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 다섯 살 소년이 나가사키를 떠났다.
해양학자인 아버지가 영국 정부의 초청을 받아 국립해양학연구소에서 연구하게 된 것이 계기였다. 처음에는 잠시 머물다 돌아올 생각이었다. 일 년, 길어야 이 년. 가족은 머지않아 고향으로 돌아가리라 믿으며 짐을 꾸렸다. 어머니는 아들에게 일본어를 가르치고 일본의 풍습을 익히게 했다. 낯선 땅에서도 일본인으로 자라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그러나 영국에서의 생활은 해를 넘기고 또 넘겼다. 가족은 끝내 일본으로 돌아가지 않았고, 소년은 서리주 길퍼드에서 영국의 말과 풍경을 익히며 자랐다. 고향 나가사키는 바다 건너 먼 곳에 남아, 어린 시절의 기억 속에서 조금씩 다른 모습을 띠어갔다.
가즈오 이시구로(Kazuo Ishiguro, 1954~)의 이야기.
2017년, 스웨덴 한림원은 그에게 노벨 문학상을 수여하며 “거대한 감정적 힘을 가진 소설들을 통해 세계와의 연결이라는 우리의 환상적인 감각 아래에 숨겨진 심연을 폭로한 작가”라고 평했다. 나가사키에서 태어나 영어로 소설을 써온 그는 런던의 자택에서 수상 소식을 들었다.
당시 아흔한 살의 어머니는 요양원에 머물고 있었다. 아들이 전화를 걸어 소식을 전하자, 어머니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는 네가 언젠가는 받을 거라고 항상 생각했단다.”
어머니는 2019년 세상을 떠났다. 어린 아들이 고향의 말과 풍습을 잊지 않도록 애썼던 어머니에게, 이시구로는 『클라라와 태양』을 헌정했다.
2017년 12월 6일 스톡홀름에서 열린 기자회견에 참석한 가즈오 이시구로. 출처: Frankie Fouganthin - Own work, CC BY-SA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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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부터 소설가를 꿈꾼 것은 아니었다. 그가 마음을 두었던 것은 음악이었다. 기타를 치고 노래를 쓰며, 언젠가는 곡을 만드는 일로 살아가리라 생각했다. 켄트 대학교에서 영문학과 철학을 공부하는 동안에도, 졸업 후 런던의 노숙자 지원 단체에서 일할 때에도 그 꿈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삶의 방향이 달라지기 시작한 것은 1979년이었다. 이시구로는 이스트 앵글리아 대학교의 창작 석사 과정에 지원했다. 당시 영국에서 창작을 정식 학위 과정으로 가르치는 대학은 그곳이 유일했다. 그곳에서 그는 앤절라 카터를 스승으로 만났다.
『피로 물든 방』의 작가이자 페미니즘 고딕 문학의 선구자인 카터는 그의 초기 습작에서 가능성을 읽어냈다. 아직 뚜렷한 모습을 갖추지 못한 이야기들에 귀를 기울였고, 이시구로는 그 곁에서 자신의 문장을 찾아갔다. 노래를 쓰던 청년의 이야기는 그렇게 조금씩 소설의 형태를 얻었다.
석사 논문으로 제출한 원고는 출판사 페이버 앤드 페이버의 눈에 들었다. 출판사는 그에게 선금 1,000파운드를 제안했다. 그 원고가 1982년 첫 소설 『창백한 언덕의 풍경』으로 세상에 나왔다.
그리고 1989년, 이시구로는 세 번째 소설 『남아 있는 나날』로 부커상을 받았다. 평생을 봉사와 절제 속에 살아온 영국인 집사 스티븐스의 이야기였다.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한 감정과 뒤늦게 돌아본 삶의 풍경을, 나가사키에서 건너온 소년이 영어로 써 내려간 것이다.

이시구로에게 부커상을 안겨준 『남아 있는 나날』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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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구로가 문단에 첫발을 내디딘 1980년대 초, 영국 문학은 자신을 둘러싼 경계를 새롭게 돌아보고 있었다.
1981년, 살만 루슈디의 『한밤의 아이들』이 부커상을 받았다. 인도에서 태어난 작가가 영어로 풀어낸 인도 독립의 이야기가 영국 문학계의 가장 권위 있는 상 가운데 하나를 거머쥔 것이다. 그 수상은 한 작가의 성공을 넘어 오래된 질문을 다시 꺼내놓았다. 영국 문학은 어디까지를 품을 수 있는가. 그리고 누가 영국 작가인가.
이시구로는 훗날 루슈디의 성공이 자신의 데뷔를 가능하게 한 토대를 마련했다고 회고했다. 루슈디가 열어놓은 문을 통해 자신도 들어설 수 있었다는 뜻이었다. 서로 다른 문화가 영국 사회 안에서 자리를 넓혀가던 시절, 문학에서도 새로운 목소리들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바다를 건너온 사람들과 그 자녀들이 자신의 기억과 언어를 안고 영국 문학의 중심으로 걸어 들어왔다.
