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6월 25일, 백악관 집무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나토 사무총장 마르크 뤼터와의 공동 기자회견 도중 영국 정치에 관한 질문을 받았다. 영국의 차기 총리로 거론되는 앤디 버넘에 대해 어떻게 보느냐는 질문이었다.
트럼프는 잠시 생각한 뒤 이렇게 답했다.
“그가 어느 도시의 시장이었던 것 같습니다. 매우 진보적이라고 들었습니다.”
영미 관계를 외교의 핵심 축으로 삼아온 영국 입장에서, 아직 총리직에 오르지도 않은 정치인을 향해 미국 대통령이 이처럼 공개적으로 거리감을 드러낸 것은 가볍게 넘길 장면이 아니다. 이는 단순한 즉흥 발언이라기보다, 버넘이 상징하는 정치적 방향에 대한 워싱턴의 본능적 경계심을 보여주는 대목에 가깝다.
물론 트럼프의 평가는 과장된 측면이 있다. 그러나 완전히 근거 없는 말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버넘은 실제로 영국 노동당 안에서도 뚜렷하게 좌파적 색채를 지닌 인물이다. 문제는 그가 ‘진보적이냐’ 여부가 아니다. 더 중요한 질문은, 만약 버넘이 영국의 차기 총리가 된다면 그 진보성이 영국의 경제, 에너지, 외교 노선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 것인가다.
버넘의 정치 궤적
앤디 버넘은 1970년 리버풀 인근 에인트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전화 엔지니어였고, 어머니는 병원 접수 직원이었다. 노동계층 가정에서 성장한 그는 14살에 노동당에 입당했고, 이후 케임브리지대에서 영문학을 전공했다. 2001년 하원의원으로 처음 의회에 입성한 뒤 고든 브라운 정부에서 문화부 장관과 보건부 장관을 지내며 중앙 정치무대에서 경력을 쌓았다.
그는 오래전부터 노동당의 차기 지도자로 거론됐지만, 결정적인 순간마다 뜻을 이루지 못했다. 2010년 노동당 대표 선거에서는 4위에 그쳤고, 2015년에는 제러미 코빈에게 패해 준우승에 머물렀다. 두 차례의 좌절 끝에 버넘은 웨스트민스터를 떠나 지역 정치로 눈을 돌렸다.
그 선택은 오히려 그의 정치적 입지를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다. 2017년부터 2026년까지 그레이터맨체스터 시장을 세 차례 연속 맡으며 교통, 주택, 지역 경제를 앞세운 실용적 행정으로 높은 인기를 얻었고, 어느새 '북부의 왕(King of the North)'이라는 별명까지 붙었다. 노동당 내에서도 중앙 정치인이라기보다 '지역을 통해 검증된 지도자'라는 이미지가 자리 잡았다.
그리고 2026년 6월, 그의 이름은 다시 다우닝가를 향해 떠올랐다.
키어 스타머 총리는 집권 2년도 채 되지 않아 지지율이 마이너스 57까지 추락했고, 피터 맨덜슨 주미대사를 둘러싼 에프스타인 스캔들, 2026년 5월 지방선거 참패까지 겹치며 사실상 레임덕에 빠졌다. 같은 시기 버넘은 의회 복귀를 위해 마커필드 보궐선거에 출마해 압승했고, 결과가 나온 지 사흘 만에 스타머는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두 번의 대표 선거 패배로 멀어졌던 총리의 자리는, 아이러니하게도 맨체스터에서의 성공을 발판 삼아 다시 그의 눈앞에 다가오게 된 것이다.
앤디 버넘. 출처: Scottish Government - https://www.flickr.com/photos/26320652@N02/53921141434/, CC BY 2.0
'북부의 왕'이라는 브랜드의 이면
버넘의 가장 큰 경쟁력은 정책보다 정치적 이미지에 있다는 평가가 많다. 그는 정장보다 셔츠 차림이 자연스럽고, 딱딱한 정치적 수사 대신 일상적인 언어를 즐겨 쓴다. 런던 중심의 정치 문화를 비판하며 지역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모습도 꾸준히 보여왔다. 이런 점에서 그는 스타머보다 훨씬 친근하고, '사람 냄새 나는 정치인'이라는 인상을 준다.
하지만 이 이미지는 조금 더 입체적으로 볼 필요가 있다.
버넘은 스스로를 북부 노동계층의 목소리로 내세우지만, 그의 이력은 전형적인 아웃사이더와는 거리가 있다. 케임브리지대 출신인 그는 25년 가까이 웨스트민스터와 그레이터맨체스터 권력의 중심에서 정치 경력을 쌓아왔다. 이런 이유로 보수당 일각에서는 그를 두고 "북부 억양을 가진 키어 스타머"라고 비꼬기도 한다.
