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영박물관엔 없는 이야기들

영국-프랑스 국경에서 시신이 발견된다면, 수사는 누가할까?

드라마《더 터널(The Tunnel)》을 통해 본 채널 터널, 그리고 두 나라가 바다 아래서 만나는 방식에 대하여

2026.10.03 | 조회 1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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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태준

바다 밑에도 국경은 있다. 파도 위에서는 보이지 않던 선이, 빛도 닿지 않는 터널 안에서는 두 나라를 나눈다. 사람들은 그 선을 지나며 바다를 건너고, 한 나라에서 다른 나라로 들어선다.

범죄 드라마 《더 터널(The Tunnel)》은 바로 그 경계에 시신 하나를 놓으며 시작한다. 영국과 프랑스를 잇는 해저 터널 한복판, 정확히 국경에 걸쳐 있는 시신이다. 영국 형사 칼 로벅과 프랑스 형사 엘리즈 바세르망이 현장으로 불려온다. 사건은 하나지만 이를 풀어야 하는 두 사람은 사뭇 다르다. 말하는 방식도, 단서를 해석하는 습관도, 타인과 거리를 좁히는 방법도 좀처럼 맞아떨어지지 않는다.

2013년 영국과 프랑스가 공동 제작한 이 드라마는 스칸디나비아의 《브릿지》를 원작으로 한다. 두 나라를 연결하는 공간에 사건을 놓고, 서로 다른 세계에 살던 사람들을 만나게 한다는 설정이다. 채널 터널을 배경으로 옮겨온 이 이야기가 흥미로운 것은, 그 공간 자체에 두 나라의 관계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영국과 프랑스는 바다 하나를 사이에 둔 이웃이다. 오랜 세월 서로를 의식하고 영향을 주고받았지만, 가까운 만큼 차이에도 민감했다. 터널은 그 사이를 이어놓았고, 드라마는 그 길 위에서 사람들이 얼마나 쉽게 엇갈리는지를 보여준다.

영국 켄트주의 폴크스턴과 프랑스 파드칼레주의 코켈을 잇는 채널 터널은 약 50킬로미터 길이다. 그중 37킬로미터가 바다 아래에 놓여 있다. 해저 구간의 길이로는 세계에서 가장 길다. 그러나 여행자에게 이 거대한 구조물은 대개 창밖이 어두워지는 잠깐의 시간으로 기억된다. 유로스타를 타면 런던에서 파리까지 빠르면 2시간 16분. 바다를 건너는 여정인데도 배에 오를 필요가 없고, 한 도시의 역에서 다른 도시의 역으로 이동하면 된다.

생각해보면 이상한 일이다. 섬을 떠나 대륙으로 들어가면서도 수평선 한 번 보지 못한다. 파도도, 바닷바람도 없다. 창밖의 풍경이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면 어느새 다른 나라다. 기술은 바다를 건너는 일을 이토록 평범하게 만들었다. 한때 사람들의 상상 속에만 있던 길이 이제는 열차 시간표의 한 줄이 됐다.

그 평범함을 얻기까지는 거의 두 세기가 걸렸다. 1802년 처음 구상이 제시됐고, 1994년에야 터널이 문을 열었다. 오늘날 두 시간 남짓의 여정 뒤에는 그토록 긴 시간이 쌓여 있다. 우리는 완성된 길을 너무도 자연스럽게 이용하기에, 한때 그 길이 없었다는 사실을 자주 잊는다.

《더 터널》의 두 형사는 이미 연결된 두 나라 사이에서 다시 서로에게 다가가는 법을 배운다. 함께 사건을 좇으며 상대의 말을 듣고, 낯선 판단을 받아들이고, 자신의 방식만으로는 풀리지 않는 문제를 마주한다. 바다 밑에 길이 생긴 뒤에도 사람 사이에는 건너야 할 거리가 남아 있는 셈이다. 기차는 국경을 단숨에 지나지만, 서로를 이해하는 일에는 조금 더 시간이 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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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 드라마 《더 터널(The Tunnel)》

 

바다가 방패였던 나라

 

영국을 이해하려면 그 나라를 둘러싼 바다부터 바라봐야 한다. 특히 유럽 대륙과 마주한 영국해협은 오랫동안 영국의 운명과 기질을 빚어왔다. 가장 좁은 도버 해협의 너비는 약 34킬로미터. 맑은 날이면 건너편 육지가 눈에 들어올 만큼 가까운 거리다. 그러나 눈으로 볼 수 있다는 것과 발을 디딜 수 있다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었다. 그 사이에 바다가 있었다.

