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1
7.2.2025 화창함
세 번째 Great Walk 트래킹이다. 한참 산속을 걷다 보면 항상 이곳에 있어온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내가 있어야 하는 곳에 돌아온 것 같달까.
정신없는 시작이었다. 스티브를 만나러 남섬의 남쪽 끝에 다녀왔다. Curio bay에서 이틀을 보내고 오늘 새벽 5시 반에 일어나 출발, 4시간 운전을 해서 퀸즈타운에 주차하고, 점심 저녁을 사서 루트번트랙 입구로 가는 버스를 탔다. 버스를 놓칠까 봐 조금 맘도 졸였네.
오르막이 조금 힘들었지만 케플러트랙의 빡센 초반보단 훨 낫다는 이야기를 나누며 걸었다. 화창한 날씨, 가끔 부는 시원한 바람, 계곡의 청량한 에메랄드 빛깔을 만끽하며 올랐다. 그런데 빙하호는 왜 에메랄드 빛일까? 빙하에 포함된 어떤 특정 성분 때문인 걸까? 통신이 잡힐 때 찾아봐야겠다. 오르는 내내 오른쪽으론 눈 덮힌 알파인 뷰를 힐끔댈 수 있었다. 참 아름답고 장엄하다.
트랙 안내의 예상 시간보다 꽤나 빠르게 Routeburn Fall 산장에 도착했다. 오르는 중 케플러트랙에서 만났던 샌프란 친구들을 만났는데 그들은 역방향으로 트래킹을 끝내고 하산 중이었다. 트랙 한가운데서 꺄악대며 반가워 했네.. 친구들이 우리가 묵을 첫 산장 옆 수영 스폿이 있으니 꼭 가보라며 추천을 했기에 얼른 챙겨 수영을 하러 뛰어갔다.
많은 계곡 수영장들을 만났지만 폭포가 있는 곳은 처음이었다. 제대로 된 수영을 할 수 있는 깊이나 사이즈는 아니었고 폭포를 사이에 두고 선녀탕이 여러 개 있는 구조. 폭포 한 가운데 들어가는 사람들이 있어 따라 들어가 봤다. 오 고수압 샤워하는 기분ㅋㅋㅋㅋ 얼음장 같은 물로 시원하고 짜릿하게 땀을 씻어내고 따끈한 햇볕에 한참 앉아 몸을 말렸다. 아 행복의 촉감이 있다면 이런게 아닐까..
티타임을 하려고 주방에 갔다가 타카를 만났다. 워킹홀리데이 중이고 Cromwell 지역에서 체리를 따다가 수확 시즌이 끝나 하이킹 중이라고 했다. 일본 사람이라 야구잘알이었고 빵돌은 사랑에 빠졌다. 두 분 행복하세요..Hut Talk 내용은 평범했지만 분위기가 정말 좋았다. 레인저 아저씨가 커다란 초코렛을 걸고 퀴즈를 내기도 했고, 오늘 생일을 맞은 사람을 위해 다 같이 생일 축하 노래를 불러주고 케익도 나눠 먹었다.
Routeburn Fall 산장 스탬프를 찍은 엽서를 한 장 쓰곤 벙커침대로 왔다 빵돌이는 벌써 코를 골기 시작하네..
Day2
8.2.2025 맑다가 구름잔뜩 그리고 미스트
으엌 대 실패.. 밀포드, 케플러 트랙에서 먹은 오트밀이 참 맛있었지만 좀 달고 양이 적어서 같은 브랜드의 ‘오리지널’을 큰박스로 샀는데. 진심 노 맛. 우유분말을 많이 타도 해결이 안됐다. 기억하자 오트밀죽은 필히 시럽첨가. 그치만 산장 테라스에 앉아 아침 먹으며 바라본 붉게 빛나는 하늘은 정말로 멋졌다.
오늘은 3시간 오르막, 3시간 내리막 등산하는 날. 가랑비 예보가 있지만 아침엔 쨍하니 예쁘게 맑았고 멋진 호수를 끼고 알파인 뷰를 보며 올랐다.
정상 도착하니 뷰는 오간데 없고 구름이 가득 몰려오고 있었다. 하산길은 내내 구름 속. 두꺼운 안개 같은 구름 속을 한참 걷다 보니 쫄딱 젖었고 원래는 조망이 터져야 하는 오픈된 산길인데 보이는 건 희뿌연 구름뿐 ㅠㅠ 밀포드, 케플러에서 만난 하이커 중 루트번 트랙을 최고로 꼽는 사람들이 많았던 지라 더더욱 아쉬운 날이다.
조망 없음 = 사진 안 찍어도 됨 = 빨리 걸음 공식으로 6시간 코스를 4시간 반 만에 도착했다.
