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저녁 하루를 끝내기 아쉬워 산장 벙커침대에 누워 일기를 쓰다 잠들었습니다. 문명에 돌아와 조금 다듬었고요. 현장감 가득한 트래킹 기록들을 공개합니다.
Day1
25.1.25 구름많음, 밤에 살짝 비
럭키 럭키 럭키! 밀포드 트랙의 공식 코스는 3박4일로 클린톤, 민타로, 덤플링 산장 예약을 3일 연속 성공해야만 갈 수 있다. 산장의 하루 수용인원은 단 40명. 밀포드는 세계 3대 트래킹 코스로 잘 알려진 곳으로 온라인 예약이 시작됐던 8개월 전 어느 날 새벽 5시 반에 일어나 예약에 어렵게 성공했고, 우리의 모든 뉴질랜드 일정은 이 트래킹을 기준으로 계획이 됐다.
방문자센터에서 미리 체크인(을 해야 한다.. 아주 철저하게 관리함) 하며 확인한 날씨 예보는 4일 중 3일이 비. 개중 하루는 꽤 많은 비.. 남섬 피오르드국립공원 지역은 1년 365일 중 300일이 비가 오는 곳으로 유명하지만 그래도 나에게 65일의 행운이 따르지 않을까 조금 가지고 있던 기대가 와르르 ㅠㅠ 하지만 뭐 어느 정도 예상은 했기에 단단히 채비해서 올라가기로 했는데 첫날 트랙의 입구까지 이동하는 페리에서.. 모두가 열심히 선블럭을 덧바르고 있었다. 아니.. 이렇게 맑고 화창하다고?
한 시간의 페리 이동 끝에 도착한 트랙의 날씨는 구름 많음. 비는 전혀 안 오고 뜨겁지 않아 오히려 좋았다. 1시간가량 원시림과 계곡의 매력에 흠뻑 빠져들었다. 오늘의 트래킹은 5km정도. 가벼운 산책코스 같았다.
클린톤 산장에 도착하니 약 30여명의 사람들이 이미 도착해 자리를 잡은 상황. 겨우 남은 위아래 짝궁 벙커침대에 짐을 풀고 빠르게 근처 계곡에 수영을 하러 달려갔다. 이미 수영을 끝내고 돌아가던 한 커플(커플이 아님을 나중에 알게 됨)이 it’s not warm!이라고 경고하고 지나갔는데 강정천과 악근천에 단련된 나로서는 썩 나쁘지 않은 수온이었고 빵돌이는 발만 담그고서는 차가워서 못 들어가겠다며 발 동동 징징대다 내가 엉덩이를 걷어차니 한번 들어가보곤 오? 좋잖아? 한 번 더 들어갈까? 시전 ^^
트래킹이 짧았기에 오후에 출발했고 수영까지 하고 돌아와도 5시가 채 안 됐다. 안내 사항, QnA 등등 있는 레인저 토크 시간은 7시반. 일단 싸 온 샌드위치를 저녁으로 먹었고 삼삼오오 주방에 모여든 사람들에 둘러쌓여 빵돌과 고독한 대화를 시작했다. 왜 40여명 중 아시안은 우리 뿐인가.. 그렇다고 방에 가서 눕고 싶진 않아 주방에 뻘쭘하게 앉아서 음 30분정도 지나니 빵돌이랑 할 얘기도 다 떨어지구 눈만 꿈벅꿈벅.. 우리 뭐하지, 하던 중 우리와 같은 테이블에 앉아 있던 가족이 카드 게임을 함께 하겠냐고 제안을 해줬다. 천사 오스칼. 아까 계곡에서 마주쳤던 그 친구! 사실 함께 있던 여성은 여동생 한나였고 어머니와 남매가 셋이서 함께 온 상황. 오스칼, 한나, 리즈(어머니) 우리, 마찬가지로 같은 테이블이던 캐시 여섯이서 카드 게임을 시작했다. 처음 해보는 게임이었지만 오스칼네 가족은 어쩜 다들 그렇게 친절한지. 한땀한땀 알려주면서 우리를 도와줘 점점 카드게임에 빠져들었고, 우리가 재미있어 보였는지 루이스, 리타쉬가 중간 합류해 총 8명이서 주방 소등(10시)까지 호호깔깔 카드 게임을 즐겼다.