영국에 이 바다는 오랫동안 방패였다. 1066년 노르망디의 윌리엄 공작은 해협을 건너 잉글랜드를 정복했지만, 훗날 나폴레옹과 히틀러는 같은 바다 앞에서 침공의 뜻을 이루지 못했다. 물론 바다가 모든 침입을 막아준 것은 아니다. 영국의 안전을 지탱한 것은 해협과 해군력, 그리고 시대마다 달라진 국제 정세였다. 그럼에도 대륙의 전쟁을 건너편에 두고 살아온 경험은 영국인들의 마음에 깊이 남았다. 바다는 그들에게 지리적 경계이자, 자신들이 대륙과는 다르다고 느끼게 하는 근거였다.

그러니 해협 아래로 터널을 뚫자는 제안은 단순한 교통시설의 구상으로 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여행자에게는 편리한 길이겠지만, 적에게도 길이 될 수 있었다. 오랫동안 자신들을 지켜준 거리를 스스로 허물어도 되는가. 터널을 둘러싼 논쟁의 밑바닥에는 그 질문이 놓여 있었다.

1802년 프랑스 공학자 알베르 마티유파비에는 영국해협 아래로 터널을 내고 말이 끄는 마차를 달리게 하자는 구상을 제시했다. 바다 밑 어둠을 등불로 밝히고, 그 길로 사람과 물자를 오가게 한다는 생각이었다. 오늘날의 눈으로 보면 소박하지만, 당시에는 두 나라 사이에 놓인 바다의 의미를 바꿔놓을 만한 발상이었다.

그러나 지도 위에 길을 그리는 일보다 어려운 것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그 길을 놓는 일이었다. 터널 구상은 이후 오랫동안 되살아났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19세기 후반에는 회사가 세워지고 시험 굴착도 진행됐다. 기술적으로 가능하다는 기대가 커질수록, 군사적 위험을 걱정하는 목소리도 높아졌다. 영국 군부는 터널이 침공로가 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바다 아래에서 뻗어나가던 길은 결국 1880년대에 멈춰 섰다.

약 한 세기 뒤에는 다른 문제가 길을 막았다. 1970년대 다시 추진된 사업은 비용과 재정 부담을 둘러싼 논란 끝에 1975년 영국 정부의 철수로 중단됐다. 한때는 나라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멈췄고, 이번에는 나라의 살림을 감당하기 위해 멈췄다. 바다를 건너려는 구상은 매번 육지 위의 사정에 발목이 잡혔다.

이 긴 지연을 모두 두려움의 탓으로 돌릴 수는 없다. 터널을 짓는 데에는 기술과 돈이 필요했고, 두 나라의 정치적 합의도 필요했다. 다만 그 역사를 따라가다 보면, 익숙한 안전을 내려놓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는 알 수 있다. 바다를 방패로 삼아온 나라에 터널은 새로운 길인 동시에, 오래된 믿음을 수정해야 하는 이유였다.

1994년 마침내 터널이 열렸을 때, 기차가 통과한 것은 바다 밑 암반만이 아니었다. 대륙과 떨어져 있어야 안전하다는 오랜 생각에도 하나의 통로가 생겼다. 영국은 여전히 섬이었지만, 이제 그 섬으로 들어가는 길은 바다 위에만 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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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베르 마티유파비에가 1802년에 구상한 영국해협 해저 터널의 마차 운행 계획도. 거대한 환기 굴뚝이 눈에 띈다. 출처: Unknown author - Der Kanaltunnel - Fakten und Zahlen, 1994, S. 22 uploaded by Opihuck (talk), Public Domain

 

캔터베리 대성당에서의 악수

 

멈춰 있던 이야기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1981년이었다. 마거릿 대처 영국 총리와 프랑수아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이 바다 아래 묻혀 있던 오래된 구상을 다시 꺼냈다.

