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영박물관엔 없는 이야기들

북한 수용소로의 행군: 한국전쟁 포로가 된 영국 외교관의 기록

서울이 함락되는 순간까지도 주한영공사관을 지켰던 외교관, 비비언 홀트의 이야기

2026.01.10 | 조회 2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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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태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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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6, 서울.

장마철 초입의 서울 하늘은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영국 공사관저의 잔디밭 위로 빗줄기가 가늘게, 그러나 끈질기게 내리고 있었다. 잔디는 이미 물기에 젖어 질퍽거렸고, 공기는 흙냄새와 풀냄새로 무거웠다. 그런데도 초대받은 손님들은 실내의 안락함을 포기한 채 야외에 모여 서 있었다. 영국 국왕 조지 6세의 생일을 축하하는 공식 리셉션이었다.

주최자인 비비언 홀트(Vyvyan Holt) 공사는 여느 외교관들이 입는 정장 대신 장화를 신고 있었다. 한 손에는 우산을, 다른 손에는 와인 잔을 들고, 비에 젖어가는 손님들을 태연하게 맞이하고 있었다. 누군가가 실내로 들어가자고 조심스럽게 제안했을 때, 그의 대답은 간결하면서도 당혹스러웠다.

가구에 토사물이 묻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습니까.”

참석자들은 어리둥절했다. 혹자는 영국식 유머려니 했고, 혹자는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이것이 바로 비비언 홀트라는 인물이었다. 그는 외교계에서도 손꼽히는 괴짜였다. 금욕주의자를 자처하며 삶은 채소와 과일, 커드만을 먹었고, 뜨겁게 조리한 식사를 나약함의 상징이라 여기며 경멸했다. 그의 원칙은 완고했고 괴팍함은 가히 전설적이었다.

그러나 빗속에서 와인 잔을 기울이던 그 누구도, 홀트 자신조차도 예상하지 못했다. 그로부터 불과 며칠 후, 한반도의 평화는 총성과 함께 산산이 부서질 것이고, 이 괴짜 외교관은 역사상 가장 잔혹한 시련 중 하나를 견뎌내야 할 운명에 놓이게 되리라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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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북한 억류에서 석방된 후의 비비언 홀트.  (출처: Philip Deane. Captive In Korea. — London: Hamish Hamilton, 1953. — С. 80. — 224 с)

 

쿠르드 신문을 만들었던 동양통(東洋通)

 

비비언 홀트는 1896년 런던에서 태어났다. 이듬해인 1897년은 빅토리아 여왕이 즉위 60주년을 맞이한 해였다. 대영제국이 전 세계 육지의 4분의 1을 지배하던 시대였다.

1914422, 봄볕이 따사롭던 어느 날, 열여덟의 청년 홀트는 미들섹스 연대(Middlesex Regiment) 9대대 소위로 임관한다. 그리고 그해 6, 사라예보에서 총성이 울렸다.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불과 두 달 전이었다. 그때부터 운명은 이미 그를 역사의 소용돌이 속으로 밀어넣고 있었다.

홀트는 인도에서 복무했다. 히말라야의 그늘 아래, 뜨거운 태양과 먼지 속에서 젊은 장교로서의 시간을 보냈다. 전쟁이 끝나고 유럽이 폐허 위에서 신음하던 1919, 그는 정치장교로서 이라크 민정부에 합류해 술라이마니야(쿠르드 산악 지대의 고대 도시)[1]로 향했다.

