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영박물관엔 없는 이야기들

기억을 재판하다, 초우항텅과 홍콩의 마지막 촛불

케임브리지 대학의 지구물리학도는 어쩌다 홍콩에서 국가전복이라는 죄명 앞에 서게 되었나

2026.08.22 | 조회 1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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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태준

“영국은 전체주의적이고 공격적인 중국의 위협 앞에서, 더 단호한 태도를 취해야 할 위임할 수 없는 의무가 있다.”

감옥에서 쓴 편지치고는 문장이 지나치게 단단했다. 아니, 어쩌면 감옥에서 썼기 때문에 그토록 단단할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른다.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지진을 공부했던 한 여성이, 홍콩의 좁은 독방 안에서 영국 총리 앤디 버넘(Andy Burnham)에게 보내는 편지를 썼다. 그녀는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그들은 홍콩의 역사를 다시 쓰려 한다... 그들은 분명 어떤 기억들을, 우리 역사의 어떤 장(章)들을 지우고 싶어 한다.”

편지의 수신인은 국가 원수였지만, 편지의 진짜 수신인은 어쩌면 시간 그 자체였을 것이다.

그녀의 이름은 초우항텅(鄒幸彤, Chow Hang-tung), 41세. 8월 21일, 홍콩의 법정은 그녀에게  “국가전복 선동” 혐의로 유죄를 선고했다. 이 사건은 2020년 베이징이 홍콩국가보안법을 시행한 이후 벌어진 재판 중에서도 가장 상징적인 사건으로 꼽힌다.

한국 독자에게는 낯선 이름일 수 있다. 그러나 그녀의 인생 궤적을 따라가다 보면, 이 사건이 단지 한 활동가의 구속이 아니라 한 도시 전체의 운명이 응축된 이야기라는 것을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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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우항텅. 출처: Chinese Human Rights Defenders

 

지구 물리을 연구하던 소녀

 

초우항텅은 1985년, 아직 영국령이던 홍콩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총명했던 그는 홍콩의 명문 여학교인 잉와여자중학(Ying Wa Girls’ School)을 거쳐 케임브리지 대학교에 진학해 지구물리학을 공부했다. 한때 그의 관심은 인간이 아니라 땅속 깊은 곳을 향해 있었다. 보이지 않는 힘이 어떻게 지각판을 밀어 움직이고, 그 작은 균열이 어느 순간 거대한 지진으로 모습을 드러내는지를 탐구했다. 훗날 변호사가 된 그가 중국 공산당의 움직임을 두고도 “과거 지각판을 관찰하듯 냉정하고 정밀하게 들여다본다”는 평가를 받게 되리라고는, 당시의 그 자신조차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가 6월 4일의 촛불을 처음 만난 것은 훨씬 이전, 아직 세상을 정치의 언어로 이해하기 전의 일이었다. 어머니 메디나 초우 라우와춘(Medina Chow Lau Wah-chun)은 해마다 딸의 손을 잡고 홍콩 빅토리아 공원에서 열리는 천안문 추모 집회로 향했다. 어머니의 오랜 벗들 틈에서 자란 어린 초우에게 촛불을 밝히는 일은 처음부터 거창한 저항의 선언이라기보다, 해마다 되풀이되는 가족의 의식에 가까웠다. 누군가를 잊지 않기 위해 한자리에 모이고, 어둠 속에서 작은 불빛 하나를 지켜내는 일이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그 촛불은 점차 다른 무게를 갖게 된다. 기억은 정치가 되었고, 추모는 저항이 되었다. 그리고 오래전 딸의 손을 잡고 촛불을 밝히던 어머니 역시 훗날 그 딸과 함께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체포된다. 어린 시절부터 모녀가 함께 지켜온 작은 불빛은, 결국 두 사람을 같은 법정의 문턱까지 이끌었다.