두 사람은 정치적으로 가까운 사이가 아니었다. 대처는 시장의 힘을 믿는 보수주의자였고, 미테랑은 사회주의자였다. 국가와 시장의 역할을 두고 서로 다른 답을 가진 두 정상이, 해협을 잇는 길의 필요성에는 뜻을 모았다. 다만 대처에게는 분명한 조건이 있었다. 터널 건설에 영국 납세자의 돈을 쓰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두 나라가 길을 여는 데 합의하되, 그 길을 짓는 돈은 민간에서 마련해야 했다.

협상과 사업안 검토를 거쳐 1986년 2월 12일, 두 정상은 캔터베리 대성당에서 조약에 서명했다. 오랜 세월 영국 역사의 굴곡을 지켜본 대성당에서, 섬과 대륙을 연결하는 약속이 맺어졌다. 바다를 사이에 두고 서로를 경계해온 두 나라가 이제 그 아래에 함께 길을 놓기로 한 것이다.

사업을 맡은 유로터널에는 영국과 프랑스의 건설회사와 은행들이 참여했다. 정부가 건설비를 대거나 금융 보증을 제공하지 않는다는 원칙 아래, 자금은 대출과 주식 발행으로 모았다. 1987년 유로터널 주식이 시장에 나오자 개인 투자자들도 이 거대한 사업에 돈을 보탰다. 두 나라를 잇는다는 역사적 의미와 미래의 수익에 대한 기대가 겹쳐 있었다. 터널의 주인이 된다는 생각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그러나 길의 가치를 믿는 일과 그 길에서 수익을 얻는 일 사이에는, 당시 누구도 충분히 헤아리지 못한 거리가 있었다.

1987년 말 영국 쪽에서 굴착이 시작됐고, 이듬해 프랑스 쪽에서도 작업이 본격화됐다. 양쪽의 굴착기는 바다 밑 암반 속으로 들어가 서로를 향해 나아갔다. 지상에서는 한 장의 도면에 그려진 길이었지만, 지하에서는 매일 조금씩 파내야 하는 돌과 흙이었다.

터널은 세 갈래로 놓였다. 열차가 달리는 철도 터널 두 개 사이에 유지보수와 비상 대피를 위한 서비스 터널이 자리했다. 바다 밑을 지나는 약 37킬로미터의 길에는 승객이 보게 될 공간뿐 아니라, 그들이 무사히 지나가도록 지탱하는 공간도 필요했다.

굴착 과정에서 나온 암석과 흙은 영국 해안에 새로운 땅을 만들었다. 오늘날 샘파이어 호라고 불리는 곳이다. 바다 아래에서 꺼낸 땅이 바다 위에 자리를 잡았다. 터널은 두 나라 사이의 거리를 줄이는 동안, 해안의 모습까지 바꿔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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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공된 터널 경로를 따라 나타낸 지질 단면도. 터널은 대부분의 구간에서 백악질 이회암층을 통과한다. 출처: Commander Keane - Own work, CC BY-SA 4.0

1990년 12월 1일, 양쪽에서 파고들던 서비스 터널이 마침내 만났다. 영국의 굴착공 그레이엄 패그와 프랑스의 굴착공 필리프 코제트가 뚫린 벽 너머로 손을 내밀었다. 대성당에서 두 정상이 맺었던 약속이, 이번에는 바다 밑에서 두 노동자의 악수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 사진에는 거대한 사업의 규모를 잠시 잊게 하는 힘이 있다. 수많은 도면과 계산, 기계와 자본이 만들어낸 결과가 두 사람의 맞잡은 손으로 남았기 때문이다. 거의 두 세기 동안 구상으로만 존재했던 길이 그 순간에는 손을 뻗어 닿을 수 있는 거리가 됐다.