그곳에서 홀트는 쿠르드어를 배웠다. 하지만 그는 단순히 통역을 위한 회화를 익히는 데 그치지 않았다. 그는 쿠르드어로 발행되는 신문 제작에 깊숙이 관여했고, 그 지역의 언론 활동과 여론 형성에 직접 개입했다. 당시 대부분의 영국 외교관들이 현지어는커녕 현지 문화조차 경시하던 시대에, 홀트는 스스로를 현지인들 속에 파묻었다. 이는 단순한 직업적 성실함이 아니었다. 어쩌면 일종의 강박에 가까웠다. 그는 이후 중동 지역에서 영국 외교관으로서는 드물게 현지 언어와 사회에 정통한 인물로 평가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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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르드 국(國)지도. 쿠르드 국은 1918년 10월부터 1919년 6월까지 남부 쿠르디스탄에 존재했던 자치 정부였다. 이 정권은 처음에는 영국의 종속적 지위에 있었으나, 반영(反英) 봉기가 발생한 이후 결국 해체되었다. ‘쿠르드 국(Kurdish state)’라는 명칭은 이 정치체가 존속하던 당시, 런던과 중동의 영국 관리들이 이 정권을 지칭하기 위해 사용한 외부 명칭(exonym)이었다. 출처: Koopinator, CC BY-SA 4.0 / 번역: 더 펀트

1920년대 이후 그는 여러 시기에 걸쳐 이른바 ‘Oriental Secretary’ 혹은 ‘Oriental Adviser’(동양 담당 서기관, 혹은 동양 고문) 성격의 직무를 수행했다. 이는 제국이 비유럽 지역을 관리하기 위해 두었던 특수한 직책이었다. 문명의 중심에서 멀리 떨어진, 그러나 전략적으로는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그 모든 변방에서, 홀트는 전문성을 축적해 나갔다.

케임브리지 대학 킹스 칼리지에서 수학한 그는 이후 테살로니키 부영사를 시작으로 콘스탄티노플, 앙카라, 아디스아바바, 워싱턴, 다시 앙카라, 그리고 헝가리로 이어지는 지역에서 외교 경력을 쌓았다. 그의 이력서를 펼쳐보면 하나의 일관된 패턴이 드러난다. 파리도, 로마도, 베를린도 아니었다. 그는 언제나 경계에 서 있었다. 제국의 끝자락, 문명의 변방, 불안정성의 진원지. 그곳이 바로 비비언 홀트가 서 있던 자리였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 중 워싱턴 주재 영국대사관에서 그는 영국의 전시 자원과 에너지 공급 문제를 다루는 고도로 민감한 업무에 관여했다. 섬나라 영국의 생존은 대서양 너머에서 오는 석유와 곡물에 달려 있었고, 홀트는 그 생명줄을 관리하는 일을 맡았다. 1942, 전쟁의 향방이 아직 불투명하던 시기에 그는 전략적 요충지였던 앙카라로 복귀해 참사관으로 근무했다. 터키의 중립을 유지시키는 것은 연합국의 사활적 과제였다.

1946, 총성이 멈추고 폐허만 남은 유럽에서 홀트는 헝가리 주재 영국 대표로 임명되었다. 소련의 그림자가 동유럽을 뒤덮기 시작하던 시기였다. 이듬해 외교 관계가 정상화되면서 그는 공사로 승격되었다.

비비언 홀트는 위기의 시대와 불안정한 지역을 다루는 데 특화된 외교관이었다. 어쩌면 그는 평화로운 곳에서는 결코 제 역할을 찾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에게는 혼란과 위험이 필요했다. 그리고 19506, 서울에서 그는 마침내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큰 시험대와 마주하게 된다.

 

전쟁 직전의 한반도

 

1948, 헝가리에서의 임무를 마친 비비언 홀트는 새로운 목적지를 부여받았다. 한반도. 그는 대한민국과 관련된 영국의 외교 대표 역할을 맡게 되었다. 유럽의 철의 장막에서 아시아의 분단선으로, 한 변방에서 또 다른 변방으로의 이동이었다.

이듬해 19493, 그는 특명전권공사(Envoy Extraordinary and Minister Plenipotentiary)로 정식 격상되었다. 이는 영국이 1949118, 겨울의 한기가 아직 가시지 않은 시점에 대한민국을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 정부로 공식 인정한 데 따른 조치였다. 이미 파견돼 있던 임시적 성격의 외교 대표 체제를 정식 외교 관계로 전환한 것이다. 홀트는 이제 여왕 폐하의 이름으로 이 먼 땅에서 공식적으로 말할 수 있는 권한을 갖게 되었다.

