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독자, 요즘은 날씨가 제법 이상하죠. 그런데 생각해보면 원래 기후가 “이래야 한다”는 답이 있었을까요? 한국만 벗어나더라도 계절은 또 다른 기준이 있죠. 이런 것처럼 우리가 생각하는 ’정상성’이라는 것은 아주 연약합니다. 아모레퍼시픽 미술관에서 열린 현대미술 기획전 “ELMGREEN & DRAGSET: SPACES”(이하 ”스페이스“)는 공간의 정상성에 대한 질문이었습니다. 그 질문이 무엇이었을까요?
“왜 여기에 수영장이 있으면 안 되나요?”
관객들은 이 질문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스페이스”에서 가장 화제가 되었던 공간이라고 하면 전시장 하나를 실내 수영장으로 바꿔버린 작품이었을 텐데요. ‘실내‘라고 생각하게 만들었지만 사실은 이 수영장은 어디에 존재하는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빌딩의 ’고층‘에 있을 수도 있고 레스토랑 이름인 ’더 클라우드’와 벽면에 있는 하늘로 가득한 ’창‘을 보면 이 수영장이 하늘 위에 떠있지 않으리란 보장도 없죠. 게다가 입장해서 좌측에는 작은 바람 구멍이 있습니다. 이 구멍은 왜 있을까요? 이 공기는 허공과 이 공간 사이를 연결해주지는 않나요? 그렇지만 진실을 알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수영장이라는 공간 뿐이니까요. 이 충격을 “와, 미술 전시장 안에 수영장을 지었네”라고 생각했다면 그 생각을 뒤집어 봅시다.
왜 미술관 안에 수영장이 있으면 안되죠? 혹은 수영장이 미술관 안에 있으면 안 되나요? 엘름그린과 드라그셋은 이번 전시를 통해 공간의 정상성을 미묘하게 비틀어냅니다. 입장하면 보는 건축가의 집은 근대와 현대를 잇는 미니멀한 주택의 외양을 띄고 있죠. 그 안은 모던한 인테리어로 장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중간중간 인과법칙을 뛰어넘는 요소들이 있죠. 이층 침대는 서로 마주보게 구성되어 있다거나, 벽으로 들어가지 않는 수도관같은 것들 말이에요. 그렇지만 이 집에 사는 건축가는 이어지는 전시실의 ‘더 클라우드(THE CLOUD)‘ 레스토랑을 디자인한 사람이기도 하죠.
인과 관계를 역전시키는 장치가 있지만 ‘더 클라우드‘의 부엌에 도착하면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집니다. 요리가 만들어지는 곳은 실험실처럼 꾸며져 있고, 유기농 과학에서 생산한 쌀이 부려져 있습니다. 우리가 먹는 요리는 어디에서 왔을까요? 파인다이닝에서 재료의 출처를 밝히는 일을 희화화하지만 재료가 살아온 과정은 곧 재료의 가치가 됩니다. 그러나 파인다이닝의 주방에서 만나는 ’초가공’의 현장은 그런 권력 관계를 뒤흔들죠. 게다가 이 부엌에는 담배꽁초가 놓여진 재떨이가 있습니다. 이것은 두 가지로 읽혀요. ”이 주방에서 요리사는 요리를 하지 않는다“라는 것, 또 하나는 ”주방에서 담배를 피는 사람들이 요리를 한다는 것“이죠. 둘 다 부정적인 신호입니다. 하지만 요리가 나오는 과정이, 불투명하다는 사실을 상기시킵니다. 그리고 ’담배’는 맥락상 거기에 있으면 안될 뿐이지, 인과관계를 망치는 요소는 아닙니다. 그러니, 이것은 지금까지 작품을 보면서 체험한 ”기묘한 역전”을 한 번 더 비틀어내는 장치입니다.
“스페이스”가 관람객들에게 미묘한 충격을 주는 것은, 전시가 상상력을 발휘해 적극적으로 공간의 정상성을 무너뜨리기 때문입니다. 이때 균열이 생기는 정상성은 곧 권력입니다. 우리는 “집은 실외에 있어야해”라는 인식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물어보죠. “집은 실내에 있으면 안되나요?”
권력과 공간
화이트 큐브(White Cube)는 미술관의 공간을 표현한 단어죠. 하얀색으로 물든 사각형의 공간입니다. 이 개념은 그 무엇으로도 채울 수 있는 무색, 무취, 무형의 공간을 지칭합니다. 그렇지만 이 개념은 하얀색이라는 색의 힘을 빌어 엄숙함을 만들어 냅니다. 쉽게 더러워지는 하얀색은 도리어 더럽히면 안 된다는 명령을 내리기도 합니다. 이러한 위계는 미술의 가치를 드높이는데 쓰입니다. 미술은 화이트 큐브 안에 존재하기 때문에 ‘하나뿐인’ 가치를 획득하기도 합니다.
화이트 큐브는 공간의 권력 관계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관람객들이 미술관에 ”입장하는 행위“는 곧 계약입니다. 이 계약은 하나의 명령을 따릅니다. ”이 공간 안에서 벌어지는 이상한 일은 이미 우리 모두 상호 합의한 내용이다.“ 작가는 놀래킬 각오가 되어있고, 관람객은 놀랄 준비가 되어있죠. 연극같은 관계는 미술관 안에서만 성립하고, 나오는 순간 해지됩니다. 미술관은 가장 안전한 반란의 공간입니다.
아파트 안에 들어섰을 때, 그 안에 엘름그린과 드라그셋이 만들어둔 것처럼 집이 하나 더 있다면 어떻게 반응할까요? 고층 빌딩의 78층에 내렸는데 그 앞에 바로 실내 수영장이 있다면요? 우리는 아주 이상하게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 집은 계약하지 않고, 그런 빌딩은 이상하다고 말하겠죠. 그러나 이 모든 전복이 아모레퍼시픽 미술관의 전시실에서는 가능하다는 점입니다. 관객들은 작품 사진도 찍고, 이 공간을 배경을 삼아서 사진을 찍으면서 적극적으로 즐깁니다. 이 ’가변크기‘의 설치 작품이 작동할 수 있는 것도 미술관이라는 공간의 권력 덕분입니다. 우리는 이 안에서는 서로 놀래키고, 놀라고, 혹은 무슨 일이 벌어져도 놀라지 않기로 합의했습니다.
교란을 즐기세요. 기꺼이 혼란스러워 하세요.
미술은 무엇이든 ‘전복’시킬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아무 것도 못하기도 하죠. 이 모순점이 미술의 딜레마같기도 하죠. “스페이스”에서 미술은 공간의 정상성을 전복시켜, 권력 관계를 교란합니다. “스페이스” 외에도 전시를 볼 때에는 기꺼운 마음으로 혼란스러워 하세요. 작품이 주는 교란을 즐기고 그 안에서 질문을 찾아보세요. 답이 아니라 질문을 찾는 것, 그것만으로도 전시를 보는 것이 재밌어 질 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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