하지만 터널이 연결됐다고 해서 사업의 어려움까지 끝난 것은 아니었다. 굴착기가 나아가는 동안 비용도 불어났다. 안전 요구와 설계 변경, 공사 지연이 부담을 키웠고, 처음의 낙관적인 추산은 현실을 따라가지 못했다. 1985년 가격을 기준으로 약 26억 파운드로 예상했던 비용은 완공 시 약 46억 5천만 파운드에 이르렀다. 당초 예상보다 약 80퍼센트 늘어난 규모였다.

추가 자금을 마련할수록 부채의 무게도 커졌다. 한때 기대를 타고 올랐던 주가는 지연과 비용 초과 속에서 떨어졌다. 터널은 점차 완성돼 갔지만, 투자자들이 바라던 미래는 오히려 멀어지고 있었다. 공학적 성공과 재정적 성공이 같은 선로를 달리는 것은 아니었다.

공사 과정에서는 노동자 열 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중 여덟 명이 영국인이었다. 두 사람이 손을 맞잡은 사진은 널리 남았지만, 완성된 터널을 보지 못한 사람들의 이름은 그만큼 알려지지 않았다.

캔터베리의 서명과 바다 밑의 악수 사이에는 수년의 노동이 있었다. 그리고 그 악수와 개통 사이에도 빚과 손실, 죽음이 놓여 있었다. 오늘날 기차를 타고 잠깐의 어둠을 지나는 여행자는 그 시간을 좀처럼 느낄 수 없다. 열차가 매끄럽게 달릴수록, 그 길을 만드는 데 치른 대가는 창밖의 어둠 속으로 가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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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쪽 구간 굴착에 사용된 터널 굴착기 중 한 대. 출처: The original uploader was Tambo at Hungarian Wikipedia. - Transferred from hu.wikipedia to Commons by Tambo., CC BY-SA 3.0

 

바다 아래로 간 여왕

 

1994년 5월 6일,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기차를 타고 영국을 떠났다. 목적지는 프랑스였다. 배에 오르지도, 비행기를 타지도 않았다. 여왕을 태운 유로스타는 해협 아래로 들어갔고, 어둠을 지나 프랑스 쪽 코켈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파리에서 열차를 타고 온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이 기다리고 있었다.

두 정상의 만남은 바다 아래가 아니라 프랑스 땅 위에서 이뤄졌다. 그러나 그날의 역사적 의미는 여왕이 도착한 장소보다 그곳에 이른 방법에 있었다. 오랫동안 영국을 대륙과 갈라놓았던 바다를 이제 철도로 건널 수 있게 됐다. 지도에서 영국은 여전히 섬이었지만, 열차 시간표에서는 대륙의 도시들과 이어지기 시작했다.

개통식의 환호가 일상적인 여행으로 바뀐 것은 그해 11월이었다. 유로스타가 일반 승객을 태우고 런던 워털루역과 파리 북역 사이를 달리기 시작했다. 당시 소요 시간은 약 세 시간. 아침에 런던에서 출발하면 파리에서 점심을 먹을 수 있었다. 바다 건너 다른 나라의 수도가 하루 안에 다녀올 수 있는 곳이 됐다.

2007년 런던의 출발역이 세인트판크라스로 옮겨지고 영국 쪽 고속철도 구간이 완성되면서 여정은 더 짧아졌다. 런던에서 파리까지 빠르면 2시간 16분. 비행시간만 놓고 보면 항공편이 빠르지만, 여행은 비행기가 뜨고 내리는 순간에만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도심에서 공항으로 나가고, 수속을 밟고, 도착한 뒤 다시 시내로 들어오는 시간도 여행의 일부다. 유로스타에도 출입국 심사와 보안 검색은 있지만, 도심의 역에서 출발해 도심의 역에 내린다는 이점은 컸다.