그가 도착한 한국은 막 산고(産苦) 끝에 태어난 신생아 같은 나라였다. 1948815, 삼십오 년 만에 되찾은 광복 3주년에 정부가 수립되었다. 거리에는 태극기가 펄럭였고, 사람들은 희망에 들떠 있었다. 그러나 국가의 기반은 위태롭기 짝이 없었다. 행정 체계는 불완전했고, 경제는 피폐했다. 더욱이 38선 너머 북쪽에는 소련의 전폭적 지원을 받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버티고 있었다. 김일성은 이미 인민군을 조직하고 있었고, 남북 간 긴장은 날로 고조되고 있었다. 국경선을 따라 무장 충돌이 빈번했고, 대통령 이승만과 김일성은 서로를 향해 통일을 외쳤다. 한반도는 언제 불이 붙어 폭발해도 이상하지 않은 화약고와 같았다.

홀트의 임무는 명확했다. 상황을 관찰하고, 평가하고, 보고하는 것. 이 신생 국가의 생존 가능성은? 정치적 안정성은? 공산화 위협은? 군사적 취약점은? 영국 정부는 한국에 어느 정도의 관심과 자원을 투입할 것인지 판단해야 했다. 한국은 명백히 미국의 영향권에 속했다. 미군정이 물러간 자리를 미국의 원조와 고문단이 채우고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이곳은 냉전의 최전선이었다. 소련과 미국이 정면으로 맞붙는, 그러나 아직 총성은 울리지 않은 그런 곳. 홀트는 이 복잡하고 유동적인 상황을 매일 관찰하고 분석해 런던에 전달하는 눈이자 귀였다.

당시 그가 이끌던 공사관의 규모는 매우 작았다. 인원도 적었다. 부하 중에는 조지 블레이크(George Blake)라는 젊은 부영사가 있었다. 1948년 말, 겨울바람이 매서워지던 시기에 서울에 도착한 블레이크는 스물여섯의 청년이었다. 네덜란드인 아버지와 이집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로테르담에서 자랐지만, 2차 세계대전 중 영국으로 탈출해 영국 해군에 입대했다. 전후 영국 외무부에 채용된 그는 공식적으로는 부영사였으나, 실제로는 영국 비밀정보부 MI6 를 위한 정보 수집 임무도 수행하고 있었다. 그는 러시아어에 능통했고, 공산주의 운동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는 것이 그의 임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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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 주한 영국 공사관. 출처: 호머 헐버트, 『The Passing of Korea』. 영어 위키문헌 Ryuch 업로드본을 바탕으로 billinghurst·Drewth가 제작한 2차 저작물. Public Domain.

블레이크는 훗날 자서전에서 홀트를 매력적이지만 괴짜이며 금욕적인 인물로 회상했다. 채소와 커드만 먹는 공사의 식습관은 젊은 부영사에게 호기심의 대상이었고, 때로는 당혹감의 원천이기도 했다. 그러나 홀트는 능력 있는 상관이었고, 블레이크는 그를 존경했다.

두 사람은 1950년 봄, 서울의 거리를 함께 걸었다. 광화문 네거리, 종로의 전차, 남대문 시장의 소란. 전쟁은 아직 오지 않았고, 사람들은 일상을 살고 있었다. 그러나 공기 속에는 무언가 불길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홀트는 본능적으로 느꼈을 것이다. 술라이마니야에서, 콘스탄티노플에서, 부다페스트에서 위기가 오기 직전의 그 미묘한 떨림을.

