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9월 6일 일요일 밤, 잉글랜드 남부의 항구도시 포츠머스에서는 평소와는 사뭇 다른 풍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200명이 넘는 시위대가 항구로 이어지는 도로를 가로막은 것은 RNLI(왕립구명정협회)의 구명정이 영국해협을 건너온 소형 선박의 탑승자 약 120명을 부두에 내려놓은 직후였다. 거친 바다에서 사람들을 구조해 육지까지 무사히 데려온 승조원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감사나 안도의 인사가 아니었다. 어둠 속에 모여든 시위대는 구명정을 향해 분노를 쏟아냈고, 그들의 목소리는 항구 일대를 날카롭게 갈랐다.
“반역자!”
그 한마디에는 구조 활동을 바라보는 영국 사회의 뒤틀린 시선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시위대가 좀처럼 물러나지 않으면서 포츠머스 RNLI 기지는 몇 시간 동안 사실상 봉쇄됐고, 육지로 돌아온 자원봉사 승조원들은 자신들이 근무하는 기지 안에 고립된 채 상황이 진정되기를 기다려야 했다.
위협은 항구 밖에서도 이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승조원들의 이름과 사진이 온라인에 퍼지기 시작했는데, 특정인의 신원을 공개해 공격과 괴롭힘의 표적으로 만드는 이른바 ‘신상털기(doxing)’였다. 바다에서 낯선 이들의 생명을 구했다는 이유로 얼굴과 이름이 세상에 내걸린 봉사자들은 이후 공공장소에서 RNLI 로고가 새겨진 옷을 입지 말라는 조언까지 받아야 했다. 오랫동안 자부심의 상징이었던 구명정협회의 문양이 어느새 그들의 안전을 위협할 수 있는 표식이 돼버린 것이다.
그러나 며칠 뒤 벌어진 일은 더욱 충격적이었다. 사우샘프턴 선박교통서비스와 포츠머스 해군항 사령관은 누구나 들을 수 있는 개방 해상 무선 주파수를 통해 RNLI 구명정의 입항을 허용하지 않겠다고 방송했다. 단순한 입항 거부에 그치지 않고, 구명정이 경고를 무시한 채 항구 진입을 강행할 경우 승조원들을 직접 형사 소추하겠다는 위협까지 뒤따랐다. 바다에서 임무를 마치고 돌아온 구명정들은 결국 익숙한 포츠머스 항구에 닻을 내리지 못한 채 이스트니(Eastney)로 향해야 했다.
도대체 RNLI는 어떤 단체이기에 이런 거센 분노와 증오의 한가운데 놓이게 된 것일까. 그리고 바다에서 생명을 구하는 일이 어쩌다 한 사회의 가장 첨예한 갈등을 드러내는 행위가 돼버린 것일까.

RNLI의 아룬급 구명정
202년 역사의 자선단체
1822년, 아일랜드해 한가운데 자리한 맨섬(Isle of Man)의 더글러스 항구에서 윌리엄 힐러리 경(Sir William Hillary)은 또 한 척의 배가 난파되는 모습을 지켜봤다. 거센 파도에 휩쓸린 배와 그 안에서 구조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모습은 그에게 낯선 광경이 아니었다. 맨섬에 살며 이미 수십 차례의 난파 사고를 목격한 그는, 바다에서 위기에 처한 이들을 구하는 일을 더 이상 우연히 그 자리에 있던 이들의 용기나 선의에만 맡겨둘 수 없다고 생각했다.
힐러리는 먼저 영국 정부에 전국적인 해상 구조 조직을 만들어 달라고 호소했지만, 해군부는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뜻을 접지는 않았다. 그는 시선을 민간으로 돌려 자선가와 영향력 있는 인사들을 설득하기 시작했고, 마침내 1824년 3월 4일 런던 비숍게이트의 런던 태번에 30명이 넘는 신사가 모였다. 이들은 영국 해안에서 난파 사고를 당한 사람들의 생명을 구하기 위한 전국적 기구를 설립한다는 문서에 서명했고, 국왕 조지 4세도 새 단체의 후원자로 이름을 올렸다.
그렇게 RNLI의 역사가 시작됐다. 한 사람이 바다에서 되풀이되는 죽음을 더는 외면할 수 없다는 생각으로 첫발을 내디딘 지, 올해로 202년이 흘렀다.
오늘날 RNLI는 영국과 아일랜드 해안의 238개 스테이션에서 구명정 함대를 운영하는 세계 최대 규모의 해상 구조 자선단체로 성장했다. 8,800명이 넘는 자원봉사자가 그 배를 움직이며, 연간 예산은 1억7천만 파운드에 이른다. 그러나 이 막대한 조직을 지탱하는 것은 정부의 재정 지원이 아니다. 운영 자금의 97퍼센트가 평범한 시민들이 내놓은 기부금과 세상을 떠난 이들이 유언으로 남긴 유산에서 나온다. 1824년 창립 이후 RNLI가 바다에서 구해낸 생명은 14만6천 명을 넘어섰다.
