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녕하세요. [건축가시선]에서는 건축을 업으로 하면서, 건축을 공부하면서 생각했던 내용들, 고찰들, 이야기들, 현상들에 대해서 자유롭게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일상에서 마주하는 수많은 건축물들. 그런 건축물을 만드는 건축가들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 대형 발주처와 일을 할 때는 늘 고려해야하는 것이 있다. 나와 지금 일을 하고 있는 이 실무자는 결정권자가 아니라는 것. 건축은 무형의 설득의 영역이 존재한다. 의미있는 단어 하나만으로, 혹은 추상적인 이미지 한장으로 마주앉아 있는 상대방의 마음을 흔들 수 있다. 그 사람의 개인적 취향을 딱 건드린다거나, 정성스럽게 계획한 페이지 한장으로 고개를 끄덕이게 만들 수 있는 부분이 분명 존재한다. 그러나 대형 발주처와 일할때는 보고체계에 대해 항상 생각해야한다. 이 사람은 윗사람, 그 윗사람은 더 위의 사람에게 단계별로 보고를 하며 최종 결정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럴 때 마다 등장하는 것은 바로 사례이다. 이미 지어진 건물은 아주 든든한 백업자료가 되기 마련이다. 직접가서 그 공간감을 느껴 볼 수도 있고, 전체적인 분위기를 그려볼 수 도 있다. 적절하게 잘 사용되는 사례이미지는 설득을 쉽게 할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이 되기도한다.
# 국내 굴지의 대형 발주처와 일할 때의 일이다. 모든 회의 과정은 이 사람이 최종 결정권자를 잘 설득할 수 있는 자료를 우리가 만들어 주었느냐로 평가 되었다. 층고를 결정 할 때도, 보이드의 크기를 정할 때도, 입구의 폭, 높이를 결정할 때도 거의 모든 것을 결정해야하는 요소에 대해 모든 사례를 분석한다. 이 건물은 이 정도이고, 저 건물은 이 정도라서 우리는 이 정도를 제안한다. 이런 식의 회의가 매주 진행된다. 건축가는 건축적 상상을 하기보다는 사례를 조사하고, 실측을 하고, 적절한 사례를 찾아 디테일한 치수를 적어 보고서를 만든다. 말 그대로 빅데이터를 만들어내고 있는 중이었다. 사례와 데이터는 중요하지만, 이렇게 만든 빅데이터로 건축을 하는 것이 맞는 것인가 의문이 드는 순간순간이었다. 얼마나 많은 데이터를 가지고 보여주느냐가 일을 잘하는 회사라는 평가가 되어버린다. 건축을 하는게 아니라 우린 일을 하는 중이었다.
# 다른 프로젝트에서 해외설계사와 협업 중에 최종회의 때 그 외국 건축가가 한국으로 왔다. 건축가는 준비해온 피티를 발표했고 발주처는 어김없이 질문을 했다. <높이를 그렇게 정한 이유는 뭔가요. 어떤 사례가 있죠? > 그 외국 건축사는 대답했다. <건축가의 감각입니다.>이 짧은 한마디가 갖는 임팩트는 대단했다. 건축가의 감각이라는데 무어라 할 것이냐. 건축가는 데이터로만 일하지 않는다. 건축가가 건축가인 이유는 남들이 갖고 있지 않은 감각이라는 것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 일화로 나는 진짜 건축가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 대형 발주처는 우리를 건축가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같이 일을 하는 협력업체 정도로만 생각을 했던 것이다. 건축주는 건축가를 신뢰해야하고, 그 신뢰를 바탕으로 건축가는 창의적으로 아름다운 그리고 공간을 창조해낸다. 그리고 그 감각을 갖고 자신있게 자신의 감각이라고 할 수 있는 건 실력에 대한 확신과 자신의 센스에 대한 신뢰가 높았기 때문일 것이다. 어쩌면 우린 우리의 감각을 스스로 의심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우리도 확신이 없어던 것이다. 그 건축가는 사례를 묻기 전에 수많은 사례를 보며 감각을 키웠을 것이다. 그리고 굳이 사례를 들어 설명하지 않고, 사례를 통해 축적된 자신의 감각을 보여준다. 명확한 이유를 들 수는 없지만 건축가는 그 높이가 적절하다고 판단했다. 그렇게 건축은 시작된다. 건축가의 상상과, 자신있는 감각으로 말이다.