 

북한군에 억류되다

 

1950625일 새벽. 일요일 새벽 4, 여름비가 그친 한반도에 포성이 울렸다. 북한 인민군이 38선 전역에서 일제히 남진을 개시했다. T-34 전차의 궤도 소리가 땅을 흔들었고, 포탄이 하늘을 가르며 날아갔다. 국군은 무너졌다. 준비되지 않았고, 장비도 부족했으며, 무엇보다 이것이 전면전이 될 줄 몰랐다.

서울은 혼돈에 빠졌다. 처음 이틀간 정부는 절대 안심하라”, “국군이 반격 중이다라고 방송했다. 그러나 사흘째인 28, 한강 다리가 폭파되었다. 피란민들이 아직 다리 위에 있을 때였다. 그날 새벽, 서울은 함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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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을 떠나 피난길에 오른 사람들. 출처: 국가기록원

대부분의 외국 공관도 철수했다. 미국 대사관은 26일 직원 가족들을 수원으로 급히 보냈고, 27일에는 공관 전체가 부산으로 이동했다. 프랑스, 터키, 필리핀 공관도 잇달아 철수했다. 거리에는 트럭과 짐수레가 뒤엉켰고, 사람들은 남쪽으로, 무조건 남쪽으로 달아났다. 공포가 도시를 휩쓸었다.

그러나 비비언 홀트는 남기로 결정했다.

그는 직원들을 모아놓고 담담하게 말했다. 자신은 영국 공사로서 이곳에 남을 것이며, 떠나고 싶은 사람은 떠나도 좋다고. 조지 블레이크와 부영사 노먼 오웬(Norman Owen)도 그의 곁을 지켰다.

홀트는 외교관 신분이 자신을 보호할 것이라 믿었다. 제네바 협약이 있지 않은가. 외교관은 불가침이다. 그것은 문명 국가들 사이의 최소한의 약속이었다. 또한 그는 자신의 임무가 끝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런던은 보고를 기다리고 있었다. 현장을 지키는 것, 끝까지 관찰하는 것, 그것이 외교관의 의무라고 그는 믿었다.

하지만 이는 오판이었다. 치명적인 오판. 그러나 동시에 이것은 비비언 홀트라는 인물을 가장 잘 드러내는 선택이기도 했다. 술라이마니야에서, 부다페스트에서, 그가 언제나 지켜온 원칙. 변방을 지키고, 위험을 회피하지 않으며, 원칙을 고수하는 것. 괴짜 금욕주의자의 완고함이, 이번에는 그를 지옥으로 이끌었다.

그해 여름,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은 외국인들을 전쟁 포로가 아닌 억류자로 분류했다. 법적 지위는 애매했지만, 결과는 명확했다. 감금이었다. 홀트는 블레이크, 오웬, 그리고 마르텔과 함께 억류되었다. 이들은 한국전쟁 발발 이후 공산권에 억류된 가장 초기의 서방 외교관 그룹이었다. 미군 포로들도 속속 들어왔다. 서울의 한 건물, 그다음에는 평양 근교의 수용소. 억류는 시작에 불과했다.

1950년 가을, 인천상륙작전 이후 전세가 역전되자 유엔군은 북진을 시작했다. 928일 서울 탈환, 10월 평양 함락. 맥아더는 압록강까지 밀어붙였다. 그러자 북한군은 포로들을 증거인멸하듯 북쪽으로, 더 북쪽으로 이동시키기 시작했다.

195010월 말, 대규모 포로 이동이 시작되었다. 수백 명의 포로들(미군, 영국인, 터키군, 한국군, 민간인 등을 포함)이 열을 지어 걷기 시작했다. 이 과정은 훗날 타이거 죽음의 행진(Tiger Death March)’[2]으로 불리게 된다. 목적지는 만주 국경 근처의 벽동(碧潼) 수용소. 거리는 수백 킬로미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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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전쟁 중 북한군에 사로잡힌 미군 전쟁 포로들. 출처: Defense POW/MIA Accounting Agency

행군은 그야말로 지옥과 같았다. 가을은 이미 깊어 있었고, 산속의 밤은 영하로 떨어졌다. 포로들은 여름옷 차림이었다. 신발이 없는 사람도 있었다. 식량은 거의 주어지지 않았다. 하루에 옥수수 한 줌, 혹은 아무것도. 물도 부족했다. 이질과 이질이 돌았다. 사람들은 걸으며 쓰러졌다. 뒤처지면 총살이었다. 감시병들은 인민군 낙오병들로, 그들 자신도 굶주리고 있었고, 포로들에게 자비를 베풀 여유가 없었다.