한국에서 KTX를 타고 서울과 부산을 오가듯, 여행자들은 기차를 타고 런던과 파리, 브뤼셀 사이를 오갔다. 다른 점이 있다면 그 짧은 여정에 국경과 바다가 놓여 있다는 것이었다. 유로스타는 그 둘을 여행의 큰 고비에서 창밖이 잠시 어두워지는 구간으로 바꿔놓았다.

물론 여행자에게 편리한 길이 처음부터 투자자에게도 좋은 사업이었던 것은 아니다. 초기 이용객은 기대에 못 미쳤고, 터널 운영사 유로터널은 막대한 부채와 이자 부담에 시달렸다. 첫 온전한 영업연도였던 1995년에는 약 9억 2천500만 파운드의 손실을 기록했다. 개통식에서 두 정상이 나란히 웃던 모습과 주주들이 받아든 성적표 사이에는 큰 간극이 있었다.

터널의 쓸모는 그보다 느린 속도로 사람들의 생활에 자리 잡았다. 2013년 유로스타의 연간 이용객은 처음으로 1천만 명에 도달했다. 2018년에는 런던에서 암스테르담까지 가는 직통편이 운행을 시작했다. 개통 당시 소요 시간은 3시간 41분이었다. 해협 건너 프랑스와 벨기에로 이어지던 길이 네덜란드까지 뻗어갔다. 비행기를 대신할 철도 여행의 선택지도 그만큼 넓어졌다.

거대한 시설의 가치는 개통식 하루에 모두 드러나지 않는다. 누군가는 그 길로 출장을 가고, 누군가는 가족을 만나러 간다. 주말을 보내기 위해, 혹은 다른 도시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 위해 기차에 오른다. 그렇게 반복되는 평범한 여정 속에서 터널은 조금씩 제 몫을 찾았다.

1994년 여왕의 바다 밑 여행은 역사로 남았다. 그 뒤를 따른 수많은 사람의 여행은 대개 역사에 기록되지 않는다. 그러나 두 나라를 잇는 길을 일상의 일부로 만든 것은, 바로 그 이름 없는 승객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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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5월 7일, 샌들링역에서 출발한 319형 전동차가 채널 터널을 통과하는 특별 관광 운행에 나섰다. 채널 터널을 통과한 최초의 여객열차였다. 출처: 74009 - Flickr: 319008 at Sandling, CC BY-SA 2.0

 

홍차 한 잔을 둘러싼 협상

 

바다 아래로 길을 내는 데에는 거대한 굴착기와 막대한 자본이 필요했다. 그러나 그 길로 달릴 열차를 만드는 과정에서는 뜻밖에도 홍차 한 잔이 회의의 의제가 됐다.

유로스타 개발 관계자의 회고에 따르면, 섭씨 85도를 넘는 액체를 제한하는 규정 때문에 차를 제대로 우릴 수 있는지를 두고 회의가 열렸다.

수십 킬로미터의 해저 터널을 통과할 열차를 만드는 사람들이 찻물의 온도를 논의하는 모습은 언뜻 우스워 보인다. 하지만 승객에게 여행의 만족은 터널의 길이나 열차의 출력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자리에 앉아 받아든 차 한 잔에서도 자신이 익숙하게 여기는 맛과 온도를 기대한다. 설계도에는 작은 항목일지 몰라도, 일상에서는 쉽게 양보하기 어려운 문제였을 것이다.

국경을 넘는 열차를 만든다는 것은 이런 기대들을 한 객차 안에 담는 일이기도 했다. 한쪽에서 당연하게 여기는 것이 다른 쪽에서는 설명을 필요로 했다. 안전을 위한 기준과 좋은 차를 위한 기준이 같은 온도에 머물러 있지 않을 수도 있었다. 두 나라를 잇는다는 거창한 목표는 결국 이런 사소한 차이들을 하나씩 풀어가는 과정으로 구체화됐다.

초기 유로스타는 프랑스 고속철도 TGV를 기반으로 만들어졌다. 그렇다고 프랑스 열차를 그대로 영국에 들여놓으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영국과 프랑스, 벨기에의 철도망을 오가려면 서로 다른 전력 공급과 신호 체계에 대응해야 했다. 승강장의 높이도 달랐고, 긴 해저 터널을 지나는 데 필요한 안전 요건도 충족해야 했다. 한 나라 안에서 잘 달리던 열차가 국경 너머에서도 잘 달리려면, 익숙한 설계에 낯선 조건들을 받아들여야 했다.

