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년생 K장녀의 힘 빼기 연습

부풀던 풍선이 터져버렸다 : 내가 힘을 빼기 시작한 이유

[87년생 K장녀의 힘 빼기 연습] by 따티제

2024.01.03 | 조회 68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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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고뱉다와 함께 하는 오늘의 글 한잔

당신의 존재의 온도를 딱 1도 높여주는 그런 글 한잔이 되길 바라며 -

Photo by user drniels on Freeimag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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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정. 나를 설명하는 대표적인 단어다. 아니, 그랬었다. 사람들은 나를 보며 늘 열심히 한다고 했다. 가끔 걱정해 주는 사람들도 있었다. 너 같은 성격은 휘어지는 게 아니라 부러져버리니까, 그전에 멈추라고 또는 이제 그만 그렇게 달릴 때도 됐다고 했다. 하지만 스스로 충분히 열심히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제 그만 달리라는 말에 도대체 뭘 얼마나 했다고 그만하라고 하냐고 속으로 볼멘소리를 했다.

   조금만 더 열심히 하면 될 것 같았다. 오늘 조금 더 잠을 참으면, 내일 조금 더 애를 쓰면 조만간 목적지에 닿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취직을 하고 이직을 할 때마다 평범하고 특출 날 것 하나 없는 나에게도 드디어 기회가 찾아왔다고 생각했다. 늘 일을 만들어 내고 그 일에 스스로 치였다. 상사의 기분을 맞추기 위해 체질에도 맞지 않는 술을 들이키며 ‘술’ 자가 붙은 별명을 얻기도 했다. 하지만 그 자리에서 허락되는 딱 그만큼의 벽을 넘어 비상할 수는 없었다.

   상사의 말마따나 부러지는 순간이 곧 찾아왔다. 그 부러짐이란 곧고 굵은 나뭇가지가 태풍을 맞아 우지끈하는 소리를 내며 요란하게 끊어지는 것 같은 형태가 아니었다. 이리저리 잘 휘는 고무호스가 계속 같은 방향으로 휘어댄 자리에 실 틈이 생겨 갈라지기 시작하는 느낌이랄까. 어느 날 훅 하고 맥이 빠졌다. 구멍 난 호스로 물이 새어 나가는 것 같은 그 순간은 내 역할이 더 이상 확장되지 못하는 때였다. 더 이상 이곳에서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 그 지점에서, 나는 계속해서 사표를 던졌다.

   회사에서는 사표라는 걸 낼 수 있지만 개인의 삶에 찾아오는 맥이 빠지는 순간들은 고스란히 겪어내야만 하는 류의 것들이 많았다. 관계 속 나의 역할들로부터 오는 무게, 내가 살고 있는 도시와 이를 배경으로 한 무한 경쟁 속 피로, 그리고 무한히 변해가는 나를 둘러싼 환경들도. 사실 피하려는 생각을 하지도 않았다. 그냥 받아치려고만 했고 잘 받아치는 것이 능력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피로는 애먼 곳에서 불쑥불쑥 고통의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는 것을 나중에서야 알게 됐다.

   설상가상으로 퇴사 후 결혼한 지 몇 년 만에 처음 품게 된 작은 생명을 떠나보내야 했다. 그 상실은 그동안 발 디뎌보지 못했던 또 다른 세상으로 나를 내몰았다. 몸도 마음도 모든 것들이 낯설었다. 무언가 한참 잘못되어가고 있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지도 모르겠었다. 잠시 쉼표를 찍겠다던 나에게는 잠시보다는 조금 더 긴 시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한 달, 반년, 일 년이 흘렀다.

   일 년의 시간 동안 일기를 쓰듯 과거를 천천히 그리고 촘촘히 돌아봤다. 왜 이렇게 멈춰있어야 하는지 이유가 필요했다. 실수로 놓친 통제 요인을 발견해 내야만 이 모든 일들에 마침표를 찍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교회를 다니며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 나는 특히나 더 그랬다. 기독교적(혹은 종교적) 세계관 속에 고난과 역경은 무엇을 잘못해서 찾아온다는 권선징악적 해석이 익숙했기 때문이다. 모든 사건들은 그분의 뜻이 있다는, 그 뜻을 놓치지 않고 찾아야만 한다는 강박이 나를 지배했다.

   하지만 아무리 과거를 샅샅이 뒤집어봐도 내 삶에 남겨진 일들의 인과관계는 명확히 연결되지가 않았다. 그렇다고 덮어놓고 모든 것들을 내 실수나 잘못으로 해석할 수는 없었다. 처음에는 당황했고 그러다 화가 났고 결국 ‘열심히 살아서 뭐 해.’, ‘내가 하는 일들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라는 자포자기에 이르렀다. 온통 어지럽혀진 생각 속에서 어느 날 한 문장이 떠올랐다. 누군가 입고 있던 티셔츠에서, 혹은 지하철 화장실에서 봤을 것이었다. 그 문장은 신학자 라인홀트 니버의 기도문, ‘평온을 비는 기도’였다.