당시 홀트는 쉰네 살이었다. 채소와 커드만 먹으며 단련했다던 그의 몸은 이 행군 앞에서 속수무책이었다. 블레이크는 젊었지만, 그 역시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다. 밤마다 누군가 죽었다. 아침이 되면 시신들이 길가에 버려졌다. 설상가상 눈까지 내리기 시작했다.

정확한 규모와 생존자 수는 자료마다 다르다. 어떤 기록은 700명 중 300명이 죽었다고 하고, 어떤 증언은 더 참혹하다. 그러나 한 가지만큼은 분명하다. 수많은 민간인과 군인이 그 겨울 산길에서, 굶주림과 질병과 혹한 속에서, 총탄에 맞아, 혹은 그저 지쳐서, 목숨을 잃었다는 것. 그리고 비비언 홀트가 그 행렬 속에 있었다는 것.

 

석방, 그리고 죽음

 

1953년 봄. 판문점에서 정전 협상이 지루하게 이어지는 가운데, 포로 교환이 단계적으로 시작되었다. 봄바람이 불기 시작한 어느 날, 비비언 홀트는 다른 민간인 억류자들과 함께 마침내 석방되었다. 그가 처음 억류된 지 거의 3년 만이었다.

그는 수용소를 걸어 나왔다. 아니, 걸을 수 있는 상태였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었다. 많은 이들이 그 겨울을 넘기지 못했다. 함께 걸었던 이들 중 상당수가 만주 국경 근처의 차가운 땅에 묻혀 있었다. 홀트는 뼈만 앙상하게 남았고, 머리는 희끗희끗 세어 있었으며, 눈빛은 어딘가 멀리 있는 것을 보고 있었다.

영국으로 돌아온 그는 순간적으로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영웅의 귀환. 파테 뉴스(Pathé News)[3]는 그의 귀환 장면을 카메라에 담았다. 흑백 화면 속 홀트는 의외로 차분해 보였다. 그는 미소 지었고, 악수했으며, 몇 마디 말을 했다. 그러나 그 미소는 입가에만 머물렀다. 눈은 웃지 않았다.

파테 뉴스 카메라가 담은 1953년 송환된 포로들의 귀환 장면

 

함께 억류되었던 아일랜드 출신 가톨릭 성직자 토마스 퀸란 몬시뇰(Monsignor Thomas Quinlan)은 훗날 회고록에서 홀트를 침묵 속에서 모든 것을 견딘 사람이라고 표현했다. 수용소에서 홀트는 다른 포로들, 특히 젊은 병사들을 돌보았다. 자신의 식량을 나누어주었고, 밤마다 절망하는 이들을 조용히 격려했다. 그는 불평하지 않았다. 괴짜였던 그 금욕주의가, 지옥 같은 수용소에서는 하나의 힘이 되었다. 퀸란은 홀트의 용기와 책임감을 높이 평가하며, “그가 없었다면 더 많은 이들이 희망을 잃었을 것이라고 적었다.

1953년 말, 홀트는 엘살바도르 주재 특명전권공사로 임명되었다. 영국 외무부는 그를 여전히 필요로 했다. 중앙아메리카의 작은 나라. 또다시 변방이었다. 그는 산살바도르로 갔다. 커피 농장의 향기, 야자수 그늘, 따뜻한 기후. 북한의 추위와는 정반대였다. 그러나 그는 그곳에서도 여전히 채소와 커드만 먹었다고 한다.

