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환된 캠프페이지 터를 강원도 도청사 신축 부지로 활용하겠다는 결정이 난 이후로 토양 오염 이슈에서 도청사 신축으로 국면이 전환된 지금, 지역 사람들은 캠프페이지라는 공간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햇빛이 제법 훈훈하게 느껴졌던 어느 날, 이기찬 강원피스투어 대표를 만났다. 그는 춘천에서 태어나 아주 어렸을 때 서울로 이주했다가, 2012년부터 다시 춘천에서 살고 있다.
“공유지로서 이 지역을 되찾거나 돌려받았을 때, 재미있는 평화적인 상상이나 삶의 터로서의 열망을 가진 분도 분명히 계실 텐데, 전체적으로 봤을 때 그렇게 크지 않은 것 같아요. 재산권을 침해받거나, 어떤 추억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없는 것이죠.”

춘천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지는 않았지만, 춘천에 큰집이 있어서 거의 모든 명절에 항상 춘천을 방문했다는 이기찬 대표. 춘천역 앞을 지나갈 때마다 긴 담벼락과 그 너머로 언뜻언뜻 보이는 헬기나 막사는 그에게 신기하게 다가왔다. 그게 전부였다. 캠프페이지가 주둔했을 때의 기억은 이기찬 대표에게 그리 크게 자리 잡지 않았다. 오히려 2012년 이후에 춘천에서 살면서 캠프페이지를 제대로 인지하기 시작했다.
“2012년에 이주하고 아이를 키우면서 캠프페이지 꿈자람 어린이공원에 가서 자주 놀았어요. 춘천에 다른 공원도 많지만, 캠프페이지에는 공공 놀이방을 굉장히 크게 만들어놨거든요. 어떻게 보면 제 일상과 캠프페이지가 연결된 것은 그때가 처음인 것 같아요.”
그는 춘천문화원 춘천학연구소가 발간한 연구물 <한국전쟁과 춘천>에 참여하기도 했는데, 이를 위해 ‘춘천 토박이’들을 만나 캠프페이지에 얽힌 기억과 감각의 차이를 직접 경험하기도 했다.
“의견이 갈리더라고요. 효자동이나 퇴계동처럼 캠프페이지와 먼 곳에서 살았으면 사실 캠프페이지가 삶에 그렇게 큰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하지만 근화동처럼 캠프페이지 근처에 살면서 매일 뜨고 내리는 헬리콥터나 미군들 때문에 생활에 있어서 피해, 불편이나 이질감을 많이 느꼈던 분들이 있더라고요.”
이기찬 대표는 캠프페이지가 ‘이미 있는 곳’이라고 했다. 또한 기지 주변에 터를 잡고 있던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특별히 인식하지 못하는 공간이라고 했다. 그가 느끼기에 미군기지가 들어서면서 그 자리에 있던 ‘삶의 터전’을 헤쳐야 했던 매향리*나 대추리**와는 토지에 대한 애착이 다르다고 했다.
“한국전쟁이 터지고, 전선이 고착화되면서 중부 전선을 지원하는 후방 미군기지로서 캠프페이지가 본격적으로 자리 잡고 규모를 키우기 시작한 거죠. 하지만 해방 직후에도 춘천은 아주 조그마한 도시였는데요. 그래서인지 미군기지가 들어선 땅이 ‘우리의 것이다, 우리 땅을 빼앗겼다’는 인식은 별로 하지 못했을 것 같아요. 어쨌든 미군이 우리를 지켜줬다는 생각을 했을테니까요. 그렇게 50년 넘게 그 자리에 기지가 있다보니, 미군기지는 원래 있는 것처럼 인식이 됐고요.”
그는 기지 반환도 미군기지가 차지한 공간을 되찾기 위한 의미라기보다, 마침 제기된 기지 재배치라는 시대적 흐름과 지역 발전을 위한 요구가 결합 된 역동이라고 해석했다. 미군기지 반환을 ‘주한미군 철수’로 감히 연결하지 못했던, 과거 사회의 반공주의 흐름도 크게 작용했다고 덧붙였다.
“반환에 대한 목소리도 강하게 올라왔다기보다, 지역 발전을 위해 진보 보수 막론하고 뭉쳤던 것 같아요. 이전에는 반공과 권위주의 정권을 겪으면서 기지에 대한 피해나 불편함을 표현하지 못했죠. 그래서 당시에도 주한미군 철수가 아니라 때마침 기지 재배치를 하니까 ‘시민의 품으로 내놔라’했던 거죠. 무상 반환은 안 된다고 하니, 그럼 돈이라도 주고 어서 찾아오자고 됐던 거죠."
