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초마다 눈이 즐거운 전시(?)를 선보인 리움에서 2025년 첫 전시로 피에르 위그 개인전을 개최합니다. 마우리치오 카텔란이나 필립 파레노에 비해서는 확실히 덜 인스타그래머블하고 덜 포토제닉한 전시입니다. 그리고 덜 친절해요. 작년 이맘때쯤 필립 파레노 전시를 보셨다면 아직 사람의 형태를 하고 있던 애니메이션 캐릭터 '안리'를 기억하는 분들이 있을지도요. 다만 위그가 소환하는 '안리'를 비롯한 여러 존재들은 이제 형태가 별로 남아있지 않습니다. 확실하게, 인간적이고 친밀한 대상의 상징같은 눈코입 따위는 달려있지 않아요.
우리 인간은 오감을 통해 세계를 감각합니다. 가시광선의 세계에서 본 것을 뇌를 통해 이해하고 인간의 관점에서 받아들이지요. 나를 중심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세상을 주체와 객체로 구분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볼수 없는 것, 불가능한 것, 상상할 수 없는 것을 어떻게 경험할 수 있을까요? 인간이 지워진 자리, 주체와 객체도 없는 위치에서 인간과 비인간은 어떻게 공존할까요? 전시 제목이자 작품 제목이기도 한 ‘리미널Liminal’은 “생각지도 못한 무언가가 출현할 수 있는 과도기적 상태”를 의미하며, 작품은 인간 너머의 세계를 끊임없이 탐색합니다.
어떤 현실은 같은 시공간에 존재하지만, 아주 먼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아주 먼 미래까지 이어집니다. 내 눈으로 보고 있는 것은 이 세계의 극히 일부분일 거에요. 전시장의 초입, 블랙박스에 들어서면 짙은 어둠이 시각을 마비시킵니다. 오감 중 가장 많은 정보를 받아들이는 눈이 점차 어둠에 익숙해지면, 제일 먼저 수족관을 마주하게 됩니다. 이 수족관은 인간에 의해 창조되고 재단된 특수한 환경이고, 작가는 어떤 조건을 설정해 이 작은 세계를 구축했습니다.
세계의 안쪽, 불확실성의 가시화
그러나 인간이 통 안의 모든 조건을 통제하거나 인식할 수는 없습니다. "그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알 수 없는 불확실한 세계입니다. 생물들은 익숙한 환경을 찾고자 하는 본능을 따라 행동합니다." <주드람 4> 속에 살고 있는 화살게와 소라게도, <캄브리아기 대폭발 16> 속에 살고 있는 투구게와 화살게도, <주기적 딜레마> 속에 살고 있는 장님 동굴 테트라(눈이 있는 것과 없는 것)도 천만년전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본능대로 살아 움직이며 번식을 반복하고 때로 진화합니다.
"<주기적 딜레마> 속 풍경은 맥시코 수중 동굴을 리모델링 한 것입니다. 수백만년 전 어두운 동굴 속에 들어온 테트라는 서서히 앞을 볼 수 있는 능력을 잃었습니다. ... 눈먼 동굴 물고기의 생체 시계는 이렇게 변화하여 하루 주기 리듬이 빨라지고 더 이상 지구의 24시간 자전을 따르지 않게 되었습니다. 수조 안에는 장님 테트라와 시력을 가진 테트라가 공존합니다. 따라서 두가지 하루 주기 리듬이 동시에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인간과 지구에서 공존하는 모든 비인간-존재는 각자의 리듬에 따라 살아가며 존재하고, 때로는 아주 짧거나 아주 긴 시간 속에서 태어나고 번식하고 진화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조성했다고 믿은 세계에서 끊임없이 인간의 의지와 무관하게 변화하고 살아 움직이는 존재들, 어쩌면 우리보다 '오래된 미래'에서 와서 우리보다 오랫동안 먼 미래를 직조해 나갈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존재들. 우리는 그들을 통해 예측 불가능한 영역을 희미하게나마 들여다봅니다.
