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날 연휴 첫날, 부산국제영화제에 다녀왔습니다. 아내가 생일 선물이라며 어렵게 표를 구해준 덕분에 코고나다 감독의 신작 <zi>를 재미있게 보고 왔어요. 12년 전 군부대에서 휴가를 내 처음 부산에 갔을 때도 영화표는 참 구하기 어려웠습니다. 원하는 표를 구하려고 새벽 2시부터 매표소 앞 대기 줄에서 노숙하다가, 사람들과 함께 해가 뜨는 모습을 지켜봤던 기억이 납니다. 밤을 새우고 영화 네 편을 연달아 봐도 쌩쌩할 정도로 영화에 대한 열정과 체력이 대단했던 시절이었어요.
영화와 관련된 일을 하고 싶었습니다. 나의 열정을 불태울 수 있는 일을 찾았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졸업이 코앞으로 다가오자 빨리 취업해야 한다는 부담감을 떨치기 어려웠고, 급하게 일자리를 알아보다 얼떨결에 광고대행사에서 커리어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열정을 좇지 못하고 현실과 타협했다는 생각에 잘못된 선택을 했다며 한동안 자책하곤 했어요. 좋아하는 일도 아닌데 이 업계에서 오래 일할 수 있을까 불안하기도 했습니다.
AI가 상용화되면서 전통적인 일의 개념과 경계가 흔들리고 있습니다. 왜 일을 해야 하는가, 무슨 일을 하며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도 더욱 깊어집니다. 제품을 만들고 유통하는 일이 쉬워지면서 누구나 솔로프리너로 창업하고 크리에이터가 되어 콘텐츠를 만드는 시대.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의 의미는 무엇인지 다시금 돌아보게 됩니다.
원해서 시작한 커리어는 아니지만, 저는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좋습니다. 돈을 벌기 위한 파이프라인이라고만 생각했다면 10년을 버티기 어려웠을 것 같아요. 칼 뉴포트의 <열정의 배신>은 일의 재미를 어떻게 찾아야 하는지, 앞으로 커리어를 어떤 방향으로 쌓아가야 하는지 고민할 때 좋은 지침서가 되어 주었습니다. 2019년에 나온 책이지만, 지금 다시 읽어도 일의 본질에 대한 통찰은 유효한 것 같습니다.
열정 마인드셋 vs 장인 마인드셋
칼 뉴포트는 사람들이 선호하는 직업에는 공통점이 있다고 말합니다. 자신만의 독창적인 아이디어를 발휘할 수 있는 창의성, 사회에 의미 있는 변화를 만드는 영향력, 그리고 일하는 방식을 자율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통제권입니다. 쉽지 않은 길이지만, 나만의 비즈니스를 시작하거나 콘텐츠를 만드는 일에 매료되는 이유는 이 세 가지 조건을 모두 충족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언제, 어디서, 누구와 일할지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은 상상만으로도 행복한 일입니다.
창의성, 영향력, 통제권은 일을 넘어 삶의 효용감과 자존감을 높여주는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합니다. 세 번의 이직을 거치면서 저 역시 이 세 가지 중 하나라도 더 얻을 수 있는 방향으로 커리어를 고민해 온 것 같아요. AE에서 PM으로 운 좋게 전직하면서 창의성을 더 발휘할 수 있는 일을 하게 되었고, 시장의 문제를 해결하는 여러 서비스를 맡으면서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의 크기를 키우고 싶었습니다. 신뢰를 쌓아갈수록 일하는 방식에 대한 자율성도 조금씩 커지고 있습니다. 물론 그만큼 책임도 뒤따르지만요.
