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년생 K장녀의 힘 빼기 연습

출근길 지하철, 공황이 왔다 : 급행에서 완행으로

[87년생 K장녀의 힘 빼기 연습] by 따티제

2024.01.17 | 조회 758 |
6
|

쓰고뱉다와 함께 하는 오늘의 글 한잔

당신의 존재의 온도를 딱 1도 높여주는 그런 글 한잔이 되길 바라며 -

Image by Engin Akyurt from Pixabay
Image by Engin Akyurt from Pixabay

08:00. 9호선 급행열차 안. 급행 역에 선 열차에 사람들이 밀어닥쳤다. 갑자기 몸에 힘이 쭉 빠지는 느낌이 들었다. 호흡이 가빠졌다. 손에 땀이 흥건해졌다.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분명 차내가 덥지는 않았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정신이 아득해졌다. 바닥에 그대로 주저앉을 것만 같았다. 인파에 갇혀 몸을 움직일 수도 없었다. 멈춘 것 같던 시간이 꾸역꾸역 흘러갔다. 문이 열렸다. 나는 도망치듯 지하철 밖으로 터져 나왔다.

   후들거리는 몸을 가까스로 고정하며 길고 긴 당산역 에스컬레이터에 올라 손잡이를 꼭 붙잡았다. 지하철에서의 일을 복기했다. 나에게 무슨 문제가 생긴 걸까. 아침을 계속 굶어서 그런가. 어제 커피를 너무 많이 마셨나. 아니면 혹시, 회사에 가기 싫은 걸까. 마지노선인 8시 급행열차를 잡아 탄 덕에 지각은 면했지만 고통스럽게 도착한 회사에 들어가자마자 휴가를 냈다.

   몸이 좋지 않을 때 종종 찾는 동네 내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동네에서 잘 본다고 소문이 나 항상 붐비는 곳이다. 그날은 어쩐 일인지 사람이 없어 늘 재촉하는 평소의 분위기와는 달리 의사 선생님에게서 여유가 느껴졌다. 조심스럽게 지하철에서의 일을 털어놓았다. 뜻밖의 대답이 이어졌다.

ㅡ현대인의 질병이에요.

ㅡ네?

ㅡ지금 환자분은 조건 반사적일 수 있어요. 특정 조건을 피해 보세요. 그리고 오늘부터 매일 땀이 날 만큼 빠르게 50분씩 걸으세요. 자율신경계의 균형을 잡는 데 도움이 될 겁니다.

   그의 확신에 찬 눈빛과 별것 아니라는 듯 차분한 목소리에 왠지 마음이 놓였다. 소위 ‘현대인의 질병’으로 그 곳을 찾아온 환자들이 한 둘이 아니었음이 분명했다. 그 곳은 정신의학과도 아니고 내과였는데 말이다.

   그날 밤부터 당장 공원으로 나가 걷기를 시작했다. 얼마 만에 걷는 걸음인가. 이전에는 많이도 걸어 다녔었는데. 새벽에는 조깅도 하고 주말에는 한강도 뛰었는데. 그동안 무얼 하고 살았던 것일까. 걷기를 시작하자 손과 발이 땡땡 붓기 시작했다. 심장박동도 느껴지고 딱딱하게 굳은 어깨가 결렸다. 그래도 걸었다. 십 분, 이십 분, 삼십 분, 한 시간. 한 시간. 한 시간. 매일 그렇게 살기 위해 걸었다. 다행히도 걷기는 효과가 있었다.

   숨 막히는 급행은 타지 않기로 했다. 조금 오래 걸리더라도 완행을 택했다. 처음에는 한 정거장을 가는 것도 쉽지 않았다. 한 정거장 가서 내리고 다음 날엔 두 정거장 가서 내렸다. 버스를 부러 갈아타기도 했다. 그러다 조금씩 조금씩 괜찮아졌다. 지금 되돌아보니 나름의 인지행동치료를 했던 것 같다. 물론 나의 경우와는 달리 적극적인 상담과 치료가 필요한 경우들도 있을 것이다.

   현대인의 질병이라니 증상은 몸으로 나타났지만 분명 정신적인 문제로부터 시작되었을 것이었다. 노트북을 켜고 빈 페이지를 열었다. 그리고 적기 시작했다. 내 마음을. 감정을. 나를 힘들게 하는 그 모든 것들을. 잠시 머뭇거리나 싶던 나의 손은 어느덧 빈 문서를 문제의 근원들로 빼곡히 채우고 있었다. 그랬다. 이유가 있었다. 힘들었다.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삶이, 승진이, 연봉이, 세상이.

   이전 회사에 사표를 내던 날이 떠올랐다. 입사하자마자 이어진 야근에 체력이 버티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 자리를 감당할 수 없다는 나의 말에 상사가 이렇게 말했다.

ㅡ라떼는 매일 야근했어. 주말 그런 것도 없었어. 요즘 애들은 나약해. 왜 다른 사람들은 다 하는데 너는 못해?

ㅡ네. 저는 못하겠어요.

   왜 내 그릇은 이렇게나 작아서 고작 야근 하나 못하는지. 직장생활에서 오는 스트레스 하나하나 그냥 무던히 버텨내지 못하고 흔들리는지. 나는 늘 나를 탓을 했다. 하지만 문제는 내가 아니었다.

   물질적 풍요 속에 배부른 소리 하고 있다는 어른들의 말씀이 귀에 맴돈다. 아니? 배부른 소리가 아니다. 세상이 달라졌다. 경쟁은 치열해졌고 도시는 비대해졌다.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희망은 점점 사라지는 것만 같다. 적어도 평범한 직장인인 나에게는 그랬다. 하지만 모두 나를 탓했다. 일단 거기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다. 나를 몰아붙이기를 멈춰야 했다. 그리고 나서 내가 정녕 지켜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것을 지키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야 했다.