영국인들에게 RNLI는 오래전부터 단순한 자선단체 이상의 존재였다. 바다와 함께 살아온 섬나라의 역사, 위험에 빠진 사람을 외면하지 않는 공동체의 윤리, 그리고 국가의 명령이나 보상 없이도 기꺼이 타인을 위해 나서는 자원봉사의 전통이 그 이름 안에 겹겹이 쌓여 있었다.
구명정에 오르는 이들 역시 특별한 영웅으로 태어난 사람들이 아니다. 평소에는 고기를 잡는 마을 어부이고, 교단을 떠난 퇴직 교사이며, 동네 슈퍼마켓에서 일하는 직원이다. 이들은 생업을 마치면 지역 RNLI 스테이션에서 구조 훈련을 받고, 언제 울릴지 모르는 비상 연락을 기다린다. 한밤중이든 새벽이든, 바다가 폭풍에 뒤집히든 짙은 안개에 잠기든 중요하지 않다. 구조 요청이 들어오면 하던 일을 멈추고 구명정에 오른다. 바다 위에서 도움을 청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어디에서 왔는지, 어떤 자격으로 그곳에 있는지를 먼저 묻지 않은 채.
RNLI 창립 150주년을 기념해 1974년에 발행된 우표. 밸리코튼 구명정 ‘RNLB 메리 스탠퍼드’호가 던트 등대선 선원들을 구조하는 모습을 담았다. 출처: Oil paining by Bernard Finnigan Gribble - http://freepages.genealogy.rootsweb.ancestry.com/~nrg1/Stamps%20etc.html, FAL
논란의 씨앗
RNLI를 둘러싼 논란의 씨앗이 본격적으로 뿌려진 것은 2018년 무렵이었다. 영국해협을 소형 선박에 의지해 건너는 이주민의 수가 빠르게 늘어나면서, 오랫동안 어선과 요트, 여객선의 조난 현장으로 향하던 RNLI 구명정은 이전과는 다른 종류의 구조 요청을 받기 시작했다. 바다 한가운데에서 엔진이 멈추거나 침수된 고무보트, 정원을 훨씬 넘긴 채 위태롭게 떠 있는 작은 배들이 새로운 구조 현장이 됐다.
절차 자체는 분명했다. 영국 해안경비대가 접수된 신고와 현장 상황을 토대로 조난 여부를 판단한 뒤 RNLI에 출동을 요청하면, 구명정은 지시에 따라 바다로 나간다. 국적이나 체류 자격을 가리는 것은 RNLI의 임무가 아니다. 구조된 사람들이 육지에 도착한 이후의 신원 확인과 입국 절차, 체류 여부에 관한 판단은 국경수비대(Border Force)와 이민 당국의 몫이다. RNLI의 역할은 그보다 앞선 지점, 사람이 아직 바다 위에서 생사의 경계에 놓여 있는 순간에 시작되고 끝난다.
RNLI가 공개한 통계를 살펴보면, 소형 선박 구조가 전체 활동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흔히 짐작하는 것만큼 크지 않다. 2025년 RNLI 구명정은 영국과 아일랜드 전역에서 모두 9,058차례 출동했으며, 그 가운데 영국해협의 소형 선박과 관련된 출동은 109차례로 전체의 약 1.2퍼센트였다. 2024년에도 RNLI가 구조에 관여한 사람은 영국해협을 건넌 전체 인원의 3.7퍼센트에 그쳤고, 나머지 대부분은 국경수비대와 다른 정부 기관이 담당했다.
그러나 이 논쟁을 움직인 것은 숫자의 크고 작음이 아니었다. RNLI의 구명정이 몇 차례 출동했고, 전체 도하 인원 가운데 몇 퍼센트를 구조했는가보다 훨씬 근본적인 질문이 그 아래 놓여 있었다. 바다에서 사람을 살리는 행위는 어디까지 순수한 구조로 남을 수 있으며, 그 구조가 의도하지 않은 결과까지 불러온다면 구조자의 책임은 어디까지인가라는 질문이었다.