비 쫄딱 추운 산행의 좋은 점은 등산 끝나고 보송한 옷으로 갈아입고 마시는 핫초코 맛이 어디 비할 데 없이 아주 끝내준다는 것. 따끈하고 달콤한 온기에 진심으로 행복해진다. 어제 머물렀던 Routeburn Fall 산장 화이트보드엔 ‘Look after the planet - it’s the only one with chocolate’이라고 적혀 있었지 ㅋㅋ
축축한 산길에 좀 지쳤었는지 레인저 토크 시간까지 낮잠도 조금 잤다.
Lake MacKenzie 산장의 레인저 줄스는 오늘 온 강수량은 1mm 정도라 제대로 된 비라고 할 수 없지만(사실 그렇긴 했음 미스트 같은 비) 내일은 하루 종일 33mm의 비가 온다고 했다. 오메..
내일 코스는 4시간 정도의 하산길. 피오르드국립공원에서의 마지막 트래킹 날이다. 아쉽다..
Day3
9.2.25 비
단단히 몸과 마음의 채비를 하고 나섰다. 새벽내내 지붕을 두드리는 빡센 빗소리에 심란했는데 막상 나가서 맞아보니 소리만 요란했지 그렇게 심각하진 않았다. 어제 대부분의 하산을 끝낸 상태라 숲속으로 들어와 있었고 (뉴질랜드 산들은 보통 고도가 낮은 곳에 숲과 고사리가 우거지고, 일정 고도 이상이 되면 종아리 높이의 낮은 풀들만 있어 오픈돼 있다.) 열대우림 속 촉촉한 등산은 또 매력적이니까~ 애써 서운한 마음을 다잡으며 열심히 걸어 나갔다.
두 시간쯤 걸었을까 이미 푹 젖은 상태라 더 이상 비 맞는 것이 두렵지 않은 시점에 거대한 폭포가 나타났다. 이틀 동안 비가 와서 인지 아주 시원하게 떨어지고 있었고 폭포를 지나려면 폭포 앞 다리를 건너야하는데 비보다 폭포에서 튀는 물이 더 많은 그런상황ㅋㅋ 폭포를 살짝 피해 갈 수 있는 우회로가 있었지만 조금 덜 맞는다고 뭐 나아지겠냐구요 기꺼이 폭포 속?으로 뛰어들어 신나게 물을 맞고 오히려 기분이 너무 좋아졌다.
아 그렇지 나는 이런 경험을 하려고 온 거였지, 뽀송한 흙과 파란 하늘이 트래킹의, 또는 이 산의 전부가 아니지. 인생에 맑은 날만 있지 않다고 불평하는 건 말도 안 되는 거잖아.
그때부터였을까 이 빗속 트래킹을 진정으로 즐기기 시작했다. 빗물이 개울져 트랙을 가로질러도 마냥 재미있고 걸으면 걸을수록 감사한 마음이 차올랐다. ‘고어택스 등산부츠와 스마트울양말만 있으면 난 어디든 걸을 수 있어’ 따위를 생각하며 혼자 속으로 킥킥
이번에도 음식량 계산을 잘못해서 막판엔 배가 좀 고팠다. 숙소까지 가려면 4~5시간을 버스에서 버텨야한다. 그치만 내일은 이 동네 제일 맛있는 빵집을 갈거고 숙소엔 핫텁을 예약해 뒀지. 상상만 해도 행복하다.
Life’s not about waiting for the storm to pass. It’s about learning to dance in the rain. 비비안 그린 그리고 혜진.
의견을 남겨주세요
쵸쵸언니
비공개 댓글 입니다. (메일러와 댓글을 남긴이만 볼 수 있어요)
역마살 실전편
ㅋㅋㅋㅋㅋ 친절한 친구.. 빙하의 성분 때문이 아니라 빙하가 깎은 암분 때문이구나!!!
의견을 남겨주세요
쵸쵸언니
거대한 폭포앞을 건너는 메진 마치 산수화를 보는 것 같네. 그나저나 메진, 회차가 지날수록 네 글이 점점 더 너의 그순간으로 슉 잡아당기는 힘이 강해지는 것 같다
역마살 실전편
다정한 댓글 고마오.. 지난번보다 날것 일기 그대로 옮겼기 때문일까?(귀찮음 이슈) ㅋㅋㅋㅋㅋ
의견을 남겨주세요
징너
이 드넓은 지구별 스케일로 보면 작은 동산같은 언덕을 오르락내리락 하며 와 여기 멋지다 감탄하는 인간들은 얼마나 귀여운가!ㅋㅋㅋ 라고 생각하며 읽고 있었는데 쵸쵸언니는 산수화라는 너무 멋진 감상을 남겨주었네ㅋㅋㅋㅋㅋ.. 이런 나 괜찮은가요?ㅋㅋㅋ 글 뿐만 아니라 메진빵돌님 사진이 다 멋져서 보는 즐거움이 두배야!
쵸쵸언니
ㅁㅈㅁㅈ
역마살 실전편
드넓은 지구별 하찮지만 열심히 쏘다니는 귀여운 우리.. 👯♀️
의견을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