군인과 전쟁포로, 피란민과 정치공작원들이 뒤섞여 있었다. 식량은 부족했고 소문과 밀고가 끊이지 않았다. 그 도시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매일 아침 눈을 뜰 때마다 새로운 삶을 시작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베일리는 거처를 옮길 때마다 이름과 과거도 함께 바꿨다. 위험이 가까워지면 방을 빠져나오면서 일부러 엉뚱한 흔적을 남겼고, 때로는 보이지 않는 잉크와 암호를 이용해 영국 측에 정보를 전했다. 체카는 그가 여전히 타슈켄트에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그가 어느 골목의 어떤 얼굴로 살아가는지는 찾아내지 못했다.

마침내 베일리는 도망치는 대신 추적자들 속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자신을 뒤쫓는 조직의 눈앞에 모습을 드러냄으로써 오히려 보이지 않는 사람이 되려 한 것이다. 세르비아 출신의 전직 오스트리아군 병사라는 새로운 인생을 만들어낸 그는 볼셰비키 측 정보조직에 일자리를 청했고, 그 무모한 연기는 뜻밖에도 성공했다.

그에게 내려진 첫 임무는 부하라에서 활동하는 영국의 첩보망을 찾아내는 일이었다.

오늘날 부하라는 우즈베키스탄의 유서 깊은 도시로 알려져 있지만, 당시에는 세습 군주인 에미르가 다스리던 부하라 토후국의 수도였다. 오랫동안 러시아제국의 보호 아래 있었으나 내부적으로는 상당한 자치를 유지했고, 1917년 혁명 뒤에도 곧바로 볼셰비키의 지배에 들어가지 않았다. 타슈켄트보다 감시가 느슨했던 부하라는 영국 요원과 반볼셰비키 인사들이 접촉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체카의 눈에 부하라는 수상한 사람들이 모이는 소굴이었지만, 베일리에게는 포위망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틈이었다. 그는 볼셰비키 요원의 신분증을 지닌 채 당당하게 기차에 올라 그곳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곳에 도착한 뒤, 자기 자신을 체포하라는 명령을 받게 된 것이다.

베일리는 프레더릭 마시먼 베일리가 아프가니스탄으로 달아났다는 거짓 보고를 보낸 다음, 자신은 서쪽의 페르시아로 향할 준비를 했다. 추적자들의 시선을 남쪽으로 돌려놓고 정반대 방향으로 사라지려는 계산이었다.

목숨을 건 탈출을 앞두고도 그가 포기하지 않은 것이 하나 있었다. 타슈켄트에 남겨둔 자신의 개 제프였다. 체카가 그 개의 움직임까지 감시한 적이 있었으므로 다시 데려오는 일은 위험했다. 그러나 베일리는 하인을 보내 개와 함께 부하라로 오게 했다. 그를 따라 도시를 벗어나려는 사람들이 하나둘 모이면서 탈출 일행은 열일곱 명으로 불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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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령 인도 정무부 소속으로 인도와 티베트 인근의 미슈미 원정대의 정치담당 부관을 맡았던 프레더릭 마시먼 베일리 대위가 니잠가트에서 미슈미족 주민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 출처: Angus Hamilton - Hamilton, Angus (1912) In Abor jungles. Eveleigh Nash, London., Public Domain

 

***

 

1919년 12월 18일 해 질 무렵, 두꺼운 투르크멘 외투를 걸친 일행은 말을 타고 부하라를 떠났다. 목적지는 페르시아의 마슈하드였다. 그들은 큰길을 피해 사막의 우물과 작은 마을을 이어가며 서쪽으로 나아갔다. 식량이라고는 두 번 구운 딱딱한 빵과 차, 설탕, 소금, 건포도 정도뿐이었다. 밤이면 눈이 내려 천막을 덮었고, 길잡이가 길을 잃은 날에는 사람과 말이 함께 갈증에 시달렸다.

자유를 눈앞에 둔 마지막 순간에도 위험은 기다리고 있었다. 페르시아 국경을 이루는 강으로 내려가던 일행을 볼셰비키 경비병들이 발견했다. 총성이 울리고 총알이 강둑의 흙을 튀겼다. 일행은 응사하며 말을 탄 채 강물로 뛰어들었다. 혼란 속에서 한 여성이 말에서 떨어지고 짐이 물가에 흩어졌지만, 동료의 도움을 받아 가까스로 강을 건넜다.