1956, 그는 대영제국 훈장 기사사령관(Knight Commander of the Order of the British Empire, KBE)으로 서임되었다. 그렇게 그는 비비언 홀트 경()' (Sir Vyvyan Holt)이 되었다. 버킹엄 궁에서 여왕으로부터 훈장을 받던 날, 예의 바른 미소를 짓던 그는 평온해 보였다 한다. 

그러나 포로 생활의 후유증은 서서히, 그러나 확실하게 그의 몸을 잠식하고 있었다. 영양실조, 동상, 감염. 육체는 겉으론 회복된 것처럼 보였지만, 이미 내부에서는 철저하게 무너지고 있었다벽동으로 가는 행군, 눈 속의 밤, 굶주림, 죽어가는 동료들의 신음등 한국에서 그가 겪은 시간은 그의 남은 생애를 조용히 갉아먹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1960729, 비비언 홀트는 64세의 나이로 조용히 세상을 떠나고 만다.

후에 그의 부고가 《뉴욕타임스에 실렸다. “뛰어난 외교관이자 한국전쟁 포로 생존자라는 짧은 한 줄이었다. 그는 런던으로 돌아와 묻혔다. 1896년에 태어나 1960년에 세상을 떠난 한 외교관. 그의 묘비에도 아마 간결한 문구만 새겨졌을 것이다. 그가 살아 생전 유지했던 금욕스러웠던 생활습관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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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NDON, July 29 — Sir Vyvyan Holt, British Minister in Seoul, Korea, when it was captured by Communist troops in 1950, died today at the age of 64.”

홀트의 부고가 실린 1960년 7월 30일자 뉴욕타임스

 

보이지 않는 참전의 의미

 

비비언 홀트의 이야기는 한국전쟁이 단순한 군사 충돌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우리는 전쟁을 전선과 폭격, 탱크와 총성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전쟁은 그보다 먼저 시작되고, 그보다 오래 지속된다. 전쟁은 외교관의 보고서에서 시작되고, 생존자의 몸속에서 끝나기도 했던 거다.

영국은 약 56천 명의 병력을 한반도에 파병했다. 글로스터 연대는 임진강에서 최후까지 싸웠고, 영국 해군은 서해안을 봉쇄했으며, 영국 공군은 평양 상공을 날았다. 1천 명 이상이 전사했고, 더 많은 이들이 부상을 입었다. 미국 다음으로 많은 병력을 보낸 국가가 영국이었다. 이는 대서양 건너, 자신들과는 직접적 관련이 없어 보이는 반도를 위한 선택이었다.

그러나 전쟁 이전, 외국의 외교관들이 그 땅에 있었다. 홀트가 1949년과 1950년 사이 런던으로 보낸 보고서들에는 신생 한국의 취약성, 북한의 군사적 위협, 그리고 이 분단된 반도가 가진 전략적 의미가 담겨 있었다. 그는 38선의 긴장을 관찰했고, 이승만의 불안정한 정치를 분석했으며, 김일성의 남침 가능성을 타진했다.

19506월 말, 북한군이 부산까지 밀어붙이고 있을 때, 영국 정부는 유엔의 틀 안에서 한국전쟁 개입을 결정했다. 클레멘트 애틀리 노동당 총리는 하원 연설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침략에 맞선 집단적 대응은 평화를 지키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야당인 보수당도 이를 지지했다. 이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판단이 아니었다. 홀트를 비롯한 현장 외교관들의 보고가 그 결정의 토대였다. 먼 변방의 관찰자들이 보낸 전문(電文)들이, 결국 병사들을 전장으로 보내는 결정으로 이어졌다.

홀트는 총을 들지 않았다. 훈장도 군인들에게 주어지는 종류가 아니었다. 방식과 위치는 달랐지만 그는 한국전쟁에 참전했다. 결국 포로가 되었고, 죽음의 행군을 견뎌냈으며, 그 전쟁으로 인해 인생이 바뀌었다. 64. 요즘 기준으로는 젊은 나이. 그러나 그에게 주어진 시간은 그것이 전부였다. 한국에서의 3년이 그의 남은 시간을 모두 앗아갔다.