반대로 노동당 좌파의 시선도 마냥 우호적이지 않다. 이들은 버넘이 급진적인 언어를 사용하면서도 실제 집권하면 과감한 개혁은 추진하지 않을 것이라고 본다. "결국 아무것도 국유화하지 않을 사람"이라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흥미로운 점은 양쪽 모두가 그를 비판한다는 사실이다. 보수 진영은 지나치게 좌파적이라고 보고, 노동당 좌파는 오히려 지나치게 온건하다고 본다. 버넘은 의도적으로 그 중간 지대를 점하려는 정치인에 가깝다.
지지자들조차 그의 약점으로 꼽는 부분이 있다. 중요한 갈림길에서 정치적 부담을 감수하기보다 한 발 물러서는 경향이다.
그레이터맨체스터 시장 시절 추진했던 그린벨트 개발 계획은 반발이 커지자 사실상 철회했고, 환경 개선 효과가 확인됐던 대기오염 부담금(Clean Air Zone) 역시 시민들의 반대가 거세지자 시행을 접었다. 지역 정치에서는 이러한 유연함이 현실적인 리더십으로 평가받을 수 있다. 그러나 국가 차원에서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사안을 조정해야 하는 총리에게도 같은 방식이 통할지는 아직 검증되지 않았다.
키어 스타머(좌)와 앤디 버넘(우). 출처: Number 10 - Prime Minister Keir Starmer visits Holy Trinity Primary School, OGL 3
정책의 실체: 무엇을 하겠다는 것인가
버넘의 경제 철학을 관통하는 핵심은 시장보다 국가의 역할을 확대하는 데 있다. 그는 에너지, 주택, 수도, 교통과 같은 핵심 공공서비스는 민간에 맡기기보다 더 강한 공공 통제 아래 운영돼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가장 상징적인 사례가 수도 회사 템스 워터다. 버넘은 경영난에 빠진 이 회사를 국유화해야 한다는 입장을 여러 차례 밝혀왔다.
그러나 반대론자들은 국유화가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정부의 부담만 키울 수 있다고 지적한다. 템스 워터는 현재 약 200억 파운드의 부채를 안고 있다. 국가가 회사를 인수하면 이 부채 역시 사실상 공공부문이 떠안게 된다. 민영화의 실패를 인정하는 것과 별개로, 소유권을 정부로 옮긴다고 해서 경영 문제나 투자 부족이 자동으로 해결되는 것은 아니라는 논리다.
버넘의 경제 구상은 이 사례에만 그치지 않는다. 그는 스타머 정부가 도입한 고용주 국민보험 인상은 재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한편, 국방비 증액은 기존 재정 규칙에 얽매이지 않고 국채 발행을 통해 조달할 수 있다는 입장을 보였다. 또 고령화에 대비한 사회적 돌봄 체계를 구축하기 위해 상속세를 대체하는 '국가 돌봄 부담금(National Care Levy)' 도입도 오래전부터 제안해왔다.
이처럼 버넘은 국가의 역할 확대에는 적극적이지만, 이를 뒷받침할 재원 조달 방안은 상대적으로 구체성이 부족하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공공서비스 확대와 인프라 투자, 국방비 증액을 동시에 추진하면서도 재정 건전성을 어떻게 유지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쟁이 이어지고 있다.
이 문제는 지금의 영국 재정 여건을 고려하면 더욱 민감하다. 현재 영국의 정부 지출은 국내총생산(GDP)의 약 45% 수준에 이르며, 국민의 세금 부담도 전후 최고 수준에 근접해 있다. 이런 상황에서 국가의 역할과 지출을 한층 확대하겠다는 버넘의 구상은, 영국 정치의 가장 큰 쟁점 가운데 하나가 될 가능성이 크다.
런던에 위치한 템스 워터 본사 전경. 출처: Jim Linwood - https://www.flickr.com/photos/brighton/4862267593/, CC BY 2.0
트럼프와의 충돌, 그리고 '특별한 관계'의 미래
버넘이 총리직에 오른다면 가장 먼저 시험대에 오를 분야는 외교, 그중에서도 미국과의 관계일 가능성이 크다.
그는 오랫동안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을 공개적으로 비판해 온 영국 정치인 가운데 한 명이다. 2021년 1월 6일 미국 의사당 난입 사태 당시에는 "트럼프에게 시간을 내준 영국 정치인들은 지금쯤 부끄러워해야 한다"는 글을 소셜미디어에 남겼다. 최근 마커필드 보궐선거 승리 연설에서도 "조심하지 않으면 영국도 미국에서 보이는 분열되고 어두운 정치의 길로 갈 수 있다"고 경고하며 트럼프식 정치를 우회적으로 비판했다.