밤엔 약간의 비가 내렸다. 촉촉해지는 산속에서 낯선 새들의 지저귐을 들으며 잠이 들었다.
Day2
26.1.25 , 비오다 갬
간밤의 클린톤 산장은 생각보다 더웠다! 반팔을 입고 잤는데도 더워서 몇 번을 깼다. 아침을 먹으며 인사를 나눈 사람들 모두 더웠다고. 개중에 제일 고통 받았던 건 유콘에서 온 리하나. 알래스카 옆 동네라며 호호 웃더라.. 드립커피, 바나나, 버섯스프를 아침으로 먹고 출발했다. 오늘은 하루 종일 비가 온다고 예보돼 있었기 때문에 방수재킷을 입고 가방에도 방수커버를 단단히 씌웠다. 등산깨나 해봤지만, 우중 트래킹은 처음이다. 너댓시간 걷다보니 부슬부슬 가랑비에 폭닥 젖었지만 그리 괴롭지만은 않은 초반 산길이었다. 정오쯤 쉘터에서 치즈샌드위치와 요거트를 점심을 먹고 나니 비가 갰다! 여전히 구름은 많지만 비는 멈추고 해가 비치기 시작했고 오전에 내린 비 덕에 계곡의 양쪽엔 여러 줄기의 폭포들이 멋지게 흘러 내려왔다. 산맥 사이에 걸쳐 흘러가는 구름까지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1시간 정도 지나니 가방도 옷도 간단히 말랐고 좀 더 가벼운 몸과 마음으로 산행을 이어갔다.
중간에 마주친 프라이빗 가이드 투어*의 가이드는 최근 내내 건조했다며 약간의 비가 온 것이 오히려 좋고 그 덕에 너희 오는 내내 폭포를 보지 않았냐고 아주 행운이네! 라고 말했다. 어젯밤 레인저 토크시간에 레인저도 날씨예보를 알려주며 우리더러 행운이라고 했었는데. 너넨 참 럭키하다는 말을 반복해서 듣는것 만큼 기분 좋은 여행이 어디있을까!
해가 나기 시작한 와중에 오르막도 시작됐다. 꽤 더웠다. 땀이 송골송골 맺히고 짐은 점점 더 무겁게 느껴지고 어제의 계곡 수영이 너무 그리웠다. 트랙 안내서의 둘째날 코스엔 수영할 수 있다는 얘기가 없었다. 도착지인 민타로 산장 까진 이제 10분 남았다고 하는데 마주친 호수들은 수영하기 썩 좋아보이지 않았다(얕고 바닥이 진흙같았음) 아쉬운 마음을 다스리면서 산장으로 향하는데
어머나
이게 웬
수영장!!!
정말로 맑고 깨끗한, 깊은 자갈바닥의 수영 스폿이 눈앞에 펼쳐졌고 거기에선 이미 여러명의 사람들이 수영을 즐기고 있었다.
산장에 부리나케 짐을 풀고 빵돌과 달려 나갔다. 오늘은 빵돌이도 입수를 머뭇거리지 않았다. 물은 어제보다 훨-씬 차가웠지만 하루 종일 흘린 땀과 열기를 한방에 씻어주는 아름다운 수영이었다. 고작 5분하고는 덜덜 떨면서 돌아왔지만ㅋㅋ
건조식품과 초콜릿을 저녁으로 먹고 레인저 토크를 듣고 나서는 오늘은 일찍 잠자리에 든다. 내일은 피오르드국립공원에서 가장 경치가 좋다는 정상을 가는 날. 날씨 예보가 좋다. 기대가 된다.
Day3
27.1.25 , 맑고 구름 약간
시작부터 끝까지 감탄 또 감탄. 세계 몇 대 커피니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하는 몇 군데니 하는 순위 매김을 썩 좋아하지 않지만, 오 정말 왜 전 세계 사람들이 꿈꾸는 세계 3대 트랙에 꼽히는지 자연스럽게 이해가 되는 순간들이었다.