터널은 땅속에서 이어졌지만, 철도는 지상에서도 계속 연결돼야 했다. 선로와 전력, 규정과 운영 방식이 맞물려야 비로소 승객을 태운 기차가 움직일 수 있었다. 두 나라 사이의 거리는 굴착기만으로 줄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언어 역시 그 길 위에 함께 올랐다. 열차 안에서는 영어와 프랑스어가 흐르고, 노선에 따라 네덜란드어도 들린다. 같은 도착 안내가 다른 말로 반복되는 동안, 승객은 자신이 여러 언어의 생활권을 지나고 있음을 느낀다. 누구에게는 익숙한 말이 누군가에게는 잠시 기다려야 이해할 수 있는 말이다. 국제열차 안에서는 자신의 언어가 끝난 뒤에도 안내 방송이 계속된다.

바다의 이름부터 두 나라는 달랐다. 영국에서는 ‘잉글리시 채널’, 프랑스에서는 ‘라 망슈’다. 망슈는 소매라는 뜻이다. 한쪽은 이름에 잉글랜드를 담았고, 다른 쪽은 바다의 모양을 떠올렸다. 터널도 영어로는 ‘채널 터널’, 프랑스어로는 ‘튀넬 수 라 망슈’, 곧 망슈 아래의 터널이다.

이름이 다르다고 해서 서로 다른 바다가 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같은 바다를 바라보는 자리와 그 바다를 기억하는 방식이 다르다는 사실은 남는다. 터널이 생긴 뒤에도 두 나라는 각자의 이름으로 그 길을 부른다. 연결은 한쪽의 말을 다른 쪽의 말로 바꾸는 일이 아니었다.

그 점에서 홍차 한 잔을 둘러싼 회의는 이 거대한 사업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두 나라가 함께 쓸 길을 만들려면 상대의 사소한 고집까지 들여다봐야 했다. 바다 아래의 암반을 뚫고 난 뒤에도, 식지 않은 차 한 잔을 내놓기 위해 풀어야 할 문제가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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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채널 터널에 대한 두려움을 묘사한 1885년경 미국의 풍자 만화. 터널 건설에 강하게 반대했던 울즐리 장군이 도망치는 사자의 등에 올라타 있다. 출처: Friedrich Graetz - Self-scanned. Lebensdaten des Graphikers gemäß den Angaben der American Library of Congress, https://www.loc.gov/search/?in=&q=F.+Graetz&new=true&st=, Public Domain

 

이어진 길, 남아 있는 거리

 

1990년 바다 밑에서 프랑스 굴착공과 손을 맞잡았던 그레이엄 패그는 훗날 뜻밖의 말을 했다. 2019년 AFP와의 인터뷰에서였다.

“저는 채널 터널 공사에 참여했고, 터널을 관통하는 순간에도 함께했습니다. 하지만 브렉시트에는 찬성표를 던졌습니다.”

영국과 프랑스를 잇는 길을 직접 만든 사람이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에 찬성했다. 언뜻 모순처럼 들린다. 그러나 패그에게 대륙으로 가는 길을 만드는 일과 유럽연합의 일원으로 남는 일은 서로 다른 선택이었을 것이다. 터널 건설에 참여했다는 자부심이 반드시 정치적 통합에 대한 지지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의 말은 채널 터널을 바라보는 우리의 기대를 돌아보게 한다. 길이 생기면 교류가 늘어나고, 교류가 늘어나면 서로 가까워질 것이라는 기대다. 실제로 터널은 수많은 사람을 실어 날랐고, 두 나라 사이의 여행을 일상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오가는 사람이 많아졌다고 해서 국경의 의미까지 옅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2016년 브렉시트 국민투표 이후 영국과 유럽연합의 관계는 다시 그려졌다. 터널은 그대로였지만, 그 길을 이용하는 조건은 달라졌다. 영국 여권 소지자에 대한 추가 심사는 역에서 보내는 시간을 늘렸다. 2022년 유로스타 경영진은 브렉시트 이후 국경 검사로 런던 세인트판크라스역의 최대 승객 처리 능력이 약 30퍼센트 줄었다고 밝혔다. 열차에 자리가 있어도 승객을 모두 태우기 어려운 상황이 생겼다.

