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영박물관엔 없는 이야기들

비틀즈의 나라에 베토벤이 없는 이유

‘음악 없는 나라’라는 독일의 조롱과 영국 클래식 음악의 굴곡진 역사

2026.05.02 | 조회 6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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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태준

1914년, 독일의 문화비평가 오스카 슈미츠는 도발적인 제목의 책 한 권을 내놓는다. 

『음악 없는 나라』. 

부제는 ‘영국의 사회 문제들’이었다. 

제목만큼이나 내용도 직설적이었다. 그는 책에서  “영국인들을 다른 문화권과 구별 짓는 어떤 결핍이 있다”며, “그들은 자신만의 음악을 갖지 못한 유일한 문명국”이라고 단언했다.

이 한 문장은 단순한 비평을 넘어 일종의 도발이었다. 특히 루트비히 판 베토벤과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를 배출한 독일에서 날아든 말이었기에, 그 무게는 더욱 클 수 밖에 없었다. 문제는 당시 이 비판이 완전히 근거 없는 공격으로 치부되기 어려웠다는 점이다. 

유럽의 음악 지도를 떠올려보면 그 대비는 더욱 선명해진다. 독일에는 요하네스 브람스와 로베르트 슈만이 있었고, 오스트리아에는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와 프란츠 슈베르트, 구스타프 말러가 있었다. 이탈리아에는 주세페 베르디와 자코모 푸치니가, 폴란드에는 프레데리크 쇼팽이, 러시아에는 표트르 일리치 차이콥스키가 자리한다. 프랑스 역시 클로드 드뷔시와 모리스 라벨이라는 확고한 이름을 갖고 있다.

그렇다면 영국은 어떠한가. 잠시 멈춰 서서 떠올려보면, 유럽 대륙의 다른 국가들만큼 즉각적으로 호명되는 이름이 많지 않다는 사실을 금새 깨닫게 된다. 윌리엄 셰익스피어를 낳고, 아이작 뉴턴과 찰스 다윈을 배출한 지적 강국이 왜 유독 클래식 음악의 영역에서는 존재감이 희미했는가.

이 질문은 단순한 문화적 비교를 넘어선다. 한 사회가 어떤 예술을 중심에 두고 발전해 왔는지, 그리고 무엇을 주변으로 밀어냈는지를 드러내는 단서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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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없는 나라』 의 표지.  Das Land ohne Musik : englische Gesellschaftsprobleme by Schmitz, Oscar A. H., 1873-1931. 출처: archive.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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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따지고 보면 16세기 영국은 유럽 음악의 변방이 아니라 중심에 있었다. 윌리엄 버드와 토머스 탈리스는 당대 유럽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없는 작곡가들이었고, 엘리자베스 1세 시대의 궁정은 음악적 활기로 넘쳐났다. 헨리 8세 역시 단순한 후원자를 넘어 직접 악기를 연주하고 곡을 쓰는 군주였다. 수도원과 대성당을 중심으로 형성된 합창 전통은 영국만의 독자적인 음악 문화를 꽃피우고 있었다.

문제는 이 전통이 점진적으로 쇠퇴한 것이 아니라, 급격하게 단절되었다는 데 있다. 전환점은 바로 1536년부터 1541년까지 이어진 수도원 해산이었다. 헨리 8세는 잉글랜드와 웨일스, 아일랜드 전역의 가톨릭 수도원과 수도회를 해체했고, 그 결과 수세기에 걸쳐 축적된 음악의 제도적 기반이 불과 몇 년 사이에 사라졌다.

당시 유럽에서 음악은 개인의 재능만으로 유지되는 영역이라기 보다는 제도와 후원이 뒷받침된 일종의 체계였다. 그리고 가톨릭 교회는 그 핵심 축의 역할을 했다.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는 교회를 위해 칸타타를 썼고,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는 잘츠부르크 대주교의 후원 아래 활동했다. 주세페 베르디의 「레퀴엠」 역시 전례 음악 전통의 연장선에 놓여 있다. 교회는 음악가를 길러내고, 고용하며, 작품을 축적하고 전승하는 거대한 플랫폼이었다.

그러나 영국에서는 그 기반 자체가 뿌리째 흔들렸다. 수도원 해산으로 800곳이 넘는 종교 기관이 문을 닫았고, 그와 함께 음악가를 교육하고 후원하던 생태계도 붕괴했다. 필사본과 악보는 흩어지거나 소실됐고, 음악을 기록하고 전승하던 공동체는 하루아침에 사라졌다. 이는 단순한 문화적 위축이 아니라, 구조적 단절이었다.

