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주의여 안녕

캠핑여행이 나에게 가르쳐 준 것

2025.06.29 | 조회 185 |
2
|
역마살 실전편의 프로필 이미지

역마살 실전편

2025 세계를 떠도는 야채빵(메진,빵돌)의 여행기

#혜진(아채)

여행 중 누군가 나에게 "한국에서는 살기 참 힘들겠다, 한국인들은 항상 완벽해 보인다"는 말을 해, 우리는 특히 '완벽해 보이는 것'에 대한 강박이 심하다는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외모 뿐 아니라 집, 차, 직업까지 모두 완벽해 보여야 하기에 서로 비교하고 스스로를 갉아먹으며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이야기였다.

그 대화에서 내가 신선한 충격을 받은 포인트는 완벽한 것 = 좋은 것 이 아니라 완벽하네 = 힘들겠다 로 이어지는 사고흐름이었다. 그 사고의 바탕엔 완벽하지 않은 모습이 자연스럽다는 생각이 깔려있다. 반면 내 마음 한구석 저 깊은 곳에서는 그래도 완벽해 보이면 좋은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꽤 뿌리 깊었던 것도 같다. 내가 가진 모습 중 내가 싫어하는 부분도 과도한 완벽주의에서 비롯 된 것이 많고 보여지는 것에 집착하는 점 역시 언제나 의식적으로 지양하고자 꾸준히 노력하고 있지만 말이다.

평소 매일아침 샤워를 했던 건 단순히 찝찝함을 씻어내기 위한 것만이 아니라, 스스로를 아름답고 정돈된 상태로 만들기 위한 단계이기도 했다. 따뜻한 샤워 후 스팀을 잔뜩 머금은 얼굴 피부는 좀 더 생기 있어 보이고 화장도 잘 먹는다. 자는 동안 부스스하게 이리저리 눌린 머리와 비교하면 샴푸, 린스 후 드라이기로 말린 머리스타일은 인상을 달라 보이게 하기에 포기하기가 힘들었다. 외출할 땐 반드시 아이라인을 그리고 립제품을 사용하는데, 5분만 투자해도 즉각적으로 아름다움 지수가 일정 이상 높아지기 때문에 만족도와 자신감이 꽤 상승하는 효과가 있다. 하지만 캠핑 중에 내 생기 여부를 체크할 사람이 어디 있으며(빵돌아 미안..), 매일 밥 해 먹고 정리하고 틈틈히 트래킹을 하고 호수에 뛰어들어 즐겁기에도 하루가 빠듯한데 꾸밈 노동에 버릴 시간이 어디 있냐고! 게다가 호수에서 10분정도만 파닥대도 화장은 금세 다 지워진다.

눈 뜨자마자 수영가는 중. 푸카키 호수
눈 뜨자마자 수영가는 중. 푸카키 호수

 

거창한 아젠다가 있어서 화장을 안 하기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평소 즐겨 쓰는 기본 화장품을 여분까지 꼼꼼히 챙겨 떠나왔으니까. 사실 초반엔 안 했다기보단 못한 것에 가까웠다. 매일 아침 눈을 뜨면 그저 얼른 뛰어나가 주위의 아름다움을 눈에 담고 싶어 마음이 급했다. 게다가 캠퍼밴엔 거울이 없었고 산장에서도 종종 그랬다. 한국에서는 '내 있는 그대로를 사랑해야지'를 속으로 외치다가도 매일 아침 부은 얼굴을 LED 조명 아래 거울에서 마주하면, ‘음, 물론 나를 사랑하지만 뭔가를 더하면 나를 좀 더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곤 했다. 하지만 캠핑 동안 우린 그럴 여유 없이 아침에 일어나 눈곱만 대충 떼고 신선한 공기와 커피를 마시고 산책, 탐색하는 시간을 즐겼다. 그러다 고대하던 트래킹의 어느 날, 예쁜 기념사진을 남길 요량으로 야심차게 화장을 하고 출발한 날이 있었다. 압도적인 대자연 속에 뽀얗게 정돈된 피부와 또렷한 아이라인을 가지고 찍은 사진이 그렇게 어색하게 느껴질 수 없었다.