이기찬 대표는 기지가 반환되기는 했지만, 캠프페이지가 자리 잡기 이전의 토지에 대한 기억이 없다보니, 그 땅을 ‘예전처럼 일구고 싶다’는 강한 애착이나 여론도 크지 않다고 파악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최근에 제기된 도청사 신축 이전 문제도 특별히 잘못됐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언론에서 보도하듯 ‘하루 아침에 나온 이야기’가 아니라고 했다.
“도청이나 산하기관에 근무하시는 분들도 춘천에서 살다 보니까, 도청을 어딘가에 새로 지어야 된다는 것도 다 알고 있었죠. 뉴스에는 갑작스럽게 (계획이) 바뀌었다고 보도가 났지만, 아마 다들 저와 비슷하게 생각하실 것 같아요. 상인들이나 그 동네에 사시는 분들에게는 우리가 모르는 다른 이슈가 당연히 있겠죠. 그런데 일반적으로 봤을 때는 제가 방금 말씀드렸던 정도의 인식이지 않을까 생각해요. (도청을) 다른 지역으로 옮겨야 된다는 여론이 대두됐기는 했어도 그런 목소리가 사실 그렇게 크지는 않았어요.”
그는 캠프페이지를 ‘시유지’라고 했다. 그래서 ‘청사 문제는 차치하고서라도 저 부지를 어떻게 활용을 해야 할 것이냐라는 것에 있어서 춘천 시민들은 큰 관심이 없다’고 느낀다고 했다.
“더 솔직히 말하면 큰 기대랄까, ‘정말 저게 우리 동네에 거대한 변화와 발전을 가져올 거야’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이 없어요. 상식에서 벗어나는 개발에는 당연히 반대하지요. 공장 유치나, 아파트 건설, 복합 문화예술관을 지을 수 있다는 생각은 안하죠. 토양 오염을 잘 해결하고, 안전한 공간으로 정비한 후에 공원이나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이죠.”
2000년대 들어 대규모 아파트 단지 조성으로 춘천이라는 지역 내의 공간이 분리된 것도 캠프페이지에 대한 애착과 기대를 낮추고 있는 요인으로 짚었다. 춘천시는 90년대 말, 캠프페이지에서 미군들이 빠져나가기 시작하고, 2009년에 서울양양고속도로가 개통되면서 효자동 중심의 원도심은 쇠퇴하고, 퇴계·석사동을 중심으로 도심이 재구성됐다.
“원래 도심이었던 효자동이나 명동에는 다 어르신들만 남아 있어요. 지금 석사동이나 (퇴계동) 한숲시티에 사는 3·40대 같은 경우에 캠프페이지를 아냐고 물어보면 ‘네?’ 그럴 수밖에 없죠. 전혀 기억도 없고 내 삶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으니까.”
이기찬 대표의 이야기를 통해 시민의 땅이지만 시민의 땅이 아닌 캠프페이지를 만날 수 있었다. 누군가에게는 잃어버릴 추억조차 없는 곳, 딱히 그리울 것도, 새로울 것도 없는 캠프페이지. 단 한 번도 공유된 적이 없는 땅, 캠프페이지는 응축된 군사주의와 제국주의가 춘천 시민들에게 가한 ‘점유’의 기록이다. ‘점유’되었던 땅을 ‘시민’에게 돌려주는 것은 그 땅을 ‘시’가 돌려받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일이다. 여러 이유로 비워져있던 공실(空室)에 ‘공공기관’이 들어서면 그 터의 공공성(公共性)이 살아날까? 캠프페이지는 시유지(市有地)인가, 공유지(共有地)인가? 앞으로의 캠프페이지가 ‘공동의 기억’을 만들 수 있는 공간이 되는 길은 무엇일까?
* 경기도 화성시 매향리 마을은 한국전쟁 이후 주한 미 공군의 ‘쿠니 사격장’으로 사용되었다. 1968년에는 굴 양식으로 전성기를 누리고 있던 매향리 어장과 농경지가 징발되면서 당시 화성군 내에서 ‘부촌’으로 불리던 매향리는 ‘빈촌’이 됐다. (이금미 &양효원, 2021년 2월 24일, 중부일보, [매향리 사람들] '쿠니 사격장' 논과 밭 헐값에 탈취…땅도 잃고 바다도 뺏겼다)
** 2004년, 한미 양국이 용산기지와 미2사단을 평택으로 이전하는 협정에 합의함에 따라, 2006년 행정대집행과 대추분교 강제철거를 거쳐 2007년까지 경기도 평택시 팽성읍 대추리 주민 535세대(1,372명)가 강제 퇴거되었다.(위키백과, 2022년 3월 8일 검색)

/김가연
피스모모에서 평화와 저널리즘의 교차점을 모색하는 일을 하고 있다. 갈등전환, 평화저널리즘, 소통을 키워드로 저널리즘을 통한 평화세우기의 비전을 키우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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