그렇게 베일리는 마침내 볼셰비키의 손길이 닿지 않는 페르시아 땅에 들어섰다. 타슈켄트에 도착한 뒤 약 1년 반 동안 이어진 숨바꼭질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훗날 체카는 그의 탈출을 인정하는 대신 베일리의 국장을 치렀다고 전해진다. 자신들이 그토록 찾아 헤맨 남자가 눈앞에서 사라졌다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 그를 죽은 사람으로 만들어버린 셈이다.

가짜 신분과 암호문, 비밀경찰과 사막의 추격전, 국경에서 벌어진 총격까지, 그의 이야기에는 첩보소설에 필요한 거의 모든 것이 들어 있다.

그러나 그의 삶을 낭만적인 모험담으로만 읽는다면 중요한 절반을 놓치게 된다. 베일리는 자유로운 여행자가 아니라 대영제국의 이해를 위해 움직인 관리이자 정보요원이었다. 그가 익힌 언어와 그가 그린 지도, 그가 모은 정보는 탐험과 학문에 기여했지만, 동시에 영국의 군사전략과 식민통치를 뒷받침했다. 그가 누빈 티베트와 중앙아시아의 사람들은 영국과 러시아, 볼셰비키와 반볼셰비키 세력이 벌이는 각축 속에서 자신들의 생존과 독립을 지켜야 했다.

한쪽의 영웅은 다른 쪽의 침입자일 수 있다. 영국에서 베일리는 대담하고 기민한 탐험가로 기억됐지만, 소련의 역사에서는 중앙아시아의 불안을 부추긴 제국주의 첩자로 그려졌다. 어느 한쪽의 모습만으로는 그의 삶을 온전히 설명할 수 없다.

오히려 바로 그 모순 때문에 베일리라는 인물이 흥미로운 것일 수도 있다. 그는 군인이면서 자연학자였고, 제국의 관리이면서 미지의 세계에 매혹된 탐험가였다. 나비의 날갯무늬를 들여다보던 눈으로 사람들의 표정을 읽었고, 지도에서 사라진 강을 추적하던 감각으로 포위된 도시에서 빠져나갈 길을 찾아냈다. 기밀문서를 품고 이동하면서도 담뱃갑 안에는 나비 표본과 씨앗을 넣어 다녔으며, 페르시아로 달아나는 사막에서도 눈에 띄는 동물을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그를 타슈켄트에서 살아남게 한 것은 권총도, 영화 속 첩보장비도 아니었다. 사람의 말투와 표정을 기억하는 눈, 새로운 언어와 풍습을 익히는 능력, 어떤 환경에서도 자신을 바꾸어 살아갈 수 있는 적응력, 그리고 아무리 다급한 순간에도 주변을 관찰하는 습관이었다.

1946년에 출간된 《타슈켄트 임무》에서 베일리는 이 모든 일을 놀라울 만큼 담담하게 들려준다. 자신의 이름이 적힌 체포 명령을 받았을 때조차 영웅적인 감정이나 극적인 공포를 길게 늘어놓지 않는다. 그래서 그의 이야기는 오히려 더 비현실적으로 다가온다. 소설가가 지어냈다면 지나치게 작위적이라는 말을 들었을 장면을, 한 인간이 자신이 살아낸 시간의 일부였다고 조용히 기록했기 때문이다.

적의 사무실로 걸어 들어가 그들의 요원이 된 남자. 자신을 찾아 체포하라는 명령을 받고, 자신은 이미 달아났다고 보고한 남자. 프레더릭 마시먼 베일리의 생애를 하나의 장면으로 압축한다면 아마도 바로 그 순간일 것이다.

그는 평생 지도 위의 공백을 향해 걸어갔다. 히말라야에서는 산속으로 사라진 강의 행방을 좇았고, 타슈켄트에서는 살아남기 위해 지도와 기록에서 자신의 흔적을 지웠다. 그리고 마침내 자신을 체포하라는 명령을 손에 든 순간, 체카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남자는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곳, 바로 그들 앞에 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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