   지하철에서의 경험 후, 신기하게도 그와 같은 혹은 비슷한 경험을 했다는 지인들의 이야기가 들려왔다. 어쩌면 그동안 나는 나의 귀를 닫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때로는 내가 먼저 털어놓기도 했고 때로는 상대가 먼저 이야기를 꺼내기도 했다. 분명 이는 나만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모두 각자에게 찾아온 현대인의 질병을 저마다의 방식으로 싸워내고 있었다.

ㅡ너도 그랬어? 나도 그랬어.

   이 말을 얼마나 주고받았는지 모른다. 이상하게도 이 말은 적잖은 위로가 됐다. 어쩌면 우리는 모두 아픔을 자기 탓으로 돌리며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는 스스로를 채찍질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서로의 경험을 공유하며 적어도 너와 나는 서로를 이해했다. 그리고 말해줬다. 참 많이 힘들었겠다고. 그동안 정말 애썼다고.

   급행을 타면 한 시간이면 도착하는 출근길이지만 여유롭게 두 시간 일찍 집을 나섰다. 러시아워의 인파를 피해 느긋하게 완행을 타고 가기 위함이었다. 조금 이른 시간이라 붐비지 않아서인지 평소처럼 지하철이 연착하거나 정차하지도 않고 물흐르듯 회사에 도착했다. 회사 건물 일 층을 괜히 두리번거리다 모퉁이에 보이는 김밥집에서 아침을 먹기로 했다. 어색한 몸짓으로 가게 문을 조용히 열고 들어가 내가 좋아하는 참치김밥을 한 줄 시켰다. 따뜻한 국물로 마른 목을 한 모금 축이니 금세 가슴에 따뜻한 기운이 돌았다. 구름에 가려져 있던 뜨는 해가 김밥집 유리 통창을 뚫고 쨍하게 식당 안을 채우고 있었다.

Image by ddatj
Image by ddatj

 

 

[저자소개]

필명 따티제. 풀어서 말하면 따뜻한 인티제(MBTI 성향 중 INTJ의 별칭). 서울 올림픽 기억 안나는 87년생. 흔한 K장녀. 혼자 다 해야 하는 작은 외국계 기업 1인 마케터로 본능을 거스르고 알잘딱깔센(알아서 잘 딱 깔끔하고 센스있게) 강제장착. 아무거나 안 하는 고집쟁이 프리랜서 도전 중. 밥먹듯이 밤새는 수학강사의 아내. 쓰고뱉다 21기(대한민국 No.1 글쓰기 강좌)에서 글 배우는 중. 정리되지 않은 누군가의 마음 속 이야기를 대신 해주는 듯, 읽으면서 시원해지는 글을 쓰려는 중. 오후 늦게 일을 시작한 포도원 일꾼들에게도 일찍 일을 시작한 이들에게와 같은 품삯을 주는 사회적기업 대표가 되는 꿈 꾸는 중.

글쓰기 모임 <쓰고뱉다>는 함께 모여 쓰는, 같이의 가치를 추구하는 글쓰기 공동체입니다. 개인의 존재를 가장 잘 표현해 줄 수 있는 닉네임을 정하고, 거기서 나오는 존재의 언어로 소통하는 글쓰기를 하다 보면 누구나 글쓰기를 잘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걸어왔고, 걸어가고 있습니다. 뉴스레터로 발송되는 글은 <쓰고뱉다> 숙성반 분들의 글입니다. 오늘 읽으신 글 한잔이 마음의 온도를 1도 정도 높여주는 데 도움이 되셨다면 아래 댓글 보러 가기를 통해 본문 링크에 접속하여 커피 보내기기능으로 구독료를 지불해 주신다면 더욱더 좋은 뉴스레터를 만드는 데 활용하겠습니다.

 

다가올 뉴스레터가 궁금하신가요?

지금 구독해서 새로운 레터를 받아보세요

✉️

이번 뉴스레터 어떠셨나요?

쓰고뱉다와 함께 하는 오늘의 글 한잔 님에게 ☕️ 커피와 ✉️ 쪽지를 보내보세요!

댓글 6개

의견을 남겨주세요

확인
  • 쓰니신나

    0
    8 months 전

    너도 그랬어? 나도 그랬어... 위로... 오늘 내 삶의 어디가 급행인지 돌아보고, 완행으로 바꿀 수 있는지 생각해보게 되네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ㄴ 답글 (1)
  • 묘로리

    0
    8 months 전

    크,,, 너무좋다~~~~답답했던 이전에 기억도 추억으로 소환해 읽을 수 있게 해주는 따티제!!마지막 김밥집 장면은 마치 미생에 한 장면처럼 느껴지며 상상이되었어!! 이번글은 마치 시나리오같기도!! 내마음에 오늘의 완행을 선물해주어 고마워요!!! 💜

    ㄴ 답글 (1)
  • yunL

    0
    8 months 전

    조금 오래걸리고 돌더라도 숨이 쉬어지는 방향으로, 마자 나도 그랬었는데. 너무나 공감됩니다.

    ㄴ 답글 (1)

© 2024 쓰고뱉다와 함께 하는 오늘의 글 한잔

당신의 존재의 온도를 딱 1도 높여주는 그런 글 한잔이 되길 바라며 -

뉴스레터 문의 : danmoo777@naver.com

자주 묻는 질문 오류 및 기능 관련 제보

서비스 이용 문의admin@team.maily.so

메일리 (대표자: 이한결) | 사업자번호: 717-47-00705 | 서울 서초구 강남대로53길 8, 8층 11-7호

이용약관 | 개인정보처리방침 | 정기결제 이용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