바다 밑의 길은 막히지 않았다. 대신 그 길로 들어가는 문이 좁아졌다. 거의 두 세기에 걸쳐 물리적 거리를 줄여놓은 곳에 정치가 다시 시간을 보탠 셈이다.

코로나19 팬데믹은 연결의 취약함을 다른 방식으로 드러냈다. 국경을 넘는 이동이 제한되자 열차에서 승객이 사라졌고, 유로스타는 생존을 걱정해야 했다. 선로가 이어져 있다는 사실만으로 사람들의 왕래가 보장되지는 않았다. 터널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굴착 기술이나 열차의 성능뿐 아니라, 국경을 열어두려는 결정과 그 너머로 가려는 사람들의 의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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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비스 통로에서 바라본 터널의 중간 지점. 출처: This file comes from Jaguar Cars Middle East and North Africa official Flickr.This tag does not indicate the copyright status of the attached work. A normal copyright tag is still required. See Commons:Licensing. - JAGUAR CHARGES THROUGH CHANNEL TUNNEL FOR CROSS-CONTINENT I-PACE DRIVE, CC BY 2.0

이제 다시 《더 터널》의 두 형사에게 돌아가 보자.

칼 로벅은 사람의 표정과 말 사이에서 단서를 찾고, 엘리즈 바세르망은 사실과 논리의 순서를 좇는다. 함께 사건을 풀어야 하지만 상대의 판단이 좀처럼 이해되지 않는 순간들이 있다. 그렇다고 두 사람을 각각 영국과 프랑스의 전형으로 읽을 필요는 없다. 그들의 마찰이 보여주는 것은 더 넓고 익숙한 문제다. 같은 목적을 가진 사람들도 그곳에 이르는 방법은 다를 수 있다는 것.

두 형사는 상대가 자신과 같아질 때까지 기다릴 수 없다. 사건은 진행되고, 다음 판단을 내려야 한다. 때로는 설명하고, 때로는 물러서고, 때로는 납득하지 못한 채 함께 움직인다. 그 과정에서 협력은 한 번의 합의로 완성되는 일이 아니라 매번 이어가야 하는 일이 된다.

유로스타를 타고 해협을 건너는 동안 승객은 잠시 창밖의 풍경을 잃는다. 켄트의 들판이 사라지고, 유리창에는 객실과 사람들의 얼굴이 비친다. 바다 아래를 지나는 약 20분 동안 국경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다 다시 빛이 들어오면 프랑스의 들판이다. 기차는 그사이 한 나라를 떠나 다른 나라에 들어와 있다.

채널 터널은 이 짧은 어둠을 만들기 위해 오랜 시간을 견뎠다. 두려움과 협상, 노동과 손실을 거쳐 바다 아래에 길을 놓았다. 그러나 그 길이 생긴 뒤에도 두 나라는 서로를 이해할 책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오히려 더 자주 만나게 된 만큼, 차이를 마주할 일도 많아졌다.

드라마의 첫 장면에서 두 형사는 국경에 걸친 시신 앞에 선다. 어느 한쪽의 방식만으로는 풀 수 없는 사건이다. 터널의 역사도 그 장면과 닮아 있다. 서로 다른 두 나라가 함께 만든 길을 앞으로 어떻게 쓸 것인지는 어느 한쪽이 혼자 결정할 수 없다.

열차는 오늘도 바다 아래를 지난다. 어둠의 끝에는 다른 나라의 빛이 있다. 그곳으로 가는 길은 이미 열려 있다. 남은 것은 그 길을 건넌 뒤, 서로를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 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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