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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영박물관엔 없는 이야기들

홍콩의 시계는 누구를 기다리는가

2036년으로 미뤄진 조슈아 웡의 자유가 홍콩과 영국에 던지는 질문

2026.11.07 | 조회 8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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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태준

2027년 1월, 조슈아 웡(黃之鋒)은 감옥 문을 나설 예정이었다. 2020년 늦가을부터 이어진 수감 생활이 끝나면, 스물네 살에 멈춰 선 바깥세상의 일상을 서른 살의 나이로 다시 시작할 수 있을 터였다. 그러나 출소를 두 달가량 앞둔 2026년 11월 5일, 홍콩 고등법원은 그에게 징역 10년을 선고했다. 앞서 복역하던 형과 겹쳐 집행되는 기간은 두 달 남짓에 불과했다. 현재의 형 집행 일정대로라면 그가 자유를 되찾는 때는 2036년 후반, 마흔 번째 생일을 지난 뒤다.

한 사람에게서 사라지는 10년을 달력의 장수로만 헤아리기는 어렵다. 누군가는 그사이 가정을 꾸리고, 직업을 바꾸고, 늙어가는 부모의 곁을 지킨다. 웡에게도 그런 소망이 있었다. 선고를 앞두고 그의 변호인은 출소 후 부모를 돌보고 싶다는 뜻을 전하며, 피고인에게 희망을 남겨주는 형량을 내려달라고 요청했다. 법원이 내놓은 대답은 그 희망을 다시 먼 미래로 미루는 것이었다.

세계 언론은 오랫동안 그를 ‘홍콩 민주화 운동의 얼굴’이라고 불러왔다. 그러나 그 이름이 낯선 한국 독자에게는 유명세보다 먼저 풀어야 할 의문이 있을 것이다. 교복을 입고 거리에 나섰던 소년은 어쩌다 중년이 되어서야 감옥을 나올 사람이 됐을까. 그 사이 홍콩에는 무슨 일이 있었으며, 한때 이 도시를 통치했던 영국은 왜 지금도 그의 이름 앞에서 답을 요구받는 것일까.

그 이야기는 웡이 태어나기 전, 홍콩의 미래를 두 나라가 문서에 적어 넣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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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촬영된 웡의 모습. 출처: Studio Incendo - DSCF0013, CC BY 2.0

 

일국양제의 시작

 

1984년 영국과 중국은 중영공동선언을 체결했다. 영국이 통치하던 홍콩을 1997년 중국에 반환하되, 중국은 반환 이후에도 홍콩의 기존 제도와 생활방식을 50년 동안 유지한다는 약속이었다. 하나의 국가 안에 서로 다른 체제를 둔다는 ‘일국양제’는 그렇게 홍콩의 미래를 설명하는 말이 됐다. 홍콩은 중국의 일부가 되지만, 중국 본토와는 다른 법률과 사법제도, 자본주의 경제와 일정한 자유를 유지하며 높은 수준의 자치를 누린다는 구상이었다. 이 원칙은 홍콩의 헌법에 해당하는 기본법에도 담겼다.

그렇다고 영국령 홍콩이 시민 모두에게 온전한 민주주의를 허락했던 것은 아니다. 식민지의 최고 통치자는 런던이 임명했고, 주민이 정부를 직접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제한돼 있었다. 반환을 전후해 자라난 세대가 품었던 기대는 식민지 시절로 돌아가는 데 있지 않았다. 이미 누리던 자유를 지키면서, 자신들이 살아갈 도시의 정치에도 더 큰 몫으로 참여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1996년 10월 13일 태어난 웡은 바로 그 경계에 놓인 아이였다. 출생 당시 홍콩은 영국령이었지만, 그가 기억하고 경험하며 자란 도시는 중국의 특별행정구였다. 영국의 통치가 끝나기 약 여덟 달 반 전에 태어난 소년에게 일국양제는 외교문서의 추상적인 표현이 아니라 학교와 거리, 신문과 일상 속에서 확인해야 할 삶의 조건이었다.

웡이 처음 맞선 대상도 거대한 국가권력이라는 이름보다는, 학교에서 배우게 될 교육과정의 모습으로 다가왔다.