아벨타즈만 트래킹의 어느날 아침. 쏘 해피
아벨타즈만 트래킹의 어느날 아침. 쏘 해피
타라나키 산을 배경으로. 저 땐 눈곱도 안 뗌
타라나키 산을 배경으로. 저 땐 눈곱도 안 뗌
호키티카 샌드위치샵. 인생 샌디치 먹었어요
호키티카 샌드위치샵. 인생 샌디치 먹었어요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라는 유명한 문구가 있다. 나는 항상 이 말의 반대가 더 그럴듯하다고 생각해 왔다. 보다 보면 알게 되고, 알게 되면 결국 사랑하게 된다. 화장을 안 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맨 얼굴의 나에게 익숙해졌고 사랑하게 됐다. 다시 말해, 한국에서는 내 맨 얼굴과 충분한 시간을 갖지 못했던 것 같기도 하다. 아름답게만 기억하고 싶은 여행에 맨 얼굴로 인증샷, 셀카를 찍는 일은 상상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이번 여행 기간 동안 맨 얼굴로 거의 모든 일정을 소화했고 인생 최고로 자신 있고 행복하게 사진들을 찍었다. 떠나온 한 두달 사이 내가 드라마틱하게 아름다워졌을 리는 없으니, 내 안의 완벽주의와 높은 기준점이 허물어져 스스로에게 쉽게 만족하고 받아들이게 됐다는 것으로 해석했다. 사실 주근깨 가득한 정돈되지 않은 피부와 부자연스러운 색조 없는 모습이 자연을 배경으로 훨씬 더 잘 어울리기도 한다.

아무리 간단한 화장이어도 일단 시작하면 기회가 될 때마다 내 외모를 체크하게 된다. '내 만족을 위해', '다른 사람 보여주려고가 아닌 나를 위해' 시작한 화장이지만, 끊임없이 내 모습이 괜찮은지 확인하는 과정 속에서 불완전하고 자연스러운 모습을 감춰야 한다는 무의식이 자라난다. 결국 그것은 내 만족과는 거리가 먼, 나를 위한 일이 아닌 일이 된다.

화장을 멈추자 '내가 누구에게 어떻게 보일까' 하는 생각 자체가 멈춰지고, 그게 얼마나 짜릿한 해방감을 주는 일인지 비로소 느낄 수 있었다. 서로를 얼.평하고 검열하는 것이 숨 쉬듯 자연스러운 한국 사회의 여성으로 돌아가면 과연 이런 해방감을 다시 느낄 수 있을지, 돌아가자마자 또다시 기본 화장을 탑재해 영원히 다시 내 맨얼굴과 익숙해지지 못한 채 지내게 될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도 들지만, 이 기분을 잊지 않고 잘 기억해 둬야지.

빵돌의 최애 마을 와나카 맥주집. 술은 같이 마셨는데 왜 혼자 얼굴이 만취세요
빵돌의 최애 마을 와나카 맥주집. 술은 같이 마셨는데 왜 혼자 얼굴이 만취세요
카약 열심히 타고 지친 메진. 아벨타즈만
카약 열심히 타고 지친 메진. 아벨타즈만
큐리오 베이. 스티브의 남섬 집 초대받아 갔음
큐리오 베이. 스티브의 남섬 집 초대받아 갔음
날 것 그대로의 나. 사랑한다
날 것 그대로의 나. 사랑한다

 

---------------------------------------------

밀린발행에 깊은 사과 드립니다ㅠ,ㅠ 

 

다가올 뉴스레터가 궁금하신가요?

지금 구독해서 새로운 레터를 받아보세요

✉️

이번 뉴스레터 어떠셨나요?

역마살 실전편 님에게 ☕️ 커피와 ✉️ 쪽지를 보내보세요!

댓글 2개

의견을 남겨주세요

확인
  • 쵸쵸언니의 프로필 이미지

    쵸쵸언니

    0
    6 months 전

    비공개 댓글 입니다. (메일러와 댓글을 남긴이만 볼 수 있어요)

    ㄴ 답글
  • 지민의 프로필 이미지

    지민

    0
    6 months 전

    라기엔 생얼도 아름다운 점,,,

    ㄴ 답글
© 2025 역마살 실전편

2025 세계를 떠도는 야채빵(메진,빵돌)의 여행기

메일리 로고

도움말 자주 묻는 질문 오류 및 기능 관련 제보

서비스 이용 문의admin@team.maily.so

메일리 사업자 정보

메일리 (대표자: 이한결) | 사업자번호: 717-47-00705 | 서울특별시 성동구 왕십리로10길 6, 11층 1109호

이용약관 | 개인정보처리방침 | 정기결제 이용약관 | 라이선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