이 지점이 바로 첫 번째 균열이다. 영국 음악의 ‘부재’는 재능의 부족이 아니라, 그 재능을 지탱하던 기반의 붕괴에서 시작됐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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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8세의 모습. 출처: After Hans Holbein the Younger - Google Arts & Culture — eAHC0d0WiemXSA, Public Domain

 

***

 

두 번째 균열은 역설적인 방식으로 드러난다.

18세기 영국은 가난하거나 폐쇄된 사회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유럽에서 가장 부유하고, 가장 개방적인 국가 중 하나였다. 귀족들은 예술 후원에 적극적이었고, 런던은 당대 유럽에서 가장 활기찬 문화 중심지로 성장했다. 문제는 그 번영이 ‘자국 음악’의 성장으로 이어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 시기 런던으로는 유럽 각지의 음악가들이 몰려들었다. 그리고 그 흐름의 정점에는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이 있었다. 독일 할레 출신인 그는 1712년 런던에 정착한 뒤, 1759년 생을 마칠 때까지 거의 반세기를 영국에서 보냈다.

헨델은 단순한 외국인 음악가가 아니었다. 그는 런던 음악 시장의 구조 자체를 바꾼 인물이었다. 이탈리아 오페라를 중심으로 상업 오페라 회사를 설립하며 귀족 사회의 취향을 장악했고, 왕실 의식 음악에서도 결정적인 위치를 차지했다. 특히 1727년에 작곡된 「사독 제사장(Zadok the Priest)」은 이후 모든 영국 군주의 대관식에서 연주되는 상징적인 작품이 됐다. 그는 외국인임에도 불구하고, 영국 음악의 ‘공식 언어’를 사실상 재정의한 셈이다.

문제는 바로 여기서 발생한다. 헨델은 영국 음악을 풍요롭게 만들었지만, 동시에 그 공간을 잠식했다. 토머스 안와 같은 영국 출신 작곡가들은 왕실과 귀족 사회의 주요 위촉을 사실상 헨델에게 내주며 주변부로 밀려났다. 음악 시장이 성장했음에도, 그 과실이 자국 작곡가에게 돌아가지 않는 구조가 형성된 것이다.

헨델 이후에도 요제프 하이든, 펠릭스 멘델스존과 같은 대륙의 거장들이 런던을 찾았고, 영국 상류층은 이들을 열광적으로 환영했다. 결과적으로 영국은 유럽 음악의 소비 중심지로는 번영했지만, 창작의 중심지로 자리 잡는 데는 실패했다.

이러한 인식은 당시 유럽 지식인들 사이에서 점차 고정관념으로 굳어졌다. 독일 시인 하인리히 하이네는 1840년, “영국인들은 귀가 없다. 박자도, 음악도 어떤 형태로도 느끼지 못한다”고까지 말한다. 다소 과장된 표현이지만, 그만큼 영국 음악에 대한 회의적 시선이 널리 퍼져 있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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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8년 런던 코벤트 가든 극장 내부를 그린 판화. 출처: Thomas Rowlandson (1756–1827) and Augustus Charles Pugin (1762–1832) (after) John Bluck (fl. 1791–1819), Joseph Constantine Stadler (fl. 1780–1812), Thomas Sutherland (1785–1838), J. Hill, and Harraden (aquatint engravers) - This engraving was published as Plate 27 of Microcosm of London (1808) (see File:Microcosm of London Plate 027 - Covent Garden Theatre.jpg)., Public Domain

 

***

 

그렇다면 영국은 정말 ‘음악 없는 나라’였는가. 

슈미츠의 『음악 없는 나라』가 출간된 해는 1904년이다. 그러나 그보다 불과 5년 전인 1899년, 런던에서는 영국 음악사의 흐름을 바꿔놓을 작품이 초연된다. 에드워드 엘가의 〈에니그마 변주곡〉이다.

이 작품은 단순한 성공작을 넘어 상징적인 전환점으로 평가된다. 헨리 퍼셀이 세상을 떠난 1695년 이후, 사실상 200여 년간 침묵에 가까웠던 영국 작곡 전통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른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초연을 지휘한 인물 역시 의미심장하다. 당시 유럽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지휘자 중 한 명이었던 한스 리히터였다. 독일어권 지휘자가 영국 작곡가의 작품을 이끌어 성공시켰다는 사실은, 대륙 유럽이 마침내 영국 음악을 하나의 ‘동등한 대상’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음을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엘가의 등장은 단발적인 사건에 그치지 않았다. 그는 이후 세대가 나아갈 방향을 열어젖혔다. 랄프 본 윌리엄스, 벤저민 브리튼, 윌리엄 월턴, 마이클 티펫으로 이어지는 흐름은 20세기 영국 음악을 비로소 세계 무대 위에 올려놓는다.