가치 있는 것들이 대개 그러하듯, 이 세 가지 조건을 모두 충족하는 일은 희소합니다.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열정과 노력만 있으면 꿈을 이룰 수 있는 것처럼 말하지만, 칼 뉴포트는 열정에 대한 신화가 오히려 우리를 헤매게 한다고 경고합니다. 기회가 희소한 만큼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 필요한 자산을 쌓아야 하는데, 좋아하는 일을 찾아야 한다는 열정에 대한 착각이 오히려 더 큰 기회비용을 치르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재즈 아티스트의 사례는 열정 신화에 대한 좋은 반증입니다. 훌륭한 재즈 연주가도 처음부터 재즈에 대한 열정으로 색소폰을 분 것은 아닙니다. 생계를 해결하기 위해 연주를 시작하고, 무대에 서기 위해 피땀 흘려 연습하다 보니 어느새 즉흥적인 리듬 위에서 자유롭게 노니는 재즈 장인이 됩니다. 연주를 거듭할수록 재즈에 대한 사랑도 커져갑니다. 하지만 그가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찾느라 시간을 보냈다면 재즈와의 만남은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나의 열정을 좇는 열정 중심의 사고보다 내가 세상에 어떤 가치를 제공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장인 마인드셋이 중요하다는 칼 뉴포트의 전언에는 일의 본질에 대한 성찰이 담겨 있습니다.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보다 영화를 통해 어떤 메시지를 세상에 전할지 고민하는 사람이 더 좋은 영화감독이 될 것입니다. 기술이나 스타트업에 큰 관심이 없었던 저 역시 어느새 좋은 서비스와 제품을 만드는 일을 매일 고민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죠.

탁월함이 주는 즐거움
재즈 피아노를 몇 달 배운 적이 있습니다. 빌 에반스의 곡을 프리스타일로 연주해보고 싶다고 하니 선생님이 당혹스러워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기본적인 재즈 스케일부터 익히는 훈련을 몇 달은 해야 원하는 곡을 연주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악보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박자와 화음을 가지고 놀려면, 기본기를 익히고 악보대로 연주하는 법부터 연습해야 했습니다. 빌 에반스의 곡을 연주하는 건 쉽지 않았지만, 재즈 화성학을 공부한 덕분에 재즈 연주와 공연을 좀 더 재미있게 즐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악기 연주나 스포츠에는 탁월함을 통해 얻는 재미가 있는 것 같습니다. 처음 라켓을 쥐는 법이나 악보를 읽는 법을 배우는 시간은 지루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기본기를 익혀 서툴게나마 게임을 하거나 쉬운 곡 하나를 완성할 수 있게 되면, 노력한 만큼 큰 성취감을 느낍니다. 더 어려운 기술을 연마할수록 재미는 배가 됩니다. 나만의 생각을 더해 독창적인 플레이를 펼칠 수도 있고, 모임을 만들거나 합주를 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력을 키워나갈 수도 있습니다.
영국의 사회학자 로버트 스테빈스는 이러한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여가 활동을 '진지한 여가(Serious Leisure)'라는 개념으로 설명합니다. TV를 보거나 산책을 하는 일상적인 여가와 달리,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 실력을 키우고 발휘해야 즐길 수 있는 취미 활동은 성취감과 자기효능감처럼 더 오래 지속되는 보상을 줍니다. 진지한 여가는 러너나 요가 수련자처럼 개인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중요한 요소로 발전하기도 합니다.
일을 즐기게 되는 과정도 진지한 여가의 재미를 깨달아 가는 과정과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시장과 고객의 문제를 발굴하고 검증하는 방법, 처음엔 삐걱거리던 팀과 합을 맞춰가는 과정,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마침내 작은 성공을 만들어내는 감각. PM으로서 역량이 조금씩 쌓이고 활용할 수 있는 지식과 도구의 폭이 넓어지면서, 경험할 수 있는 세계도 점점 넓어지는 것을 느낍니다. 처음 배우고 익히는 과정은 어렵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재미에 가속도가 붙는 것 같습니다.