열네 살이던 2011년, 그는 또래 학생들과 ‘학민사조’라는 단체를 만들었다. 이듬해 홍콩 정부가 도입을 추진한 ‘도덕·국민교육’이 이들을 거리로 이끌었다. 정부는 국가에 대한 이해와 소속감을 기르는 교육이라고 설명했지만, 반대하는 학생과 학부모들은 중국 공산당에 우호적인 내용을 통해 비판적 사고를 약화시키려는 시도로 받아들였다. 정부 청사 앞에 학생들이 모였고, 교사와 부모, 시민들이 그 곁에 섰으며, 결국 정부는 의무 도입 방침을 거둬들였다.

그 경험은 소년에게 한 가지 가능성을 보여줬을 것이다. 아직 투표할 나이가 되지 않았더라도, 함께 목소리를 내면 자신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결정을 바꿀 수 있다는 가능성이었다. 2년 뒤 홍콩의 거리를 가득 메운 우산들은 그 믿음이 도시 전체로 번져나간 풍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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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홍콩 정부가 추진하던 ‘도덕·국민교육’ 반대 시위를 이끌었던 웡. 출처: Iris Tong - http://www.voacantonese.com/content/hong-kong-student-group-called-for-recession-of-national-education/1404747.html, Public Domain

 

우산 혁명

 

2014년 갈등의 중심에는 홍콩 정부의 수반인 행정장관을 어떻게 선출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있었다. 한국의 대통령과 지위나 권한이 같지는 않지만, 홍콩의 행정을 이끄는 최고 책임자라는 점에서 시민의 일상에 큰 영향을 미치는 자리다. 기본법은 보통선거를 통한 행정장관 선출을 궁극적인 목표로 명시하고 있었다. 문제는 시민이 투표할 수 있느냐에 더해, 누구에게 투표할 수 있느냐에 있었다.

그해 8월 말 중국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가 정한 선거의 틀은 후보들이 지명위원회의 문턱을 먼저 넘도록 했다. 민주파는 이 구조 아래에서는 베이징이 받아들일 만한 인물들만 최종 후보가 될 수 있다고 봤다. 투표용지를 손에 쥐더라도 선택지 자체를 권력이 미리 정한다면, 자신들이 기다려온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멀다는 생각이었다.

9월 학생들의 수업 거부와 시위가 이어졌고, 시민들은 도심 도로를 점거했다. 경찰의 최루액 분사 등을 막으려고 펼쳐 든 우산은 곧 운동의 상징이 됐다. 79일 동안 이어진 ‘우산 혁명’은 당장의 제도 개혁을 얻어내지는 못했지만, 홍콩의 젊은 세대가 무엇을 바라는지를 세계에 알렸다.

웡은 그 한가운데서 국제적인 인물이 됐다. 잡지의 표지와 다큐멘터리 속에 그의 얼굴이 등장했고, 해외 정치인들은 그를 만나 홍콩의 이야기를 들었다. 다만 세계가 기억하기 쉬운 얼굴 하나를 얻었다고 해서, 수많은 시민이 함께한 운동이 한 사람의 의지로 시작되고 움직였던 것은 아니다. 웡은 그 거대한 흐름을 대표하는 인물이었으며, 훗날 그 흐름을 처벌하는 과정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이름 가운데 하나가 됐다.

거리에서 확인한 열망을 제도 안으로 옮기려는 시도도 있었다. 웡은 2016년 네이선 로 등과 함께 정당 ‘데모시스토’를 창당했다. 같은 해 로는 홍콩 최연소 입법회 의원으로 당선됐다. 입법회는 한국의 국회에 해당하는 기관으로, 법률을 만들고 예산을 심의한다. 그러나 로는 취임 선서의 방식과 진정성을 둘러싼 소송 끝에 이듬해 의원직을 잃었다. 이 과정에는 선서 요건을 엄격하게 해석한 중국 전인대 상무위원회의 기본법 해석이 작용했다. 선거를 통해 제도 안으로 들어가려던 젊은 정치인들 앞에서도 문은 다시 좁아지고 있었다.

2019년에는 더 큰 격랑이 닥쳤다. 홍콩 정부가 추진한 범죄인 인도 법안, 한국에서 흔히 ‘송환법’으로 불린 법안이 도화선이었다. 시민들이 두려워한 것은 홍콩의 별도 사법제도 아래 살아온 사람이 중국 본토로 보내져 수사와 재판을 받을 수 있다는 가능성이었다. 법원이 권력으로부터 얼마나 독립돼 있는지, 피의자의 권리가 얼마나 보장되는지를 둘러싼 불신이 법안 반대 운동을 키웠다.

