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초부터 내가 사는 강원도 고성의 다양한 여성들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기록하고 있다. 왜 여성인가 묻는다면 그럴듯한 멋진 대답을 꺼내보고 싶지만 사실 내게 뚜렷한 이론은 없다. 그저 내가 여성으로서 이 지역에서 아이를 돌보고, 교육을 책임지고, 숙소를 운영하면서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대체 다른 엄마들은 여기서 어떻게 살고 있는 거야’ 불쑥불쑥 질문이 올라왔을 뿐이다. 돌봄의 공백이 생길 때마다 가장 먼저 일상이 흔들리고, 문화적 고립을 느낄 때마다 조용히 견디고, 어딘가 모르게 겉돌고 있는 것 같은 불안감이 들 때면 나보다 훨씬 오래, 다른 방식으로 이 지역을 살아온 여성들은 어떻게 버텼을까, 어떻게 살아왔을까 묻고 기대고 싶었다.
인터뷰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지역 여성의 삶과 정동을 다룬 권수빈 선생님의 글*을 읽게 됐다. 그는 지방 소멸 담론이 지역 여성에게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분석하기 위해 지역에 있는 여성 동료들을 인터뷰한다. 그의 글에는 아메드의 “행복의 약속”이 자주 거론되는데 사라 아메드는 행복의 약속이 우리 주변을 둘러싼 세계가 형성되는 방식에 영향을 미치고, 행복에 대한 기대는 미래에 대한 특정 이미지를 심어줌으로써 행복으로 안내할 특정 가치, 실천, 스타일, 열망 같은 대상을 생산한다고 했다.**
*권수빈, “지역 여성의 삶에서 이동과 정동의 다른 차원을 열기”, 웹진 <비유> 79호(2026. 5-6월호). https://www.sfac.or.kr/literature/epi/E0000/epiView.do?epiSeq=1397
** 사라 아메드, 《행복의 약속: 불행한 자들을 위한 문화비평》, 성정혜·이경란 옮김, 후마니타스, 2025, 59쪽. 재인용
권 선생님은 “성공을 위해선 반드시 서울에 가야만 한다는 상상, 거기는 이곳과 분명히 다르리라는 행복의 약속”이 “지역에 사는 청년을 열망이 없는 잔류자나 실패자로 묘사하게 된다”고 말한다. 그는 이 이론을 토대로 “지역-젠더의 교차적이고 구조적인 불평등”이 어떻게 “저출산=지방 소멸 담론과 만나 집, 가정, 일터, 지역사회에 이르기까지 지역 여성들의 삶 주변의 장소를 구성”하는지를 파헤친다. 그 과정에서 지역 여성들이 가지는 “장소에서 경험하는 쓸쓸함, 이곳에 살지만 벗어나 있고 겉돌고 싶지 않지만 가까이 가기에는 부대끼는, 다른 곳으로 가고 싶으면서 안착하고 싶다는 이중 감각”에 주목한다.
탈지방 담론에서 소외된 여성들의 이야기를 다루는 그의 작업이 내 작업의 출발점과 너무 닮아 있어서 공부하듯 읽었다. 물론 나는 권 선생님처럼 깊이 있는 연구를 하는 사람이 아니고, 짧은 시간 동안 한정된 인원의 사람을 만나서 이야기를 듣는 게 전부지만 공감 가는 대목이 참 많았다.
하지만 여러 질문 또한 생겼다. 지방 소멸 담론 자체가 가임기 청년 인구에 집착하는 구조이다 보니 분석도 그 틀 안에서 움직일 수밖에 없겠지만 그 프레임에 잘 들어맞는 사례들을 모은 측면이 있지 않나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불안과 실패감, 이중 구속같은 ‘못난 감정’들은 나 역시 겪어왔고, 겪고 있는 것들이어서 분명 유효하게 배치되었다 생각하지만 결과적으로 지역 여성의 정동이 결핍과 저항 사이에서만 서술되는 것은 아닌지, 그리고 그런 방식을 나의 인터뷰 작업에서 내가 재현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문득 마음이 무거워지기도 했다. 돌아보면 내가 만난 사람들 중에는 그 구조 안에 들어오지 않는 사람들이 더 많았기 때문이다.
