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영상에 대한 감상은 대체적으로 표현하지 않고 생각만 해두는 편인데, 모처럼 이런 류의 영화를 보고 무언갈 얘기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감상은 대중성을 표방하지 않는다. 해석하는 시선이 다른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한가지 분명한 것은 문화적 소양에서 비롯된 깊이의 차이가 있다는 점이다. 그만큼 영화라는 분야에 있어 흥미를 갖게된 것도 얼마 되지 않았기에 더욱 얕을 수밖에 없지 않는가. 더군다나 좋은 영화와 나쁜 영화를 구분 짓지 못하지만 아이러니 하게도 그것을 구분할 수 있을 만큼 영화를 많이 보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제목 또는 특정 국가에서 제작된 영화를 나름대로 선별하여 관람하는데 대체적으로 일본에서 제작된, 일본이 배경이 되거나 일본 감독의 작품을 많이 보는 듯 하다. 하지만 예외적으로 최근 부산국제영화제(이하 부국제)에서 관람한 "광야시대"는 비간 이라는 중국 태생 영화 감독이 만든 작품으로, 다소 난해하게 느꼈던 감상을 뒤로 시간이 지날 때마다 재 관람하여 이해하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했다. 광야시대를 극장에서 만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기꺼이 기다릴 수 있다.

여행과 나날은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영화 중 하나였다. 하고자 하는 일에 관해 회의감이 들기 시작하면 그것은 삶의 의마와도 연결 된다고 생각한다. 그런 파도 속에서 바람이라도 쐬고 오라는 말은 아주 평범한 하루가 쌓여 더는 겉잡을 수 없을 정도로 시간이 지나버렸을 때, 원래 시점으로 돌아가기 위해 여행을 떠나 새로운 관성이 생기는 것으로 봐야한다. 아마 이 행위는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겠지만 적어도 나에겐 이미 늘어진 실을 팽팽하게 잡아당기는 의미로 다가왔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눈을 감기 전까지 끊임없이 움직이고 생산적인 활동을 해야 하는 운명이 주어진다. 그렇게 본다면 (사고가 일어나서 자연히 죽는 것이 아니라면) 인생은 꽤나 긴 달리기에 속한다고 할 수 있겠다. 그 시점에서 본다면 나는 이제서야 출발점에서 힘차게 달려나가기 시작했지만 세상의 외침이 사방에서 들려올 때면 당장이라도 그 자리에 멈춰 머물고 싶다 (누군가의 응원이 칼로서 마음을 도려낸다고 생각하니 나도 타인에게 응원을 하는 데 있어 조심스러운 마음이 든다). 그러니 환경에 의한 깊은 사색보다 단순한 하나의 행동이 더 나은 결과를 불러올 때가 있다 (내가 하는 것에 대해 마음을 불러오고 다듬는 작업이 보다 더 자유롭게 이루어지길 바랄 뿐이다). 극 중 각본가라는 직업은 본인의 경험과 끝없는 상상을 결합해 새로운 이야기를 탄생 시키는 일련의 조물주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그와 동시에 (모든 직업이 그렇겠지만) 자신의 감이 떨어지지 않도록 매사 최대한 많은 상황을 흡수할 수 있도록 준비를 해둬야 하는데, 이것은 곧바로 스트레스 내지는 회의감에 빠져들 수 있는 가장 빠른 길 위에 놓여있다고 할 수 있다. 긴장을 놓을 수 없는 만큼 달리고 있는 힘은 계속해서 줄어들 수밖에 없고 모든 것이 소진 되었다고 느낄 때 반동에 의한 무력감은 그 무엇으로도 막을 방법이 없다.
그래서 이 영화가 일러주는 것은 스스로 힘이 줄어든다고 자각하는 시점에 과감히 떠날 수 있는 용기를 전달하는 듯 했다. 우리는 현재를 살고 있지만 언제나 미래를 꿈꾸고 있다. 그래서 현재라는 시점이 미래라는 시점의 기반이 될 수 있도록 끊임없는 생산을 하는데, 결과론적으로 현재가 단단해야 미래가 탄탄해지는 단순한 결론에 도달하지만 모두가 이 점을 간과하고 있다. 그래서 현생이 바쁘면 미래가 밝아지는 줄로만 알고 있다. 나 역시도 지금 고통스러운 것이 모두 미래를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이런 식으로는 어림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각본가 "이"는 자신의 재능을 의심했지만 여행을 떠나 그 날 하루를 기억하고 천천히 흡수하는 덕분에 다시 현재를 살아갈 힘을 얻었다. 당장 여행을 떠나거나 리프레쉬를 위한 어떤 행위를 하라는 건 아니다. 다만 하루를 따뜻하고 천천히 바라보는 건 어떨까. 우리가 분명히 놓치는 것들이 존재하고 그것은 무한할 수 있으니까. 난 오늘 무엇을 따뜻하고 천천히 바라보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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