그의 삶의 방향이 결정적으로 바뀐 것은 케임브리지에서 박사과정을 밟던 2008년이었다. 그해 5월 중국 쓰촨성을 거대한 지진이 덮쳤고, 수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지구물리학을 연구하던 초우는 처음에는 과학자의 눈으로 재난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곧 그의 시선을 붙든 것은 땅속에서 충돌한 지각판만이 아니었다. 너무도 쉽게 주저앉은 학교 건물들, 그 잔해 아래에서 숨진 수많은 아이들, 그리고 부실 공사의 책임을 묻는 목소리를 억누르고 진실을 가리려는 정치적 통제가 그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에게 그것은 하나의 지진이 끝나고 난 뒤 찾아온 또 다른 균열이었다. 자연의 힘은 과학으로 설명할 수 있었지만, 인간이 만든 침묵과 은폐는 다른 언어를 요구했다. 과학이 진실을 밝힐 수 있어도, 그 진실을 말할 자유까지 지켜주지는 못한다는 사실을 그는 그때 절감했다. 결국 초우는 박사과정을 중도에 내려놓고 홍콩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지각의 움직임을 연구하던 물리학자가, 이제는 권력 아래 눌리고 밀려나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여다보기로 한 순간이었다. 그렇게 그의 삶은 지구물리학에서 법으로, 자연의 균열을 읽는 일에서 사회의 균열을 마주하는 일로 방향을 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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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 12인 사건’을 지원하던 초우항텅의 모습. ‘홍콩 12인’은 2020년 8월 홍콩에서 배를 타고 대만으로 향하다 중국 해경에 붙잡힌 반정부 활동가 등 12명을 가리킨다. 이들 가운데 10명은 이후 중국 본토에서 불법 월경 등의 혐의로 징역형을 선고받았고, 미성년자 2명은 홍콩으로 송환됐다. 출처: Iris Tong - https://www.voachinese.com/a/hk-concern-group-condemning-chinese-authorities-oppression-of-lawyers-20210104/5723976.html, Public Domain

 

하나의 광장, 서른 해의 촛불

 

1989년 6월 4일, 북경의 천안문(天安門) 광장. 그해 봄, 정치 개혁과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며 학생과 시민 수십만 명이 모여들었던 광장에 탱크와 군 병력이 진입했다. 중국 정부는 시위를 무력으로 진압했고, 그날 얼마나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는지는 지금까지도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이후 중국 본토에서 6월 4일은 하나의 날짜이면서 동시에 입 밖에 내서는 안 되는 기억이 되었다. 사건을 말하는 것조차 금기가 되었고, 기억은 검열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오랫동안 중국 안에는 그 금기가 완전히 미치지 못하는 두 곳이 있었다. 홍콩과 마카오였다. 특히 1997년 영국에서 중국으로 반환된 홍콩은 ‘일국양제(一國兩制)’라는 약속 아래 본토와 다른 제도와 자유를 유지했다. 언론과 집회의 자유, 독립적인 사법제도가 보장된 그 틈에서 홍콩 사람들은 해마다 6월 4일이면 빅토리아 공원으로 향했다. 어둠이 내려앉은 공원에 수만 개의 촛불이 하나둘 밝혀지면, 중국의 다른 어느 도시에서도 공개적으로 불러낼 수 없었던 기억이 그곳에서만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그 불빛을 30년 넘게 지켜온 단체가 ‘홍콩시민지원애국민주운동연합회’, 이른바 홍콩 얼라이언스(香港市民支援愛國民主運動聯合會)였다. 해마다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촛불을 밝히는 일은 단순한 추모를 넘어섰다. 망각을 강요하는 권력 앞에서 기억을 이어가는 일이었고, 사라진 사람들의 이름을 다시 세상으로 불러내는 일이었다.

홍콩으로 돌아온 초우항텅은 2010년 이 단체의 자원봉사자가 되었다. 그러나 처음부터 자신의 삶을 얼라이언스에 걸 생각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훗날 그는 한때 단체를 떠나 중국 본토의 인권 활동에 더 직접적으로 참여하고 싶었다고 회고했다. 홍콩에서 이어지는 추모 방식이 본토 사람들이 마주한 현실과 다소 멀리 떨어져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역사는 그를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 2014년 우산운동(雨傘運動)이 홍콩 사회를 뒤흔든 뒤, 얼라이언스에서는 활동가들이 잇따라 떠났다. 새로운 세대를 이끌 젊은 사람이 절실해졌고, 단체는 초우를 붙잡았다. 결국 그는 2015년 부주석으로 선출됐다. 당시에는 하나의 직책에 불과했을 그 자리가 훗날 그를 법정으로, 그리고 감옥으로 이끄는 길이 되리라고 누가 알았을까.

초우의 삶 바깥에서도 그 대가는 이어지고 있다. 그의 약혼자 우(吳)씨는 현재 광둥성에서 경찰의 삼엄한 감시를 받으며 살아가고 있다. 두 사람이 서로의 안부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은 편지뿐이다. 그는 초우를 처음 만났던 순간을 떠올리며, 그때부터 그가 놀라울 만큼 순수하고 깊은 연민을 지닌 사람이며 중국의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한 운동에 깊이 공감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고 회고했다.