세계의 바깥, 불확실성과 AI
일상에서 우리는 손쉽게 어떤 것들을 눈코입이 달렸다는 이유만으로 손쉽게 의인화하지만(인형, 사물, 캐릭터, 심지어 돌 따위의 무생물까지도요), 눈코입이 지워졌다는 이유로 순식간에 기이하고 머나먼 존재로 인식하기도 합니다. <리미널> 속의 인간 형상, <카마타> 속 인간 해골, 실재하지 않는 인물을 생성한 <U움벨트-안리>, 금색 마스크를 쓴 <이디엄>은 인간에 기초하거나 관련해 생성된 이미지이지만 기괴하고 스산한 느낌을 연출합니다.
이 중 우리 신체의 극히 일부분인 얼굴만 삭제한, 가장 인간적인 형태의 <리미널>이 가장 기괴하게 느껴지는데요. 그만큼 인간이 서로를 인식할 때 신체의 한 부분을 정체성을 대표하는 전체로 인식하고 있다는 뜻이겠죠. 존재는 주변의 환경을 감지하고 실시간으로 움직이며 다시 관람자들의 움직임을 유발합니다. 표정이 사라진 자리에는 비언어적 몸짓의 표현만이 남아 흩어집니다. <카마타>의 기계-수행이 차라리 더 의미있어 보일 지경으로요. 인간 해골의 주변에서 끊임없이 작동하는 기계는 금색 구 안의 센서에 의해 지속적으로 출력되고 수정됩니다.
어떤 현실은 같은 시공간에 존재하지만 눈으로 보거나 만질 수 없습니다. 디지털 신호로 존재하고 통신하는 것들. 내가 듣지 못하는 소리. 내가 들어도 이해하지 못하는 소리. 내가 보고도 이해하지 못하는 장면. 내가 해석할 수 있는 영역 너머의 시각 정보. 피에르 위그가 그려내는 시공간은 끊임없이 우리가 세계를 감각하는 방식을 낯설게 하고, 작가에 의해 창조된 혼돈은 끊임없이 우리가 감각할 수 없는 세계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그 세계에서 우리는 주체도 객체도 아니며, 그저 하나의 생물로 여러 비인간적 존재들과 공존할 따름입니다.
신체 없는 존재, 물질 없는 현현
한때 애니메이션 캐릭터였던 '안리'의 태생은 인간을 모방한, 인간에 한없이 가까운 존재였습니다. 필립 파레노와 동료 작가들에 의해 스스로의 존재를 자문하던 안리는 위그의 <U움벨트-안리>에 이르러 완전히 해체됩니다. 비인간, 뇌-컴퓨터 인터페이스에 의해 생성되는 안리는 주변 조건과 관련된 여러 매개 변수들에 의해 끊임없이 수정됩니다. 심지어 작가는 <암세포 변환기>를 설치해 분열이 가속화되거나 또는 느려지는 암세포의 리듬과 강도가 U-움벨트 안리의 화면에 재생되도록 설정하였습니다.
안리의 형태는 세포의 분열과 생성을 닮았습니다. 전시장에 놓인 <마음의 눈(S)>는 이 이미지를 물리적으로 구현한 결과물입니다. 누군가는 여기에서 팔다리나 얼굴의 형태를 읽어낼 수도 있겠지만, 우리는 이제 그게 지극히 인간적인 재해석의 결과물이라는 걸 알고 있습니다. 비인간이 창조하는 이미지에는 어떤 인간적인 의도도 없을 테니까요. 마치 인공지능에 의해 실시간으로 생성되는 목소리를 가진 <이디엄>처럼요. 인간이 지각할 수 없는 부분을 포함한 특정 정보는 인간의 발성기관을 통해 특정한 구문과 음소로 변환됩니다.
말이 되지 못하는 언어를 발화하는, 눈코입이 삭제된 이들은 마치 낯선 세계에서 온 다른 인류-또는 비인간처럼 보입니다. 타자의 관점으로 바라보는 우리는 어떨까요? 우리가 보기에 참 좋은 것들, 선택되고 정제된 미술관의 이미지 바깥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불편하지만 어쩐지 시선을 끄는 이미지-존재들, 불가능하거나 상상할 수 없는 것들을 전시장 안으로 호명함으로써 위그는 인간과 비인간이 공존할 수 있는 환경의 가능성을 모색합니다. 피에르 위그 《리미널(Liminal)》 전시는 2025년 2월 27일부터 7월 6일까지 리움 미술관에서 만나볼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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