사진과 영상 찍기를 멈출 수가 없었다. 이 보다 더 멋진 광경이 있을까? 하며 열심히 찍고 돌아서면 더 멋진 광경이 펼쳐졌다. 몇 발짝 올라가서는 우와- 몇 발짝 더 올라가서 또 우와아-.. 나는 내가 ‘굉장하다’는 말을 이렇게 많이 쓰는 사람인지 처음 알았고, 사진찍기에 크게 집착하지 않는 빵돌이도 정신을 못 차리며 셔터를 눌러댔다.
밀포드 트랙을 개척?한 탐험가의 이름이 퀸틴 매캐넌(Quintin Mackinnon)인데 그의 이름을 딴 매캐넌 패스(Mackinnon Pass)를 지날 땐 나도 모르게 ‘내 평생에 여길 다시 와 볼 수 있을까?’라는 말을 내뱉았고, 그러고 나니 나를 둘러싼 이 모든 것에 흠뻑 빠져들어 즐기고 있는 이 순간에도 나는 이곳을 그리워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재미있었다. 빵돌이는 2-3년 뒤에 다시 오고 싶다고 하는데.. 진짜 웃기네 너가 그럼 예약 성공해 보든지.
매캐넌 패스의 가장 높은 곳엔 퀸틴 매캐넌의 기념비가 있었다. 그가 이 트랙을 개척?개발?(두 단어 다 쓰고 싶지 않지만 마땅한 대안을 못 찾았음)한지 100주년을 기념하는 대형 구조물이었는데 여정을 시작한 마을 ‘티 아나우’에서도 그의 동상을 발견했었고 여기저기 거리, 호수, 랜드마크들이 그의 성, 이름 할 것 없이 따서 붙어 있었다. 뉴질랜드 사람들은 탐험가를 존경하는 걸까? 우리나라의 어떤 산이나 트랙도 탐험가/개척자의 이름을 딴 곳은 없다. 이 국가가 탐험과 개척에 의해 개발된 곳이라 그럴까? 마오리들은 그럼 이 상황을 어떻게 생각할까? 디즈니 영화 [포카혼타스]를 떠올리며 트랙을 걸었다.
오늘 점심은 땅콩버터 샌드위치와 맥심 커피믹스. 등산 중엔 뭘 먹어도 정말 맛있다.
사실 산장에 도착하기 약 1시간 전, 서덜랜드 폭포를 들렀다 갈 수 있는 샛길 앞에서 조금 망설였다. 3일 차 산행에 피로가 누적 되기도 했고, 하산길에 빵돌이와 다퉈서^^ 혼자 걷던 차라 기분도 영 좋지 않았다. 그치만 에라이 모르겠다 하고 폭포로 들어섰고 중간 쉘터에 가방을 두려고 갔다가 빵돌일 다시 만나서 화해하고 손잡고 폭포로 갔다. 서덜랜드 폭포는 뉴질랜드에서 가장 큰 폭포이고 약 580m의 높이.. 드림타워가 169m이다 참고로…. 얼음물 같은 폭포 호숫물에 지친 발을 식히고 너른바 위에 앉아 엄청난 규모의 폭포를 바라보며 한참을 머물렀는데 오늘의 수많은 행복 중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
덤플링 산장 앞에도 수영 스폿이 있었다. 매일 신나게 걷고 수영하고 반복하는 삶 진짜 너무 좋잖아. 신나게 달려가는 중 마주친 수영에서 돌아오는 사람들이 쌍따봉을 날리며 정말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수영이었다며 행복한 미소를 보여줬었는데 그림 같이 아름다운 풍경에, 얕고 깊은 수심이 다 있는 그야말로 사랑스러운 수영 스폿이었다. 젊은이들이 바위에서 점프 다이빙을 하기에 보고만 있을 수 없어 그간 포구에서 갈고 닦은 다이빙 실력을 유감없이 뽐냈다. 촤하하.
내일은 마지막 날.. 업다운이 거의 없는 가벼운 트래킹 5시간이면 밀포드 트랙은 끝이다. 트래킹이 끝나는 게 아쉬워 잠들기가 싫은 지경이다..