어쩌면 초우에게 촛불은 처음부터 거창한 상징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어린 시절 어머니의 손을 잡고 찾았던 빅토리아 공원에서, 그것은 단지 누군가를 잊지 않기 위해 켜는 작은 불빛이었다. 그러나 한 해가 지나고 또 한 해가 지나면서 그 불빛에는 점점 더 많은 의미가 쌓였다. 추모는 기억이 되었고, 기억은 저항이 되었으며, 마침내 그 저항은 한 사람의 자유와 맞바꾸어야 할 만큼 무거운 것이 되었다.

서른 해 동안 빅토리아 공원을 밝혔던 것은 결국 촛불 자체가 아니었다. 잊지 않겠다는 사람들의 의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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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천안문 추모 시위에 참석한 초우항텅. 출처: 美國之音湯惠芸 - https://www.voacantonese.com/a/hk-alliance-june-4th-incident-exhilibition-at-palace-museum-mural-live-q-and-a/3668587.html, Public Domain

 

자유가 죄가 되던 날

 

2019년, 홍콩의 거리는 다시 사람들로 가득 찼다. 범죄인 인도 조례 개정에 반대하는 시위는 어느새 한 세대 전체가 자신의 도시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를 묻는 거대한 운동으로 번졌다. 그리고 이듬해인 2020년 6월, 베이징은 홍콩에 국가보안법을 전격 시행했다. 국가 분열, 정권 전복, 테러 활동, 외국 세력과의 결탁. 새로 만들어진 네 개의 죄목은 넓고 모호한 언어로 쓰여 있었다. 무엇이 국가를 위협하는 행위인지, 어디까지가 표현이고 어디서부터가 범죄인지 그 경계는 선명하지 않았다. 한 편의 글도, 하나의 구호도, 어둠 속에 켜진 작은 촛불 하나도 법의 해석에 따라 ‘전복’이라는 이름을 얻을 수 있는 시대가 시작됐다.

그 법이 시행된 지 1년여가 지난 2021년 9월, 초우항텅은 체포됐다. 공교롭게도 그 순간 그는 동료 활동가 궈나이(Gwyneth Ho)의 보석 신청을 준비하고 있었다. 누군가의 자유를 되찾기 위해 서류를 들여다보던 변호사가, 몇 시간 뒤에는 자신의 자유를 잃는 사람이 되었다. 그날 이후 그는 감옥을 떠나지 못했다. 

지난 1월 시작된 재판은 24일 동안 이어졌다. 초우는 변호인을 따로 선임하지 않고 직접 자신의 변론을 맡았다. 그의 곁에는 홍콩 노동운동의 오랜 지도자인 69세 리척얀(李卓人, Lee Cheuk-yan)과 74세의 전 국회의원 앨버트 호(何俊仁, Albert Ho)가 함께 피고인석에 섰다. 앨버트 호는 지난 1월 혐의를 인정했지만, 초우와 리척얀은 끝까지 무죄를 주장하며 법정 다툼을 이어갔다.

초우는 법정에서 자신이 심판받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 오히려 심판대에 오른 것은 이 법 자체라고 했다.

검찰이 문제 삼은 것은 홍콩 얼라이언스가 오랫동안 내걸어온 구호, ‘일당 독재 종식(結束一黨專政)’이었다. 수십 년 동안 홍콩의 거리와 추모 집회에서 반복돼온 그 문구는 이제 국가전복 혐의의 핵심 증거가 됐다. 법원은 이 구호가 시민들로 하여금 중국 공산당에 대한 신뢰를 잃게 하고 적대감과 분열을 조장하려는 의도를 담고 있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국제앰네스티는 이 사건이 모호하고 지나치게 광범위하며 자의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 ‘전복’의 개념에 기대고 있다고 비판했다.

같은 문장을 두고 한쪽에서는 국가를 무너뜨리려는 의도를 읽었고, 다른 쪽에서는 정치적 표현의 자유를 보았다. 결국 법정에서 다투어진 것은 몇 글자로 이루어진 구호만이 아니었다. 한 사회에서 권력을 비판할 자유가 어디까지 허용되는지, 기억하고 말하고 반대하는 행위가 어느 순간 범죄가 되는지를 묻는 싸움이었다.