이 변화는 한 시기에 시작해 끝난 것이 아니었다. 트리니다드 출신의 V. S. 나이폴은 이미 그보다 앞서 식민지의 경험과 이주자의 불안을 영어로 써오고 있었다. 그의 작품 세계는 훗날 2001년 노벨 문학상으로 이어졌다. 파키스탄 출신 아버지와 영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하니프 쿠레이시는 1990년 『교외의 부처』를 통해 영국 아시아계의 삶과 정체성을 문학의 전면에 펼쳐 보였다. 그리고 2000년, 영국인 아버지와 자메이카 출신 어머니를 둔 재디 스미스는 첫 소설 『하얀 이빨』에서 서로 다른 뿌리를 지닌 사람들이 뒤섞여 살아가는 런던을 생생하게 그려냈다.
이들은 서로 다른 곳에서 출발했고, 저마다 다른 이야기를 썼다. 그러나 그들의 작품이 넓혀놓은 자리에는 공통점이 있었다. 하나의 얼굴, 하나의 기억으로 설명되던 ‘영국성’에 틈을 내고, 그 안에 수많은 삶과 목소리가 깃들어 있음을 드러낸 것이다.
제국의 역사와 이주의 길을 따라 영국에 닿은 기억들은 이제 영어로 쓰이고 읽혔다. 그 이야기들이 쌓일수록 영국 문학의 풍경도 달라졌다. 한때 먼 곳의 이야기로 여겨졌던 삶들이, 영국이 자신을 이해하는 데 빠뜨릴 수 없는 일부가 되어갔다.
2005년 촬영된 살만 루슈디의 강연 모습. 출처: Ken Conley aka kwc - https://www.flickr.com/photos/kwc/49232596/, CC BY-SA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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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시구로는 이 계보 안에서도 조금 다른 자리에 서 있다.
루슈디가 인도 독립의 역사를, 쿠레이시가 영국 아시아계의 삶을, 스미스가 여러 문화가 뒤섞인 런던을 그렸다면, 이시구로는 이민과 정체성의 문제에 보다 우회적인 길로 다가갔다. 초기 소설에서는 일본을 배경으로 기억과 상실을 탐구했지만, 이후 그의 이야기를 이끌어간 것은 영국인 집사와 복제 인간, 그리고 인간의 곁에 머물도록 만들어진 로봇 친구였다. 서로 다른 시대와 세계를 살아가는 존재들을 통해 그는 인간이 무엇을 믿고, 무엇을 그리워하며, 무엇을 끝내 놓지 못하는지 물었다.
그의 문학은 ‘이민자 작가’라는 이름만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영국 문학의 전통을 깊이 받아들이면서도, 그 안에 낯선 거리감과 자신만의 감수성을 스며들게 했기 때문이다. 어떤 세계에 속해 있으면서도 그 세계를 조금 떨어져 바라보는 시선. 익숙한 풍경 속에서 다른 이들이 지나치는 틈을 발견하는 눈이다.
클라라의 시선에서도 그 감수성을 읽을 수 있다. 그녀는 상점 진열창 너머로 거리를 바라본다. 인간의 행동을 살피고, 그 마음을 이해하려 애쓰며, 작은 몸짓과 빛의 변화 속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한다. 그러나 인간의 삶을 그토록 가까이 들여다보면서도, 그들과 같은 존재가 될 수는 없다. 그 거리 때문에 오히려 더 선명하게 보이는 것들이 있다. 인간에게는 너무 익숙해 잊힌 다정함과 두려움, 사랑받고 싶은 마음 같은 것들이다.
클라라를 이시구로 자신의 모습과 겹쳐 읽게 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한 세계 안에서 살아가되, 그 세계를 바라보는 또 하나의 시선을 간직한 존재라는 점에서다.
2010년 영화 『네버 렛 미 고』 출연진과 함께한 가즈오 이시구로. 출처: Bex.Walton - Originally posted to Flickr as Mark Romanek, Kazuo Ishiguro and some of the Never Let Me Go cast, CC BY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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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이시구로는 영국으로 떠난 뒤 처음으로 일본을 다시 찾았다. 스물아홉 해 만의 귀환이었다. 다섯 살에 떠났던 나가사키에 돌아온 그는 이제 서른다섯 살의 어른이었다. 눈앞의 도시는 어린 시절의 기억 속에 남아 있던 곳과 달랐다. 오랜 세월 마음속에 간직해온 고향과 실제의 고향 사이에는, 쉽게 메울 수 없는 거리가 놓여 있었다.
그 거리는 그의 소설을 읽는 하나의 실마리가 된다. 이시구로의 인물들은 거듭 어딘가에 속하기를 바란다. 누군가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어 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자리를 지키려 애쓴다. 그러나 그 마음이 깊어질수록 정작 자신의 욕망과 슬픔에는 눈을 감기도 한다.
스티븐스는 완벽한 집사가 되려는 마음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가능성을 흘려보낸다. 복제 인간들은 자신들의 미래를 허락하지 않는 세계에서 사랑과 삶의 의미를 찾는다. 클라라는 인간과 다른 존재로서, 조시를 지키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기울인다. 그들의 헌신에는 다정함이 있고, 그 다정함 곁에는 자신을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슬픔이 머문다.