이들의 작품은 더 이상 ‘국지적 성취’에 머물지 않았다. 본 윌리엄스의 〈종달새의 비상〉과 〈탈리스 주제에 의한 환상곡〉, 브리튼의 오페라 〈피터 그라임스〉와 〈전쟁 레퀴엠〉은 오늘날 국제 클래식 레퍼토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는 영국이 더 이상 음악의 주변부가 아니라, 하나의 창작 중심지로 복귀했음을 의미한다.

결국 슈미츠의 선언은 절반만 맞는 말이었다. 그것은 과거를 설명하는 데에는 일정 부분 유효했지만, 미래를 예측하는 데에는 실패했다. ‘음악 없는 나라’라는 조롱이 공허해지는 데에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말은, 영국 음악이 부활하는 순간을 더욱 선명하게 대비시키는 역설적인 출발점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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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 허버트 램버트가 촬영한 에드워드 엘가의 사진. 출처: 저자: Herbert Lambert (1881–1936) - National Portrait Gallery, 퍼블릭 도메인

 

***

 

그러나 더 근본적인 역전은 전혀 다른 지점에서 일어난다. 그것은 클래식 음악의 복권이 아니라, 음악 자체의 중심이 이동하는 사건이었다.

1963년 2월 11일, 런던 이슬링턴의 한 녹음 스튜디오에서 네 명의 젊은이가 단 하루 만에 열 곡을 녹음한다. 비틀즈의 데뷔 앨범 『Please Please Me』다. 이 순간은 단순한 음반 발매가 아니라, 영국 음악이 세계 시장을 향해 본격적으로 문을 여는 신호탄이었다.

이후 반세기를 되돌아보면, ‘영국에는 음악이 없다’는 슈미츠의 단정이 얼마나 짧은 시야에 갇힌 판단이었는지 분명해진다. 롤링 스톤스, 데이비드 보위, 레드 제플린, 퀸, 더 클래시, 라디오헤드에 이르기까지, 20세기 대중음악의 흐름을 재편한 이름들의 상당수가 영국에서 나왔다. 클래식 음악의 중심이 독일과 오스트리아에 있었다면, 대중음악의 패권은 압도적으로 영국이 쥐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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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 2월 7일, 비틀즈존 F. 케네디 국제공항에 도착하는 모습. 출처: United Press International, photographer unknown - This image is available from the United States Library of Congress's Prints and Photographs divisionunder the digital ID cph.3c11094.This tag does not indicate the copyright status of the attached work. A normal copyright tag is still required. See Commons:Licensing., Public Domain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이것은 단순한 우연이었을까, 아니면 구조적인 필연이었을까. 영국이 클래식 음악의 ‘본산’이 되지 못한 사실과, 오히려 대중음악의 혁신을 주도하게 된 사실 사이에는 어떤 연결고리가 있는 것은 아닐까.

하나의 실마리는 18세기 런던의 음악 생태계에서 찾을 수 있다.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의 시대부터 런던은 궁정이나 교회가 아니라 ‘시장’이 음악을 움직이는 도시였다. 귀족의 후원보다 입장료를 지불하는 중산층 청중이 음악의 수요를 형성했고, 이는 대륙 유럽의 다른 주요 도시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구조였다. 음악이 권력의 상징이 아니라 소비의 대상이 되는 환경, 다시 말해 청중의 반응과 취향이 직접적으로 작동하는 시장 중심의 생태계가 형성된 것이다.

이러한 구조는 결과적으로 특정한 음악을 선별해 키워낸다. 교향곡이나 미사곡처럼 제도적 후원에 의존하는 장르보다는, 청중이 즉각적으로 반응하고 소비할 수 있는 음악, 즉 멜로디와 리듬이 직관적으로 전달되는 음악이 성장하기에 유리한 토양이다. 20세기 대중음악이 바로 그 위에서 폭발적으로 확장됐다는 점을 고려하면, 영국의 음악사는 단절이 아니라 방향의 전환으로 읽힐 수 있다.

이 흐름은 흥미롭게도 다시 클래식 음악과 연결된다. 에드워드 엘가의 〈에니그마 변주곡〉 중 9번 변주 ‘님로드’는 다이애나 스펜서, 엘리자베스 2세, 필립 공의 장례식에서 연주되며 국가적 애도의 음악으로 자리 잡았다. 동시에 이 곡은 한스 짐머의 편곡을 통해 영화 《덩케르크》에 사용되며 전 세계 관객에게 다시 소비된다.

이는 한때 ‘음악이 없다’고 평가받던 나라에서, 클래식과 대중문화의 경계가 자연스럽게 녹아드는 순간이었다. 결국 영국 음악의 역사는 결핍의 서사가 아니라, 중심이 이동하는 과정, 그리고 그 이동이 만들어낸 새로운 지형의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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