재판정 밖에서는 며칠씩 줄을 서며 방청을 기다리는 시민들이 있었다. 그중 한 사람은 이 사건이 국가보안법을 통해 베이징이 홍콩의 시민사회를 어떻게 다시 만들어가고 있는지를 보여준다고 말했다. 법정 안에서는 몇몇 피고인의 유무죄를 가리는 재판이 진행되고 있었지만, 그 문밖에서 기다리던 사람들에게 그것은 한 도시가 자신에게 허락된 자유의 경계를 확인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초우를 바라보는 시선은 극명하게 갈린다. 누군가는 그를 ‘홍콩의 진짜 딸’이라 부르며 존경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오랫동안 문제를 일으켜온 ‘말썽꾼’이라고 말한다. 어느 쪽에도 서고 싶지 않다는 사람들조차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 종종 비슷한 말을 남긴다고 한다.

“저렇게 똑똑한 사람이, 참 아깝다.”

그러나 어쩌면 그 탄식 속에는 초우라는 한 사람을 향한 안타까움보다 더 큰 것이 담겨 있는지도 모른다. 한때 지구의 움직임을 연구하던 과학자가 변호사가 되고, 변호사가 기억을 지키는 활동가가 되고, 마침내 자신의 신념을 변론해야 하는 피고인이 된 시간. 그리고 그 변화와 나란히, 한때 촛불과 구호를 허락했던 도시 역시 조금씩 다른 모습으로 변해왔다.

초우의 재판이 묻고 있는 것은 결국 단순하다. 한때 자유라고 불렸던 것이, 언제부터 죄가 되었는가.

초우항텅의 2021년 블룸버그와의 인터뷰. 아래는 인터뷰 전문 및 해석.

I mean, prison can take away your physical freedom. You can't take away your freedom in your mind, in your heart, right? But if you have to live your life outside being submissive all the time, I would prefer jail.

감옥은 사람의 육체적인 자유를 빼앗을 수는 있어요. 하지만 머릿속의 자유, 마음속의 자유까지 빼앗을 수는 없잖아요. 그렇죠? 그런데 감옥 밖에서 살아가기 위해 늘 굴복하며 살아야 한다면, 저는 차라리 감옥에 가는 편을 택할 것 같아요.

 

I think the '89 democratic movement is actually a movement that Hong Kong people directly participated in. It's not just something you watch on TV. Hong Kong people went on the street in massive numbers. I mean, the biggest protest ever at that time in Hong Kong, where you got a million people on the street.

저는 1989년 민주화 운동이 홍콩 사람들이 직접 참여했던 운동이었다고 생각해요. 단순히 TV를 통해 지켜보기만 했던 일이 아니었죠. 홍콩 시민들이 정말 엄청난 규모로 거리로 나왔어요. 당시 홍콩 역사상 가장 큰 시위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100만 명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으니까요.

 

Something that touched the Hong Kong people in a very intimate way. And very sadly, Hong Kong people seem to have been passed on the torch of preserving what happened, what's the truth, preserving the memory of those who were killed, preserving the movement that we still want democracy in China. It also became part of the Hong Kong people's movement and struggle and identity, I would say.

그 사건은 홍콩 사람들의 마음을 아주 깊이 건드렸어요. 그리고 참 슬프게도, 그 뒤로 홍콩 사람들이 일종의 횃불을 이어받게 된 것 같아요. 당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진실이 무엇이었는지를 지키는 일, 희생된 사람들에 대한 기억을 지키는 일, 그리고 우리가 여전히 중국의 민주화를 원한다는 그 운동의 뜻을 지키는 일이요. 결국 그것은 홍콩 사람들의 운동과 투쟁, 그리고 정체성의 일부가 됐다고 생각합니다.

 

Since the protests and the assemblies have been objected to by the police, so what we have to do is to act in accordance with the law.

시위와 집회에 대해 경찰이 계속 반대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법에 따라 행동하는 겁니다.

 

I think the biggest failure in that is that it actually banded people together. The greater the suppression, the more absurd all the government action is, people will be more against the government.

그런데 저는 그게 정부의 가장 큰 실패라고 생각해요. 오히려 사람들을 하나로 뭉치게 만들었거든요. 탄압이 심해지고 정부의 행동이 터무니없어질수록, 사람들은 정부에 더 강하게 반발하게 됩니다.

 

Oh, I think a lot of well-meaning friends are telling me not to do this, don't do this, don't sacrifice yourself, be careful, and things similar along that line. That, well, you can still do a better job by being a lawyer, say, that sort of thing. Which I accept that they are all well-meaning. Somehow, not what I really want to hear right now.

저를 진심으로 걱정해주는 많은 친구들이 이런 말을 해요. “이건 하지 마라. 저건 하지 마라. 스스로를 희생하지 마라. 조심해라.” 그리고 비슷한 맥락에서, “변호사로 계속 일하는 편이 오히려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이야기도 하죠. 그 사람들이 모두 좋은 뜻에서 그런 말을 한다는 건 알아요. 하지만 이상하게도, 지금 제가 정말 듣고 싶은 말은 그런 게 아니에요.