RNLI의 D급 연안 구명정(ILB). 출처: Geof Sheppard - Own work, CC BY-SA 4.0
RNLI를 비판하는 이들도 해상 구조 자체가 불법이라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바다에서 조난당한 사람을 구조하는 것은 영국 국내법뿐 아니라 국제해양법이 부과하는 의무이기도 하다. 이들의 주장은 다른 곳을 향한다. RNLI가 영국해협의 이주민들을 구조해 영국 땅으로 데려오는 행위가 결과적으로 비정규 이주를 더욱 수월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프랑스 해안을 떠나는 사람들이 영국 해역에 다다르기만 하면 RNLI나 영국 당국의 구조를 받을 수 있다고 기대한다면, 구명정의 존재 자체가 위험한 도하를 결심하게 만드는 하나의 유인이 될 수 있다는 논리다. RNLI는 눈앞의 생명을 구하고 있을 뿐이지만, 그 구조가 다시 다음 배의 출항을 부추기는 신호로 읽힐 수 있다는 것이 비판론자들의 시각이었다. 이들에게 구명정은 더 이상 바다 위의 중립적인 구조선이 아니라, 영국의 이민 통제 체계에 난 틈을 메우며 결과적으로 사람들을 영국까지 실어 나르는 존재로 보이기 시작했다.
한 기부자는 이러한 불편한 감정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그들이 생명을 구하고 있다는 것은 맞다. 그러나 동시에 잘못된 신호를 보내고 있다. 나는 더 이상 이 단체에 기부하고 싶지 않다.”
오랫동안 RNLI를 지탱해 온 기부자들 사이에서 후원을 취소하겠다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고, 소셜미디어에서는 RNLI를 ‘이민자 택시 서비스’라고 조롱하는 표현이 빠르게 퍼져 나갔다. 일부 비판론자들은 한발 더 나아가 이 단체가 단순히 이민자들을 구조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결과적으로 ‘불법 활동을 조장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수백 년 가까이 바다에서 사람을 살려온 구명정은 그렇게 영국 사회를 갈라놓은 이민 논쟁의 한가운데로 끌려 들어갔다.
이 갈등의 밑바닥에는 더욱 복잡한 문제가 놓여 있었다. RNLI는 정부 예산이 아니라 시민들의 자발적인 기부와 유산으로 운영되는 독립 자선단체다. 바로 그 독립성과 시민적 연대가 오랫동안 RNLI의 자부심이었지만, 이제는 역설적으로 논란을 더욱 첨예하게 만드는 요인이 됐다.
일부 기부자들은 자신들이 평생 모은 돈과 선의로 건넨 후원금이, 영국 사회가 해결해야 한다고 여기는 비정규 이주 문제를 오히려 떠받치는 데 쓰이고 있다고 느끼기 시작했다. RNLI의 관점에서 그 돈은 바다에서 생명을 구하는 데 사용되고 있었지만, 기부자들의 눈에는 자신이 동의하지 않는 이민 정책의 빈틈을 메우는 데 쓰이는 것처럼 비쳤다. 같은 구명정과 같은 구조 활동을 바라보면서도 한쪽은 인간의 생명을 지키는 원칙을 보았고, 다른 한쪽은 통제되지 않는 국경을 보았다.
자신의 기부금이 자신이 바라지 않는 방향으로 쓰이고 있다는 감정은 단순한 불만에 머물지 않는다. 시민의 신뢰와 자발적인 후원으로 존속하는 자선단체에 기부자의 이탈은 곧 조직의 뿌리가 흔들리고 있다는 신호가 될 수밖에 없다. 결국 RNLI 앞에 놓인 것은 구조할 것인가 말 것인가라는 단순한 선택이 아니었다. 바다에서는 누구도 버리지 않는다는 202년 된 원칙과, 이민을 둘러싸고 갈라진 영국 사회의 여론 사이에서 그 원칙을 어떻게 지켜낼 것인가라는 훨씬 더 어려운 질문이었다.
RNLI의 타마급 전천후 구명정(ALB). 출처: Nilfanion - Own work, CC BY-SA 3.0
RNLI의 입장
이 논란 속에서 RNLI가 처한 입장 역시 겉으로 보이는 것처럼 단순하지 않다.
RNLI는 “우리는 판단도, 차별도 없이 바다에서 조난당한 모든 사람을 구조한다”는 원칙을 일관되게 지켜왔다. 구조를 요청하는 사람의 국적이나 출신지, 영국에 오려는 이유와 체류 자격은 구명정 승조원이 판단할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이 마주하는 것은 법률 문서나 정치적 논쟁이 아니라, 차가운 바다 위에서 가라앉고 있는 배와 살려달라고 손을 내미는 사람들이다.
법적으로도, 도덕적으로도 이 원칙은 분명하다. 바다에서 조난당한 사람을 구조하는 것은 국제해양법이 정한 의무이며, 눈앞에서 죽어가는 사람을 정치적 판단에 따라 외면하는 것은 RNLI가 지난 202년 동안 해온 일이 아니다. 더욱이 거센 파도와 어둠 속에서 구조에 나선 자원봉사자들에게 한 사람의 입국 자격과 구조할 가치부터 판단하라고 요구하는 것이 과연 현실적으로 가능한지도 의문이다.
