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클랜드를 여행의 시작지로 선택한 이유는 오직 캠퍼밴을 사기 위해서였다. 뉴질랜드 여행을 꿈꿀 때 항상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그림은 하얀 캠퍼밴을 타고 달리는 로드트립, 루핀이 흐드러지게 핀 호숫가에서의 하룻밤이었기에.
사실 그 꿈은 굉장히 요원해 보였다. 2년 전, 뉴질랜드에 처음 왔을 때도 캠퍼밴 대여를 알아봤었는데 그때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하루를 빌리나 5일을 빌리나 심지어 2주를 빌리나 비용이 같았다는 것이다. 휴가란 모름지기 2주 이상은 될 거라는 이들의 대여 정책이 바쁜 아시안의 일정과 사맞디 아니하여 당시엔 좌절됐던 이력이 있다. 물론 2주간의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해도 어마어마한 비용으로 인해 실현됐을지는.. (최소 4~500만원..)
캠퍼밴을 빌리지 않고 ‘사는’ 방법이 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의 충격은 굉장했다. 참고로 나에겐 여행 선지자가 계신다. 현재 리버풀 근처에 계시는 수(Sue)님께서는 이미 다년 전 오세아니아 장기여행을 지내셨고 수많은 꿀조언을 전수해 주시고 유럽으로 넘어가셨다. 뉴질랜드는 캠퍼밴 여행지로 아주 유명하고 개인 간 중고차 거래가 활성화돼 있기 때문에 일정 기간 이상 장기 캠퍼밴 여행자들은 중고 캠퍼밴을 사서 여행이 끝난 후에 팔고 떠나곤 한다. 관련 여행자 커뮤니티도 활성화돼 있어서 여행 몇 달 전부터 나는 수의 추천 커뮤니티들에 가입해 원하는 차종의 시세를 꾸준히 팔로 해왔다.
그래서 우리는 오클랜드에 도착한 것이다. 뉴질랜드의 가장 큰 도시답게 캠퍼밴 거래가 가장 많이 이루어지는 곳이고 여차했을 때(조건에 맞는 판매자/구매자를 구하지 못했을 때) 업자를 컨택하기도 용이해 보였다.
그래서 오클랜드에 도착했을 때 우린 당장 할 일이 없었다. 우리의 유일한 목적은 ‘캠퍼밴을 사서 남부로 떠나기’였기에 마침 우리가 도착한 때엔 원하는 스펙을 가진 매물들은 오클랜드에 도착하지 않는 시점이었고(보통 여행이 끝나기 1~2주 전에 미리 매물을 개시해서 판매 시점, 뷰잉 일정 등을 잡는다) 며칠을 기다려야 차들을 확인 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오클랜드에서는 에어비앤비를 1주일 예약하고 출발했는데, 우리의 호스트인 스티브는 서핑에 미쳐있는 40대 초~중반의 뉴질랜드인(키위)이었고 굉장히 사람을 좋아하고 친근한 스타일로 우리를 마주칠 때마다 오늘 무엇을 했는지, 내일 계획은 뭐가 있는지 물어보곤 했다. 그러다 보니 첫 하루이틀은 그도 우리도 좀 머쓱했다.
음.. 오늘은 커피를 마시고.. 쉬었어. 오늘은 근처에서 점심을 먹고.. 장을 봤어.. 내일은 음.. 글쎄.. 그랬더니 그는 어떤 사명감을 띠고는 우리를 붙잡고 추천 스폿과 맛집과 오클랜드에서 할 만한 것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들은 모두 대단했다. 스티브의 추천 일정으로 꽉 찬 하루를 보내고 돌아와 신난 우리가 리뷰하기 시작하면 그는 흐뭇한 미소와 함께 맥주를 쓱 건네곤 했다. 자연스럽게 매일 저녁 우리는 스티브의 주방, 테라스에 앉아 맥주를 마시며 수다를 떨었다. 여행 이야기로 시작해 어떤 날은 각국의 정치적 상황에 대해, 어떤 날은 회사와 동료들 이야기, 어떤 날은 연애..
그는 우리가 캠퍼밴을 구하는 데에도 관심을 가지고 도움을 주려고 노력했다. 좀처럼 뷰잉이 잡히지 않아 의기소침해진 나를 다독이고 우리가 후보로 뽑아놓은 매물들을 적극적으로 분석해 보며 어느 것이 더 나은지에 대해 대화를 나눴다. 외부인인 스티브의 ‘걱정마, 너넨 곧 좋은 캠퍼밴을 구할 수 있을 거야!’라는 말에 꽤나 큰 안심이 됐다.
일찍 귀가한 어느 날 여느 날과 같이 새벽같이 서핑에 다녀와 낮잠을 자던 스티브는 여느 날과 같이 오늘 뭐 했냐고 물었고 (우린 그날 시티에 가서 쇼핑만 하고 돌아왔다) 우리에게 드라이브를 가겠냐고 물었다. 너네는 너무 도심에만 있고 너희가 본 것은 뉴질랜드가 아니 라며. 장장 왕복 2시간 이상 걸린 드라이브로 다녀온 Piha beach에서 또 신나게 서핑 이론과 파도 보는 법만 듣다 왔지만, 아름다운 날씨에 탁 트인 바다를 보니 정말 모든 게 잘 풀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 감동까지 주는 이 환대의 인간은 대체….
일주일이 가까워지는 무렵, 한식을 한번 대접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우리가 축낸 그의 맥주가 대체 몇 병, 몇 캔인가. 만만하게 할 수 있는 요리를 고민하다 닭볶음탕으로 결정했다. 한인마트에 가서 닭볶음탕 소스만 사고 나머지 재료는 현지에서 조달할 수 있으니 간단했다. 문제는 우리가 간 시내 한인마트엔 닭볶음탕 소스가 없었고 비슷해 보이는 돼지불고기 소스로 대체했다. 별로 비슷하진 않았고 소스 조절에 실패해 굉장히 매웠지만 스티브는 맛있다며 싹싹 긁어 먹어줬다. 예의 바른 친구..
*평소 스티브의 식습관을 관찰한 결과 채식은 탈락..ㅠㅠ
다음날은 그가 팔을 걷어붙였다. 일요일은 로스트를 하는 날이라며 진짜 뉴질랜드 음식을 먹여주겠다는 그는 램(양고기) 로스트를 직접 요리해 줬다. 좋은 민트소스가 핵심이라며. 뚝딱뚝딱 쉽게 하는 것처럼 보였는데 진짜 너무너무 맛있었고, 빵스민은 뉴질랜드에 온 지 2주가 지났지만, 최고의 식사로 스티브의 램 로스트를 꼽는다.
그의 말대로 우리는 좋은 밴을 좋은 가격에 사게 됐고, 스티브의 집엔 이틀을 추가로 머물렀으며, 지금까지도 여행은 아주 순조롭게 진행 중이다. 이 순조롭고 행복한 여행의 시작은 스티브의 친절함과 다정함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스티브는 남부 남섬 출신으로 남섬 여행 때 본인의 본가에 놀러 오라고, 마침 본인도 본가에 갈 계획이 있다고 신신당부했다. 과연 우리는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의견을 남겨주세요
징너
키위 아조씨의 호스피탈리티란 놀랍다!!ㅋㅋㅋ 본가 가면 무슨 음식 할지도 고민해서 가야겠는데ㅋㅋ 부침개 이런건 어떤지? 부침개나 파전이나ㅋㅋㅋ 아니 밴 이름이 아직도 없다니 직무유기예요~~~ 빨리 이름 지어서 출생신고 부탁드립니다🙏
의견을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