지금 좋아하는 일과 잘하는 일이 일치하면 좋겠지만, 꼭 그렇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서 위안을 얻습니다. 지금은 잘 모르는 분야라도 시간을 들여 배우고 익히다 보면 새롭게 좋아하는 세계가 열린다는 건 무한한 가능성을 시사하니까요. 내가 새롭게 도전해볼 만한 분야에는 무엇이 있을까 잠시 생각해봅니다. ‘내 열정은 여기에 있어!’라고 미리 정해두지 않고 마음을 조금만 열면, 생각보다 훨씬 더 많은 재미를 발견할 수 있을 테니까요.
업의 본질을 생각하기
할리우드에서 <빅 볼드 뷰티풀>을 찍은 뒤, 코고나다 감독은 대여섯 명의 영화 친구들과 홍콩으로 가 <zi>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대형 스튜디오 시스템에서 벗어나 영화와 처음 사랑에 빠졌던 순간, 그 원점으로 돌아가 다시 영화를 생각해보고 싶었다고 해요. 이 프로젝트가 영화로 완성되지 못하더라도 일단 찍어보자는 마음으로 홍콩의 로케이션을 즉흥적으로 돌아다니고, 현장에서 시나리오를 새로 써가며 계속 카메라를 돌렸다고 합니다. 결과에 연연하지 않고 영화를 만드는 과정이 얼마나 즐거웠을까요. 영화가 끝나고 GV에서 진 하 배우님의 이야기를 들으며 부럽기도 하고 멋지기도 했습니다.
코고나다와 동료들이 즉흥적이고 자유로운 방식으로 <zi>를 찍을 수 있었던 것은 모두가 영화의 본질에 대한 공감과 이해를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감독과 배우, 제작자 모두 '작은 것'이라는 이야기의 에토스에 대한 생각이 일치했기에 더 큰 창의성과 자율성을 발휘하며, 마치 재즈를 연주하듯 멋지게 협업해 영화를 완성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부끄럽게도 처음 광고대행사에 들어갔을 때는 선배들이 일하는 모습을 보며 답답하다고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새롭고 독창적인 마케팅 솔루션을 제안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저는 열정적으로 새로운 아이디어를 쏟아냈지만, 선배들은 그게 가장 중요한 것은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광고대행업의 본질이 '고객의 문제를 해결해 클라이언트를 만족시키는 것'임을 깨닫고 나서야 비로소 이 일의 묘미가 어디에 있는지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본질에는 일치를, 비본질에는 자유를, 모든 것에는 사랑을"이라는 격언을 좋아합니다. 무슨 일을 하는지, 어떻게 일하는지는 다를 수 있지만 우리가 세상에 제공해야 할 가치의 본질은 크게 다르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지금 하는 일이 마음에 들지 않고 답답하게 느껴지더라도, 그 본질이 무엇인지 생각해보면 새로운 돌파구가 보일 때가 있습니다. 본질이 아닌 것들에 집착하지 않고 내가 만들어낼 수 있는 가치에 집중하다 보면, 더 재미있게, 더 탁월하게 일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이번 주 일하는 마음 🌿
❶ 좋아하는 일을 찾는 열정보다, 세상에 어떤 가치를 제공할지 고민하는 장인 마인드셋이 중요하다.
❷ 창의성, 영향력, 통제권은 좋은 직업의 조건이지만, 이를 얻으려면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❸ 일의 재미는 처음부터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배우고 익히며 탁월함을 키워가는 과정에서 발견된다.
❹ 일의 본질에 집중하고 나머지에는 자유로울 때, 더 재미있고 탁월하게 일할 수 있다.
여러분은 어떤 마음으로 일하고 있나요? 이번 주에 일을 하며 찾은 가치있는 것은 무엇인가요?
다음 주에도 새로운 주제로 찾아오겠습니다. 뉴스레터는 매주 토요일 발행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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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 뉴포트, <열정의 배신> : 장인 정신의 중요성을 깨닫게 해주는 책. 책의 원제는 <So Good They Can't Ignore You: Why Skills Trump Passion in the Quest for Work You Love>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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