그러나 논란이 본격적으로 공론화된 2021년 이후 RNLI가 내놓은 대응은 또 다른 해석을 낳았다. 당시 최고경영자 마크 도위(Mark Dowie)는 비난의 표적이 된 자원봉사자들을 공개적으로 옹호하며, 이들의 구조 활동을 “최고 수준의 인도주의 활동”이라고 규정했다. RNLI로서는 바다에서 생명을 구한 봉사자들을 보호하고 조직의 가장 오래된 원칙을 재확인한 발언이었지만, 비판론자들은 이를 단순한 구조 의무의 설명을 넘어 이민자 구조에 적극적인 도덕적 의미를 부여한 정치적 선언으로 받아들였다.
바로 그 지점에서 RNLI를 바라보는 시선은 갈라졌다. 지지자들에게 그것은 외부의 압력 앞에서도 생명 구조의 원칙을 굽히지 않겠다는 선언이었지만, 비판자들에게는 중립적인 구조 기관이 스스로 이민 논쟁의 한편에 서겠다고 밝힌 것처럼 보였다. RNLI가 정치에 뛰어들었다기보다 정치가 구조 현장까지 밀려 들어왔다고 볼 수도 있었지만, 그 경계가 흐려진 순간부터 일부 기부자들은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RNLI에 과연 다른 선택지가 있었는지를 두고는 의견이 엇갈린다. 침묵했다면 자원봉사자들을 보호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았을 것이고, 공개적으로 옹호하면 정치적 입장을 드러냈다는 공격을 피하기 어려웠다. 다만 RNLI를 지지하는 이들 가운데서도, 단체가 선택한 언어와 대응 방식이 의도와 무관하게 정치적 논쟁의 한복판으로 한 걸음 더 들어가는 결과를 낳았다고 인정하는 목소리는 존재한다.
맨섬 더글러스의 구명정 기지. 출처: Jim Linwood - https://www.flickr.com/photos/brighton/3833859143/, CC BY 2.0
영국이 묻고 있는 질문
그러나 RNLI를 둘러싼 격렬한 논쟁의 배경에는 한 자선단체만으로는 풀 수 없는 훨씬 더 크고 오래된 질문들이 놓여 있다.
국제해양법이 요구하는 구조 의무와 영국의 이민 통제 정책이 충돌할 때 국가는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시민의 기부로 운영되는 자원봉사 단체가 정부의 요청을 받아 사실상 이민 행정의 빈틈을 메우는 구조가 과연 적절한가. 무엇보다 바다에서 눈앞의 생명을 구해야 한다는 의무와 비정규 이주를 억제해야 한다는 국가적 목표가 같은 해역에서 맞부딪힐 때, 어느 가치를 먼저 선택해야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내놓지 못한 책임을 RNLI에만 돌리기는 어렵다. 해답을 찾지 못한 것은 수십 년에 걸쳐 집권해 온 영국 정부들이기 때문이다. 보수당도 노동당도 영국해협을 건너는 소형 선박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거듭 약속했지만, 도하는 멈추지 않았다. 버넘 총리 역시 노동당 정부가 마련한 2025년 망명 정책 개편을 이어받았으나, 영국해협을 향하는 배들이 사라질 조짐은 아직 보이지 않는다.
정부가 답을 찾지 못하는 동안 그 실패의 결과를 가장 먼저 마주하는 것은 바다로 나가는 사람들이다. 매년 수천 명이 작은 배에 몸을 싣고 영국해협을 건너는 한 조난 신고는 계속 들어올 것이고, 해안경비대의 호출을 받은 RNLI 구명정도 계속 출항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구명정이 사람들을 태우고 항구로 돌아올 때마다, 포츠머스에서 벌어진 것과 같은 분노와 충돌이 다시 모습을 드러낼 가능성도 남아 있다.
202년 동안 정치적 구호보다 조난 신호에 먼저 응답해 온 자원봉사 구명정 단체는 이제 영국 정치에서 가장 뜨거운 논쟁의 최전선에 서 있다. RNLI도, 그 구명정에 오르는 자원봉사자들도 이 역할을 선택한 적은 없다. 그들이 선택한 것은 그저 바다에서 사람을 살리는 일이었다.
그러나 영국해협이 이주의 통로로 남아 있고, 정부가 육지에서 풀지 못한 문제를 바다가 계속 떠안는 한, RNLI의 구명정은 출항할 때마다 같은 질문과 마주하게 될 것이다. 바다에 빠진 사람을 구하는 행위가 정치적 선택으로 해석되는 시대에도, 구조선은 아무것도 묻지 않고 그들을 향해 나아가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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