시위는 대규모로 번졌고 일부 현장에서는 시위대의 폭력과 경찰의 강경 진압이 되풀이됐다. 법안이 철회된 뒤에도 책임 규명과 민주적 개혁을 요구하는 목소리는 잦아들지 않았다. 홍콩 정부와 베이징은 이를 사회질서와 국가주권에 대한 위협으로 봤고, 시위 참가자들은 자신들에게 약속된 자유와 자치를 지키려는 싸움이라고 여겼다. 같은 거리에서 벌어지는 일을 설명하는 두 언어는 갈수록 멀어졌다.

웡은 이 시기 홍콩의 문제를 해외에 알리는 데 힘을 쏟았다. 미국 의회에서 증언하며 홍콩 인권민주주의법의 통과를 촉구했고, 국제사회가 홍콩의 자치와 인권 상황에 관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2019년 제정된 이 법은 홍콩에 대한 미국의 특별대우를 자치 수준과 연계하고, 인권 침해 등에 책임이 있는 인사들에게 제재를 가할 근거를 마련했다. 웡에게 국제적인 관심과 압력은 홍콩 안에서 갈수록 줄어드는 정치적 수단을 보완하는 길이었다. 당국은 그 활동에서 외부 세력을 끌어들여 중국과 홍콩을 압박하려는 시도를 봤다.

그 충돌을 형사처벌의 언어로 바꾼 것이 2020년 6월 30일 시행된 홍콩 국가보안법이었다. 중국 중앙 차원에서 제정해 홍콩에 적용한 이 법은 국가 분열, 국가정권 전복, 테러 활동, 외국 또는 외부 세력과의 결탁을 처벌하며, 중대한 경우 종신형까지 선고할 수 있도록 했다. 웡은 시행 당일 데모시스토를 탈퇴했고, 단체도 해산했다.

이후 그의 삶에는 서로 다른 사건의 형량이 차례로 더해졌다. 2019년 경찰본부 앞 시위와 관련한 사건, 톈안먼 민주화 시위 희생자 추모집회에 참석한 사건이 이어졌고, 그 뒤에는 ‘홍콩 47’ 사건이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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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산 혁명 당시 언론과 인터뷰를 나누던 웡의 모습. 출처: Seader - Own work, CC BY-SA 4.0

 

홍콩 국가보안법 그리고 홍콩 47

 

민주파는 2020년 입법회 선거에 앞서 후보를 조율하기 위한 비공식 예비선거를 실시했다. 후보들이 난립해 표가 나뉘는 것을 막고, 당시 70석이던 입법회에서 과반을 확보하려는 목적이었다. 그 구상에는 과반 의석을 얻은 뒤 정부 예산안을 거부해 행정장관과 정부를 압박한다는 전략도 포함돼 있었다.

검찰과 법원은 이 계획이 단순한 선거연대나 의정활동의 범위를 넘어 정부 기능을 마비시키고 헌정 위기를 일으키려는 공모라고 판단했다. 반면 피고인들을 지지하는 이들은 선거와 의회의 권한을 활용하려던 정치활동을 국가 전복으로 처벌했다고 비판했다. 47명이 기소된 이 사건에서 2024년 11월 45명에게 실형이 선고됐고, 웡은 징역 4년 8개월을 받았다. 이미 구금된 기간 등이 반영된 그의 출소 예정일이 2027년 1월이었다.

그러나 그 날짜가 다가오기 전인 2025년 6월, 당국은 수감 중인 웡을 다시 체포해 기소했다. 이번에는 외국 세력과 결탁하기로 공모했다는 혐의였다. 공소의 대상 기간은 국가보안법이 시행된 직후인 2020년 7월부터 그해 11월까지였다. 네이선 로 등과 함께 외국 정부나 기관에 중국과 홍콩을 겨냥한 제재와 봉쇄 등 적대적 조치를 요청했다는 내용이었다.

범죄로 지목한 시기로부터 수년이 지난 뒤, 기존 형기의 끝이 보이기 시작할 무렵 새 기소가 이뤄졌다는 사실은 비판을 불렀다. 휴먼라이츠워치는 민주화 인사들에게 혐의를 거듭 적용해 장기간 구금하는 방식이라고 지적했다. 당국은 증거에 따른 정당한 법 집행이라는 입장을 고수했다. 같은 시간의 흐름이 한쪽에는 반복되는 처벌로, 다른 쪽에는 남아 있던 범죄의 처벌로 읽힌 것이다.