트럼프 역시 버넘에 대해 호의적인 신호를 보내지 않았다. 그는 백악관에서 버넘을 "극도로 진보적인 사람"이라고 규정하며, 영국 총리가 되더라도 만나고 싶은 인물은 아니라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백악관 부대변인 애나 켈리도 CBS와의 인터뷰에서 "무제한 이민과 파괴적인 세계주의라는 좌파 정책이 한때 위대했던 유럽의 도시들을 알아볼 수 없게 만들었다"고 말하며 사실상 버넘이 대표하는 정치 노선을 비판했다.
이는 단순한 설전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영국과 미국은 오랫동안 '특별한 관계(Special Relationship)'를 외교의 축으로 유지해 왔지만, 양국 정상 간 개인적 신뢰 역시 그 관계를 떠받치는 중요한 요소였다. 총리 취임도 전에 양측이 공개적으로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다는 사실은 앞으로의 관계가 순탄치 않을 수 있음을 시사한다.
물론 버넘이 집권 이후에는 보다 실용적인 접근을 택할 가능성도 있다. 영국 총리라면 안보와 무역, 정보 협력 등에서 미국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다만 수년간 이어진 공개적인 비판과 상호 견제가 이미 기록으로 남아 있는 만큼, 두 정상의 첫 통화부터 미묘한 긴장감이 흐를 가능성은 적지 않아 보인다.
2025년 맨체스터 프라이드에 참여한 버넘. 출처: Rathfelder - Own work, CC0
진보의 이름으로 포장된 것들
버넘 지지자들이 가장 자주 내세우는 표현이 있다. 그는 "런던이 외면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정치인"이라는 것이다. 정치적으로는 상당히 설득력 있는 메시지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수사가 아니라, 그 안을 채우는 정책과 철학이다.
버넘의 정치를 관통하는 핵심은 국가의 역할을 확대해야 한다는 믿음이다. 그는 시장이 해결하지 못한 문제를 공공 부문이 적극적으로 개입해 해결해야 한다고 본다. 에너지와 수도, 교통, 주택은 물론 사회적 돌봄까지 국가의 책임을 강화해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모두 같은 철학에서 출발한다.
문제는 영국이 이러한 접근을 처음 시도하는 나라가 아니라는 점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은 대규모 국유화와 공공 지출 확대를 통해 경제를 재건하려 했다. 물론 당시에는 복지국가를 구축하고 사회 안전망을 강화하는 성과도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낮은 생산성과 재정 부담, 만성적인 경제 침체가 겹쳤고, 결국 1970년대에는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금융을 받을 정도로 위기에 몰렸다. 이른바 '영국병(British Disease)'으로 불린 시기다.
물론 버넘의 구상을 1970년대와 단순 비교하는 것은 무리라는 반론도 가능하다. 당시와 지금은 세계 경제 환경도, 영국의 산업 구조도 크게 달라졌다. 공공 투자가 반드시 비효율로 이어진다고 단정할 수도 없다.
그럼에도 의문은 남는다. 재정 여력이 크지 않고, 미국과의 관계는 불확실성이 커지고 있으며, 우파 포퓰리즘이 빠르게 세력을 넓히는 지금의 영국에서 국가의 역할과 공공 지출을 더욱 확대하는 것이 과연 지속 가능한 해법이 될 수 있을까. 버넘은 그 질문에 아직 충분히 설득력 있는 답을 내놓지 못했다.
정책 못지않게 리더십 역시 검증 대상이다. 버넘은 맨체스터 시장 시절 정치적 부담이 커질 경우 논란이 되는 정책을 수정하거나 철회하는 모습을 여러 차례 보였다. 지역 행정에서는 현실적인 타협으로 평가받을 수 있는 선택이었다.
하지만 총리는 다르다. 무역 협상과 국방, 재정 운용처럼 한 번 내린 결정이 국가 전체에 장기적인 영향을 미치는 사안에서는 되돌릴 수 없는 선택을 해야 한다. '북부의 왕'이라는 별명이 지역 정치에서는 통했을지 몰라도, 다우닝가에서도 같은 리더십이 통할지는 아직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결국 버넘의 진짜 시험대는 총리 취임 이후에 시작될 것이다.
앤디 버넘은 현재 2026년 노동당 대표 선거의 단독 후보로 확인된 상태이며, 지명 마감일인 7월 16일까지 다른 후보가 나오지 않을 경우 조기에 총리직을 맡게 된다. 본 칼럼은 2026년 6월 27일 기준 확인된 정보를 바탕으로 작성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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