Day4
28.1.25 , 맑다가 구름
덤플링 산장에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몇 팀 중 하나가 우리였다. 트랙 끝에서 시내로 이동시켜 줄 우리의 보트 예약 시간은 오후 2시 반, 트래킹은 약 5시간 정도 남아있었는데 굳이 아침 일찍 서두를 필요가 없었다. 일본에서 사 온 간편 죽과 크래커로 아침을 먹고 남은 소수정예의 사람들과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눴다.
하산길엔 트랙 내내 30번도 넘게 건넜을 것 같은 흔들다리를 또 지나게 됐는데 리하나와 캐서린이 다리 가운데서 강을 유심히 보고 있었다. 뭘 보고 있냐니 블루덕! 이라며 아주 보기 어려운 오리이고, 굉장히 맑고 빠른 물에서만 사는 지표종 이라고 알려줬다. 우리가 공중에서 관찰 하던말던 블루덕은 깃을 좀 단장하나 싶더니만 금세 고개를 파묻고 낮잠을 청했다.
오스칼의 가족은 참 다정하다. 나흘 내내 우리와 트랙에서, 산장에서 마주쳤는데 그럴 때마다 다정하게 이름을 불러주며 대화를 건네고, 게임을 제안한다.(어젯밤에도 오스칼과 카드게임을 했고 빵돌이는 마지막까지 게임 룰을 이해 못 한것 같다) 오스칼은 섬세하고 친절하고 한나는 유쾌하고 재미있다. 리즈는 우아하지만 강단이 있고 사랑이 가득하다. 파일럿 교육 때문에 못 왔다는 막내와 본인의 생일이라 가족을 다 이곳으로 불러 모았다는 아버지가 궁금해지는 가족이었다.
오스칼은 트랙의 끝 무렵 본인의 보트를 타려고 줄을 서 있는 와중에도 인증판 앞에서 우리의 기념 투샷을 찍어주겠다며 다시 돌아와 열심히 사진을 찍어주고 달려서 돌아갔다. 당연히 시절인연이겠지만 그래도 연락처 하나, SNS 계정 하나 물어보지 못한 것에 조금 후회도 했다.
일 년 내내 기대하던 밀포드 트랙이 이렇게 끝났다. 오늘은 숙소를 예약해 캠퍼밴이 아닌 하얀 시트가 깔린 침대에서 잠을 청한다. 코 고는 사람을 걱정해 귀마개를 할 필요도, 화장실 갈 때 매트리스 소리가 시끄러울까 살금대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저 멀리 지저귀는 새소리, 바람에 나무들이 사락대는 소리 없이 잠들려니 무척 아쉽다.
*밀포드 트랙 전체를 걸을 수 있는 방법은 개별적으로 국립공원 예약에 성공하거나 1인당 최소 2800달러(240만원..)부터시작 하는 프라이빗 가이드 투어로 오는 방법 두 가지가 있다. 우리는 국립공원 산장과 교통비(개별 이동 불가하고 지정된 페리를 타야한다)도 너무 비싸다고 생각했는데 하산 후 가이드 투어 비용을 검색해 보고는…(이하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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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너
와!! 완전 현장감 느껴지는 일기!! 나도 산장에 같이 있는 것 같자나~~ 같이 다녀온 것 같자나~~ 날씨가 다했네 증말! 올려준 몇장만 봐도 넘 아름답고 멋진곳이다 나도 언젠가 가볼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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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민
내 인생에 이런 트래킹은 없겠지만 그래서 더욱 훔쳐보기 즐거운 일기장이군뇨,,, 소식 전해주어 고맙고요, 풍경들 정말 너무 멋지고 수온이 특히 낮았다는 것이 좋았습니다. 하지만 메진은 천국을 맛보았겠죠? 그러면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빵돌과 사이 좋게 지내시기 바랍니다. 호호 다음편도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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쵸쵸언니
일 끝나고 집앞 식당에서 샐러드를 퍼먹으며 뒤늦게 읽는중… 쓰면서도 감탄하는 네 모습이 눈앞에 그려지네. 럭키돌이들 날씨가 좋았다니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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