나가사키를 떠난 다섯 살 소년이 영국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가 되기까지 수십 년이 흘렀다. 그동안 영국 문학도 이시구로와, 서로 다른 뿌리를 지닌 작가들의 이야기를 받아들이며 넓어졌다. 영국을 말하는 목소리는 더 많아졌고, 어디에도 온전히 속하지 못하는 삶 역시 그 문학의 한가운데 자리를 얻었다.
클라라는 진열창 안에서 세상을 바라본다. 유리 한 장을 사이에 두고 인간의 삶은 가까이 있으면서도 멀다. 그녀의 시선이 그토록 세심하고 따뜻한 까닭은, 어쩌면 그 거리에 있을 것이다. 가까이 다가가고 싶은 마음과 끝내 남아 있는 간격 사이에서만 보이는 것들이 있다.
함께 생각해볼 질문들
- 이시구로는 일본인도, 완전한 영국인도 아닌 '사이'의 감각을 평생 품고 살아왔다. 그 불완전한 귀속감이 오히려 그의 문학적 강점이 되었다. 당신의 삶에서 어딘가에 완전히 속하지 못한다는 감각이 오히려 더 넓은 시각을 가져다준 경험이 있는가.
- 루슈디, 이시구로, 쿠레이시, 스미스 같은 이민자 출신 작가들이 영국 문학을 풍요롭게 했다는 것은 이제 널리 받아들여지는 사실이다. 하지만 이 작가들이 '이민자 작가'로 먼저 분류되는 것이 그들의 문학을 오히려 제한하는 측면은 없는가. 작가의 출신과 작품을 어떻게 연결하고, 어떻게 분리해야 하는가.
- 클라라는 인간의 세계를 관찰하지만 그 세계의 완전한 일원이 아니다. 이시구로는 영국 문학을 쓰지만 완전한 영국인이 아니다. 이 유사한 위치가 만들어내는 시선의 특성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바깥에서 바라보는 눈이 안에서 바라보는 눈보다 더 정확하게 볼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함께 들으면 좋은 음악
- Radiohead — 'Creep' (1992) "나는 여기에 속하지 않아." 옥스퍼드 출신의 라디오헤드가 만든 이 곡은 이시구로의 '사이' 감각을 음악으로 표현한 것처럼 들린다. 하지만 그 감각이 단순한 고통이 아니라 관찰의 힘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이시구로의 문학이 보여준다. 두 번째로 들을 때 그 가능성을 생각하며 듣기를 권한다.
다음 화 예고
소설 속 조시의 아버지 폴은 한때 공장에서 일했다. 그러나 이제 그의 자리는 기계가 차지하고 있다. 일터를 잃은 그는 도시를 떠나 사회의 가장자리에서 살아간다.
소설은 그의 삶에 오래 머물지 않는다. 하지만 짧게 드러나는 그의 처지는 이 세계의 질서를 짐작하게 한다. 클라라 같은 인공 친구가 상품으로 팔리고, 아이들은 더 나은 미래를 얻기 위해 ‘향상’을 받는다. 향상받지 못한 아이들에게는 좋은 학교로 향하는 길마저 좁아진다. 기술이 넓혀놓은 가능성 곁에서, 그 가능성을 누릴 수 있는 사람과 밀려나는 사람 사이의 거리는 깊어진다. 폴의 잃어버린 일자리는 그 균열의 한쪽에 놓여 있다.
이 풍경은 먼 미래에만 속한 것이 아니다.
영국에서는 이미 두 세기 전, 기계와 생계가 격렬하게 맞부딪쳤다. 1811년, 잉글랜드 중부와 북부의 직물 노동자들이 기계를 부수기 시작했다. 훗날 러다이트라 불리게 된 사람들이다. 그들의 저항을 기술에 대한 두려움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기계가 도입되는 방식과 그로 인해 무너지는 생계, 자신들의 노동을 둘러싼 질서가 저항의 중심에 있었다. 영국 정부는 기계 파괴를 사형에 처할 수 있는 중죄로 규정하며 이들을 진압했다. 산업혁명은 계속됐고, 노동자들은 달라진 세계에서 살아갈 길을 찾아야 했다.
다음화에서는 러다이트의 저항에서 출발해 탈산업화의 시대를 지나, 오늘날 AI 자동화가 노동에 던지는 질문까지 따라간다. 영국은 거듭 찾아온 이 충돌을 어떻게 감당했는가. 변화의 대가는 누구에게 가장 무겁게 돌아갔는가.
그 역사를 돌아보면 폴의 실직도 다르게 보인다. 일자리를 잃고 도시를 떠난 삶을 한 개인의 실패로만 읽을 수는 없게 된다. 그의 뒤에는 기술이 일터를 바꿀 때마다 삶의 터전을 다시 찾아야 했던 수많은 사람이 서 있다.
클라라의 눈에 폴은 쉽게 이해되지 않는 인물이다. 그러나 독자는 그녀가 미처 헤아리지 못한 삶의 무게를 짐작한다. 그 무게를 알아차리는 순간, 소설 속 미래는 우리가 지나온 역사와 맞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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