# 창의적인 공간을 설계하기 위해 우린 핀터레스트를 먼저 켠다. 수많은 핀터레스트 속 이미지들을 보며 맘에드는 원픽을 하고, 그것들에 영감을 받으며 조합한다. 다양한 사례를 보며 감각을 키우는 것은 프로젝트가 시작되기전 선행되어야 하는 것이지, 프로젝트와 함께 시작하면 안될 일이다. 건축가는 상상해야한다. 이 도시에 어떤 건물이 들어서야하는지 가장 먼저 상상하고 이미지를 그려야한다. 그렇게 건축은 한 건축가에 의해 고유성을 갖게되고 수많은 핀터레스트 속 이미지들과는 다른 건축물로 탄생하게 된다. 물론 그 건물도 핀터레스트 속으로 수집되겠지만.
# 건축의 고유성이란 완전히 다른 무언가를 만들어내는것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건축가가 평소에 느끼고 공부하고 키워온 감각을 가지고 직접 상상하고, 기록하고, 진정성 있는 무언가를 만들어 내는 과정이 아닐까. 직접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데이터는 없지만, 건축가의 진정성이 담겨있는 행동들일 것이다.
# 앞으로 건축가로 살아남기 위한 어떤 가이드와 같은 의미가 될 수 도 있겠다. 송길영 박사님의 <그냥 하지 말라> 에서는 진정성을 주체성과 전문성이라는 두가지 덕목으로 해석한다. 기술은 계속 발전하고, 기술과 기예는 AI로 대체 될 것이며, 업의 수명은 우리의 생보다 짧아지기 시작했다. 오리지널리티 없이 기술을 습득한다면 기술이 자동화되기 시작했을 때, 나의 가치를 가질 수 없게 된다고 한다. 즉 창의를 기반으로 하지 않으면 숙련의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주체성과 전문성은 내가 하고 싶고, 내가 할 수 있느냐의 의미이다. 일의 주체가 나이고 능력이 있느냐가 앞으로의 생을 가르게 된다. 건축가로서 건축을 하는 주체가 나이고, 그 건축을 잘 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는 것 그것이 건축가로서 살아남는, 그리고 성장하는 방향이 아닐까.
# 주체성과 전문성을 갖기 위해 우리가 해야할 것은 무엇일까. 스스로 상상하고 생각하는 법을 길러야한다. 건축에서 고유성과 진정성을 이야기하는 것은 건축가의 상상과 생각이 현실화 되어가는 과정이 건축자체이기 때문이다. 대학시절 타학과와 건축학과의 차이를 말할 때면 우린 스스로 생각하는 법을 배우는 수업이 많았다. 어떤 지식을 쌓기보단 건축에서 답을 만들어가는 과정을 스스로 생각하는 법을 배웠다. 그 생각을 말로, 글로, 그림으로 표현했다. 졸업을 하고 실무에 들어서면서 우린 생각하기 보다는 분석하기 바빴고, 생각을 표현하기 보다, 그럴 듯 하게 포장하기 바빴다. 최소한 나는 그랬다. 빠른 탬포와 여러사람의 협업, 그리고 복잡하게 얽혀 있는 수 많은 이해관계들을 고려해서 무언가를 만들어 냈다. 건축보다 그 주변의 상황들에 대해 생각할 것들이 많았다. 물론 이것이 현실이지만, 건축이 지니는 가장 아름다운 특성인 이 고유성과 진정성이 빠진다면 우린 결국 그냥 일을 하는 사람이 되어버리게 된다. 그래서 건축가를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와 같다고 하나보다. 수많은 악기들이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지휘해야한다. 그리고 스스로 상상하고 생각해야한다. 그런 과정과 다짐으로 스스로 좋은 건축가가 되도록 다시한번 정진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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