혼자 이주해서 카페를 운영하는 삼십 대 여성은 스스로 주변부에 있기로 결정한 사람이라고 했다. 비혼 여성으로서 떠나는 방향이 서울이 아닌 고성이었고, 그 전에도 계속해서 서울에서 멀어지는 방향으로(제주) 이동했다. 중학교 때부터 선생님과 싸웠고, 회사와 싸웠고, 처음 차린 가게를 혼자 지켜냈다. “행복의 약속” 구조 안에서는 지역 여성들이 "세상에서 나만 혼자인 기분"을 느낀다고 했는데 이 여성 역시 "세상에서 정말 나만 혼자인 기분이 들 때도 있고요." 라는 말을 한다. 그런데 동시에 혼자 하는 삶이 자신과 잘 맞는다고도 하며 이 두 감각이 어떻게 공존하는지 삶으로 드러낸다. 혼자인 것을 선택했지만 외로움은 선택하지 않은 사람의 감각은 주변부를 응시하는 힘이된다.
파트너와 함께 이주한 30대 예술가는 서울 중심부 미술계보다 여기서 진짜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고 했다. 지도에서 바다 옆에 있는 집을 찾아 온 도예가는 10년째 발달장애인과 흙을 만지는 수업을 이어가고 있다. 이 지역 학교에서 오랜 시간 아이들을 가르쳐온 교사가 있고, 지속 가능한 지역 문화를 만들기 위해 애쓰는 기획자가 있다. 이들은 자발적으로 지역으로 온 청년들이었고, 이들의 마음에는 후회나 실패감 보다 평온함과 희망을 품은 자리가 더 커 보였다.
인터뷰를 하면서 막상 내 마음에 오래도록 걸리는 이야기는 따로 있었다. 지방 소멸이라는 말이 생기기 훨씬 전부터 이 땅을 살아온 사람들. 팔십 대 여성이 있다. 아홉 살부터 나물을 이고 속초까지 걸어서 팔러 다녔고, 여덟 살에 전쟁 중 부모와 헤어졌다. 62세에 운전면허를 땄고, 그게 일생에서 제일 기쁜 날이었다고 했다. 삼십여 년을 어촌에서 살아온 육십 대 여성이 있다. 결혼과 함께 낯선 어촌으로 왔고, 그 시절엔 우울증이라는 단어조차 없었다. 연년생 아이 둘을 키우며 성게를 까고 그물 일을 하고 어린이집과 공장을 전전하다 허리를 다쳤다. 마흔 해를 산골 교회에서 보낸 칠십 대 여성도 있다. 석호 개발 반대 운동으로 교회차에 오물이 발리던 날도, 마을 사람들이 쫓아내야 한다고 모인 날도 있었다. 그래도 떠나지 않고 주변 사람들을 살뜰하게 살피고 돌보며 자리를 지켜왔다.
이분들의 삶에서 서울은 처음부터 선택지가 아니었다. 떠남과 남겨짐의 구도는 해당하지 않눈다. 그동안 지방 소멸 담론은 지역 여성을 특정 연령, 특정 감정, 특정 이동 방향으로 좁게 호명해왔다. 담론이 이분들의 삶을 포착하지 못하는 것은 담론이 생기기 전부터 이미 여기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성이 전혀 다른 모습이던 시절부터 지금까지 살아온 분들인데 그 시간의 두께만큼 내가 글로 충분히 표현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면 마음이 자꾸만 작아지고 송구함만 커진다.
나 역시 아메드의 “행복의 약속” 구조 안에 있다. 서울을 버티지 못해 이주해 온 사람이고, 숙소를 운영하며 관광객을 맞이하고, 가끔 서울을 동경하며 이 곳에 곁을 온전히 주지 않는 사람. 그런 내가 이 지역의 이야기를 기록하겠다는 것 자체가 모순을 피할 수 없는 노릇이다. 지역이라는 큰 주제를 다룰 깜냥은 없고 그저 '나'의 문제에서부터 시작했고, 지금도 그 자리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다만 바라는 것은 지역이 비로소 모두의 것에 가까워지는 데에 내 작업이 반의 반 걸음 정도라도 보탬이 되었으면 하는 것이다. 이 지역으로 이주해 온 여성, 아이를 키우며 고립감을 견뎌온 여성, 담론이 생기기 전부터 이미 살아온 여성, 떠나고 남겨진 게 아닌 ‘사는’ 여성, 여러 모순을 안고도 오늘을 살아가는 다양한 여성의 이야기가 어디에서든 다정하게 얽히기를 바란다.

/문슬아(스라봉)
강원도 고성에서 두 아이를 키우며 작은 민박을 운영합니다. 일상에서 길어올린 마음과 갈등을 글로 쓰고, 지구가 끝나가도 다정함을 잃지 않는 고유하고 근사한 사람들을 인터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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