웡은 2026년 9월 유죄를 인정했다. 11월 재판부는 그와 로를 공모의 주도자로 판단하고, 사건을 중대한 범주로 분류했다. 양형의 출발점은 징역 13년이었으며 유죄 인정과 정상참작을 거쳐 10년이 됐다. 국가보안법상 이 범주의 결탁죄는 징역 10년에서 종신형까지 선고할 수 있다. 따라서 이번 형량은 13년에서 줄어든 결과이면서, 동시에 재판부가 적용한 범주의 법정 하한선이기도 했다.

그러나 형량 계산만으로 이 사건의 논란을 설명할 수는 없다. 그보다 앞에 놓인 질문은 어떤 정치적 행동을 국가안보 범죄로 규정할 것인가에 관한 것이다.

홍콩 정부는 정부를 비판하는 자유와 외국의 힘을 빌려 국가에 해를 끼치는 행위를 구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번 사건에서도 웡과 로가 해외 고위 인사들과의 접촉, 언론과 소셜미디어를 활용해 제재를 촉구했으며, 그 활동이 국가안보를 위태롭게 했다는 법원의 판단을 강조했다. 웡의 유죄 인정과 공개된 사법절차 역시 판결의 정당성을 뒷받침한다고 설명했다.

국제 인권단체들은 바로 그 범죄의 경계에 이의를 제기한다. 앰네스티는 국가보안법이 반대 의견을 처벌하는 수단으로 쓰이고 있다고 비판했다. 해외 언론에 자국의 인권 상황을 설명하고, 외국 정치인에게 대응을 요청하는 활동까지 중형의 근거가 될 때, 시민이 권력의 부당함을 호소할 수 있는 공간은 얼마나 남느냐는 것이다. 유죄를 인정했다는 사실은 법적 절차에서 중요하지만, 어떤 법이 어떤 표현을 범죄로 삼아야 하는가에 대한 논쟁까지 끝내주지는 않는다.

국가보안법 시행 이전의 활동이 이후 공모의 존재를 설명하는 근거로 사용됐다는 점도 이 질문과 맞닿아 있다. 과거의 행적을 증거로 살피는 일과 당시 처벌 대상이 아니던 행위에 새 법을 적용하는 일은 법적으로 구별되지만, 정치활동의 연속성을 어디까지 범죄의 연속성으로 볼 것인지는 여전히 중요한 쟁점으로 남는다.

한국 독자에게도 완전히 먼 이야기는 아니다. 해외에 인권 침해를 알리고 국제사회의 연대를 구하는 행동은 한국 민주화의 역사에서도 낯설지 않다. 그렇다고 서로 다른 시대와 법체계를 그대로 포개어 판단할 수는 없겠지만, 국가의 안전을 보호할 권한과 시민이 권력을 비판할 권리가 충돌할 때 그 경계를 누가, 얼마나 좁고 엄격하게 그어야 하는지는 우리에게도 익숙한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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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미국 연방의회 의사당에서 발언하는 조슈아 웡. 출처: House Foreign Affairs Committee - https://twitter.com/HouseForeign/status/1174388021690544129, Public Domain

 

영국의 책임

 

영국은 홍콩의 인권 상황에 관심을 표명하는 여러 나라 가운데 하나이면서, 동시에 반환 이후의 질서를 약속한 조약의 당사자다. 홍콩의 자유를 말할 때 영국이 꺼내 드는 중영공동선언에는 중국의 약속과 함께 영국의 서명도 남아 있다. 그것이 영국에 홍콩을 다시 통치할 권리를 주는 것은 아니지만, 약속이 훼손되고 있다고 판단할 때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책임에서는 벗어나기 어렵다.

판결 다음 날인 11월 6일, 영국은 미국·일본·독일·프랑스 등과 함께 10개국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이들은 국가보안법이 정치적 표현과 참여를 이유로 개인을 겨냥하는 데 사용되고 있다고 비판하고, 중국과 홍콩 당국에 중영공동선언이 보장한 권리와 자유를 존중하라고 촉구했다. 한때 교복을 입고 정부 청사 앞에 서 있던 소년의 이름이 이제는 여러 나라 외교부가 함께 발표하는 문장 속에 놓였다.

영국이 취한 조치가 성명에만 머물렀던 것은 아니다. 2021년에는 영국해외시민, 이른바 BN(O) 자격을 지닌 홍콩인과 그 가족 등이 영국에서 거주하고 일할 수 있는 이주 경로를 열었다. 식민지 반환 과정에서 만들어진 국적 지위를 바탕으로, 홍콩을 떠나려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생활의 터전을 마련할 길을 제공한 것이다. 그러나 떠날 수 있는 사람에게 문을 여는 일과, 남아 있거나 떠날 수 없는 사람의 자유를 지키는 일 사이에는 여전히 큰 거리가 있다.