그의 이야기는 전쟁이 개인에게 무엇을 요구하는지를 묻는다. 전쟁은 영웅만 만들지 않는다. 전쟁은 의무를 다하려는 사람을, 원칙을 지키려는 사람을, 변방을 끝까지 지키려는 사람을 집어삼킨다. 그리고 그들이 살아남더라도, 전쟁은 그들 안에 남아 천천히 그들을 죽인다.

19506, 비 오는 서울의 잔디밭에서 열린 그 기묘한 파티(우산을 쓰고 장화를 신은 채 와인을 마시던 그 장면), 그렇게 한 외교관의 삶을 바꿔 놓은 서막이었다. 역사는 때로 이렇게 시작된다. 빗속의 파티에서, 괴짜의 고집에서, 어떤 한 결정에서.

 

* 본 글에 언급된 일부 내용은 언론 보도와 제3자가 작성한 회고록·자서전 등을 토대로 구성되었으며, 사료의 성격상 세부적인 사실관계에서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1]  홀트가 술라이마니야로 향한 이유를 이해하려면, 제1차 세계대전 직후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벌어진 짧은 역사적 실험을 살펴봐야 한다. 1918년 전쟁이 끝나고 오스만 제국이 해체되자, 영국은 이라크 북부를 포함한 메소포타미아 전역을 점령하고 새로운 행정 질서를 모색했다. 특히 쿠르드인이 다수 거주하는 산악 지역은 아랍이나 터키, 페르시아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독자적 정체성을 지니고 있었고,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바람 속에서 ‘우리도 국가를 가질 수 있을까’라는 물음이 현실 정치로 떠오르는 상황이었다.

그 결과 1919년부터 1924년까지 술라이마니야를 중심으로 한 이른바 ‘쿠르드 왕국(Kingdom of Kurdistan)’이라는 자치적 정치 실험이 잠시 존재하게 된다. 이 국가는 셰이크 마흐무드 바르잔지(Sheikh Mahmud Barzanji)의 지도 아래 세워졌으며, 완전한 국제적 승인을 받은 독립국가는 아니었지만 영국의 묵인과 간접적인 지원 아래 일정한 자치 형태를 띠었다. 홀트가 정치장교로서 그곳에 파견된 것은 바로 이 복잡한 과도기적 상황을 관찰하고, 관리하며, 영국의 이익을 반영한 안정화를 모색하기 위한 임무의 일환이었다.

[2] ‘타이거 죽음의 행진이라는 이름은 공식 작전명이나 문서에서 등장하는 표현은 아니다. 이 명칭은 행군을 살아서 견뎌낸 생존자들의 기억 속에서 태어났다. 포로들을 통제하던 북한군 장교 가운데 특히 잔혹했던 한 인물은 포로들 사이에서 타이거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그의 실명이나 정확한 계급은 기록마다 다르지만, 폭력과 공포로 행군을 유지했다는 점만큼은 여러 증언에서 일관되게 반복된다. 낙오자는 처벌되었고, 멈추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

[3] 파테 뉴스(Pathé News)는 1910년부터 1970년까지 영국에서 활동한 뉴스릴과 다큐멘터리 제작사였다. 파테 뉴스의 설립자인 찰스 파테(Charles Pathé)는 무성 영화 시대에 영화의 선구자였다. 파테 뉴스 아카이브는 오늘날 브리티시 파테(British Pathé)로 알려져 있다. 뉴스 영화와 영화 모음집은 완전히 디지털화되어 있으며 온라인에서 이용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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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이어니언

    0
    4 days 전

    6.25 전쟁 얘기는 많이 들었어도 이 이야기는 처음 듣네요 글솜씨 덕에 집중해서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ㄴ 답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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