 

I'm expecting, like, arrest or prosecution, but it is still a very real worry that you have to face because you can't plan for it. I'm thinking whether I should go back home or not, not because I'm afraid of getting arrested, because, say, I don't want the police to come and disturb my grandma and frighten her. It's a stress.

저는 체포나 기소 같은 일이 닥칠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실제로 마주해야 하는 걱정은 여전히 존재합니다. 그런 일은 미리 계획할 수가 없으니까요. 요즘은 집에 돌아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도 고민해요. 제가 체포되는 게 무서워서가 아니에요. 경찰이 집에 찾아와 할머니를 괴롭히거나 겁먹게 만들고 싶지 않아서예요. 그런 것 자체가 굉장한 스트레스죠.

 

That's the clever thing about the NSL, actually. The more vague it is, the more it can instill fear into people's hearts.

사실 국가보안법의 영리한 점이 바로 그거예요. 법이 모호하면 모호할수록 사람들의 마음속에 더 큰 두려움을 심어놓을 수 있어요.

 

If I can stay out of jail, I have to compromise all my principles. I have to not say anything about universal [suffrage], not say anything about them. I think that is more demeaning.

만약 감옥에 가지 않기 위해 제 모든 원칙을 타협해야 한다면, 보통선거에 대해서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들에 대해서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아야 한다면, 저는 오히려 그게 더 굴욕적인 일이라고 생각해요.

 

All my friends are in jail right now. I can see a lot in there, so it's not that lonely.

지금 제 친구들은 거의 다 감옥에 있어요. 그러니 제가 들어가더라도 아는 사람이 많겠죠. 그렇게 외롭지는 않을 거예요.

 

케임브리지, 그리고 갚지 못한 약속

 

초우항텅이 감옥에서 영국 총리에게 보낸 편지의 뒤에는 홍콩을 둘러싼 영국의 오래된 책임이 놓여 있다.

1984년 영국과 중국은 홍콩 반환을 앞두고 ‘중영 공동선언(Sino-British Joint Declaration)’에 서명했다. 중국은 이 문서를 통해 1997년 반환 이후에도 50년간 홍콩의 기존 사회·경제 체제와 권리, 자유를 유지하겠다고 약속했다. 선언은 유엔에 등록된 국제조약이었다. 홍콩을 중국에 넘기는 과정에서 영국이 받아낸 가장 중요한 보증이자, 반환 이후 홍콩의 미래를 떠받치도록 설계된 약속이었다.

초우는 그 선언이 체결된 이듬해 태어났다. 다시 말해 그녀의 삶은 거의 정확히 그 약속의 시간과 겹친다. 홍콩이 누려온 자유 속에서 성장했고, 그 자유를 행사한 일로 결국 수감됐다. 그렇기에 그런 그녀가 영국 총리에게 편지를 보냈다는 사실이 상징적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영국에 새로운 의무를 요구하는 편지라기보다, 이미 서명했던 문서의 의미를 다시 묻는 편지에 가깝기 때문이다.

영국 정부도 이번 판결을 중영 공동선언과 연결해 비판했다. 외무부의 인도태평양 담당 장관 로지 윈터턴(Rosie Winterton)은 평화로운 추모 활동이 국가안보 위협으로 취급되고 있다며, 국가보안법의 광범위한 적용이 공동선언 아래 보장됐던 권리와 자유를 훼손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영국은 국가보안법의 폐지와 홍콩 시민의 기본적 자유 존중을 다시 촉구했다.

프랑스와 독일 역시 공동 성명을 통해 “평화로운 인권 옹호는 범죄가 되어서는 안 된다”며 판결에 유감을 표했다. 초우는 2023년 두 나라가 공동으로 수여하는 인권상을 받은 인물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대목에서 더 중요한 것은 국제사회의 비판 자체가 아니다. 초우의 사건이 영국에 던지는 질문이다.

홍콩을 넘겨주며 약속받았던 자유가 사라져가는 것을 지켜보는 것만으로, 영국의 책임은 끝나는가.

초우의 편지는 바로 그 질문을 런던으로 되돌려 보낸다. 중영 공동선언이 여전히 살아 있는 약속이라면, 그것은 과거의 외교문서가 아니라 현재의 책임이어야 한다.

성명과 유감 표명은 이미 충분히 나왔다. 이제 남는 것은 그 약속이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느냐는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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