웡이 감옥에서 시간을 보내는 동안에도 영국과 중국의 외교는 계속됐다. 영국 정부는 2026년 1월 런던 옛 왕립조폐국 부지에 들어설 중국의 새 대사관 건립을 승인했다. 정부는 독립적인 심사와 도시계획 절차에 따른 결정이라고 설명했다. 이 사안을 홍콩 수감자 문제와 직접 맞바꾼 거래라고 단정할 근거는 없지만, 중국과의 관계를 관리하려는 현실적인 선택 옆에 홍콩의 자유를 지키겠다는 약속을 놓고 보면 영국 외교가 마주한 긴장이 드러난다.

그 긴장은 영국 국적자인 빈과일보 창업자 지미 라이의 사건에서도 나타났다. 그는 2026년 2월 외국 세력과의 결탁 공모 등 혐의로 징역 20년을 선고받았다. 영국 정부는 당시 일흔여덟 살이던 그에게 사실상 종신형이나 다름없다며 반발했지만, 강한 규탄의 문장만으로 그의 감옥 문이 열리지는 않았다.

웡의 판결 뒤 휴먼라이츠워치는 탄압에 책임이 있는 관리들을 겨냥한 제재를 각국 정부에 요구했다. 웡을 오랫동안 감옥에 머물게 한 혐의가 외국에 제재를 요청했다는 것이었는데, 그 판결에 대응하는 국제사회의 요구 역시 제재가 된 셈이다. 홍콩의 정치적 공간이 닫힐수록 바깥을 향한 호소가 커지고, 당국은 그 호소를 다시 외부 개입의 증거로 읽는다. 그 사이에서 길어지는 것은 수감자들이 감당해야 할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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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 라이치콕 구치소에서 교정 당국의 호송을 받는 조슈아 웡. 출처: 中国新闻社, CC BY 4.0

 

한 소년이 도시에 남긴 궤적

 

감옥 안에서도 웡의 삶이 완전히 멈춘 것은 아니다. 그는 책을 읽고 대학 과정을 공부하며 기타를 익히고 있다고 한다. 함께 수감된 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치기도 한다는 소식이 전해지기도 했다. 세상은 그를 상징으로 부르지만, 상징이 된 사람도 하루를 살아내기 위해 배우고 움직이며 자신의 시간을 채운다.

홍콩의 지난 시간을 한 사람의 성장에 모두 담을 수는 없다. 그곳에는 이름이 널리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시민의 선택과 상실이 있고, 시위의 기억을 서로 다르게 간직한 사람들도 살아간다. 그럼에도 웡의 궤적을 따라가다 보면 도시가 겪은 변화가 유난히 선명해진다. 열네 살에는 학교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지를 놓고 싸웠고, 열일곱 살에는 누가 도시의 지도자가 될 수 있는지를 물었으며, 서른 살에는 다시 10년의 형량을 들었다.

현재의 일정대로 그가 감옥 문을 나서는 2036년은 홍콩 반환으로부터 39년이 지난 해다. 반환 당시 약속한 50년 가운데 11년이 남아 있게 된다. 그 숫자는 제도가 만료되는 날짜를 헤아리기 전에, 그 약속 아래 살아온 사람들의 시간을 먼저 돌아보게 한다. 자유가 유지될 것이라던 세월의 상당 부분을 감옥에서 보내게 된 사람에게, 남은 기간의 보장은 어떤 의미로 들릴까.

그날의 홍콩이 어떤 모습일지는 아직 알 수 없다. 우산 아래 함께 섰던 이들 가운데 누가 도시에 남아 있을지, 누가 먼 나라에서 소식을 기다릴지도 알 수 없다. 다만 한때 소년이었던 사람이 마흔의 나이로 걸어 나올 때, 그의 눈앞에는 자신이 기억하던 도시와 오랫동안 상상해온 도시가 겹쳐 보일 것이다.

영국이 그때까지 간직하고 있어야 할 것은 약속을 상기시킨 성명의 목록만은 아닐 것이다. 자신이 서명한 약속이 한 사람의 생애 속에서 어떤 모습으로 남았는지, 그 시간을 지키기 위해 무엇을 했는지에 대한 대답도 있어야 한다. 조슈아 웡이 감옥 문을 나서는 날, 그를 기다리는 것은 자유로워진 한 사람을 맞을 준비가 된 도시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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