   “주여, 우리에게 우리가 바꿀 수 없는 것을 평온하게 받아들이는 은혜와 바꿔야 할 것을 바꿀 수 있는 용기, 그리고 이 둘을 분별하는 지혜를 허락하소서.”

   모든 것을 바꿀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바꿀 수 없는 것들이 있다는 사실을 거부했다. 그 사실을 끌려가듯 인정하고 나서는 극단의 지점으로 반항하듯 건너가 그저 삶이 수동적으로 끌려 가기만을 바랐다. 하지만 그 어느 쪽도 답이 아니었다. 균형을 잡기 위해서는 반드시 받아들여야만 했다. 삶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모두 통제할 수 없다는 것을. 깊이 호흡을 들이마시고 내쉬며 힘을 빼는 선택만이 필요한 순간들이 있다는 것을. 내 잘못도, 누구의 잘못도 아니라는 것을.

   바짝 준 힘을 빼니 조금씩 여유가 생겼고 그동안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내 안에 꽁꽁 숨겨뒀던 진짜 감정, 나를 변함없이 사랑해 주는 사람들, 그리고 지금 내가 밟고 있는 현재에서 매일 증발해 버리는 아름다움과 같은 것들 말이다. 성패나 성패의 원인을 찾는데 사로잡혀 그동안 놓치고 살았던 것들이 지천에 널려있었다. 아직은 조금 데면데면하다. 하지만 알 수 있다. 막 들어선 이 길이 과거의 목적지와는 다른, 닿을 수 있는 곳으로 나를 인도하고 있다는 것을.

Photo by ilgon hwang on Pixab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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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소개]

필명 따티제. 풀어서 말하면 따뜻한 인티제(MBTI 성향 중 INTJ의 별칭). 서울 올림픽 기억 안나는 87년생. 흔한 K장녀. 혼자 다 해야 하는 작은 외국계 기업 1인 마케터로 본능을 거스르고 알잘딱깔센(알아서 잘 딱 깔끔하고 센스있게) 강제장착. 아무거나 안 하는 고집쟁이 프리랜서 도전 중. 밥먹듯이 밤새는 수학강사의 아내. 쓰고뱉다 21기(대한민국 No.1 글쓰기 강좌)에서 글 배우는 중. 정리되지 않은 누군가의 마음 속 이야기를 대신 해주는 듯, 읽으면서 시원해지는 글을 쓰려는 중. 오후 늦게 일을 시작한 포도원 일꾼들에게도 일찍 일을 시작한 이들에게와 같은 품삯을 주는 사회적기업 대표가 되는 꿈 꾸는 중.

[쓰고뱉다]

글쓰기 모임 <쓰고뱉다>는 함께 모여 쓰는, 같이의 가치를 추구하는 글쓰기 공동체입니다. 개인의 존재를 가장 잘 표현해 줄 수 있는 닉네임을 정하고, 거기서 나오는 존재의 언어로 소통하는 글쓰기를 하다 보면 누구나 글쓰기를 잘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걸어왔고, 걸어가고 있습니다. 뉴스레터로 발송되는 글은 <쓰고뱉다> 숙성반 분들의 글입니다. 오늘 읽으신 글 한잔이 마음의 온도를 1도 정도 높여주는 데 도움이 되셨다면 아래 댓글 보러 가기를 통해 본문 링크에 접속하여 커피 보내기기능으로 구독료를 지불해 주신다면 더욱더 좋은 뉴스레터를 만드는 데 활용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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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2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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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펄케이

    0
    8 months 전

    비공개 댓글 입니다. (메일러와 댓글을 남긴이만 볼 수 있어요)

    ㄴ 답글 (1)
  • 쓰니신나

    0
    8 months 전

    내 잘못도, 누구의 잘못도 아닙니다... 힘을 빼고 놓치고 있는 것들을 꽉 붙들고 싶네요. 진솔한 글 참 감사합니다^♡^

    ㄴ 답글 (1)
  • Enddl59

    0
    8 months 전

    한줄 한줄 너무나도 공감가는 이야기입니다. 열심히 잘 해내고 있다고 나에게 응원해주고 싶어요.

    ㄴ 답글 (1)
  • 휘바휘바

    0
    8 months 전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그 영역들 안에서 끝내 마음을 놓지않고 지금까지 잘 버티어낸 따티제 작가님의 삶을 늘 응원합니다! :) 다음 연재도 너무 기대되네요^^

    ㄴ 답글 (1)
  • 묘로리

    0
    8 months 전

    당신의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가 나의 이야기같으면서도 우리의 이야기같은,,, 인생 그자체라고 느껴져요!!!따뜻한 통찰을 아름다운 글로 풀어써주셔서 고맙습니다! 다음주 수요일이 기다려지는 이유! 따티제🩷

    ㄴ 답글 (1)
  • yunL

    0
    8 months 전

    따띠제 님의 깊은 마음이 느껴지는 이야기예요, 나누어주어 감사합니다.

    ㄴ 답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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