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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오는 미래 앞에서 우리는

2024.04.11 | 조회 44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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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오는 미래 앞에서 우리는

 

 

간헐적 단식

 

마음과 관련된 것이면 모조리 모으는 사람이 있었다 고개를 갸우뚱하듯 책이 쓰러지기 전에 책장을 채워 넣던 사람 제목들을 읽으며 서 있기만 해도 좋았다는데 더 좋아하려는 관성 때문에 책이 더 넘쳐흘렀다 현관을 지나 집 밖까지 새어나가면 추천이 되고 가끔은 약속으로 변하고자 하던 마음 좋아해 줘 오래 연구했어 아침에 깨면 부스스해진 머리를 하고 모아둔 것들에 파묻혀서는 종종 아팠다는 사람 그 사람은 더 같이 있으려고 괜히 음식을 더 먹은 게 아닐까 배부른 채 누워서 속이 자주 힘들었다는 그 사람을 오랜만에 만났다 요새는 저녁을 잘 안 먹는대 사랑도 잘 안 한대 비쩍 말라서 새벽을 가볍게 맞이하는 때가 좋아졌다는 사람 홀쭉해진 그 사람을 보며 그럼 이제 책은 안 모으니 물었다 간헐적 단식이라는 정보를 읽었다고 했다 하루에 몇 시간만 마음을 돌보고 조금 가벼워지겠다고 했다 오늘의 마지막 운행 전철이 야경 사이를 지나갔다 수고했어 다음에 보자 이제 먼저 그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그 사람

 

 

시티 팝

"평소에는 시티 팝을 듣지" 라고 내가 말했을 때 "그렇구나 시티 팝 좋지" 라고 말한 당신에겐 어떤 곡이 떠올랐을까 되물어보지 못하듯 전철은 앞으로만 갔지 곡이 떠올라도 제목까지는 몰랐을 수도 있어서 시티 팝이라는 장르명이 준비된 건지도 몰라 호감이라는 장르 아래 우리는 무엇을 만들고 있는 걸까 인사한 후의 손은 곡의 제목을 타자 쳤지 컴퓨터 화면으로 뮤직비디오가 재생되었어 동영상에서는 아직 도시를 달리고 있는 전철이 외국어가 적힌 간판들 사이로 들어갔지 읽을 수 없으면 그림일 뿐 그래서 서로를 보기만 했던 걸까 위스키에 넣은 얼음이 천천히 녹다가 남아서 싱크대에 버려진 하루 같아 다음 날이면 새로 생기고 아무렇지 않은 척 인사하겠지 봄이 오고 벚꽃이 펴도 나는 시티 팝을 듣고 있을 거야 평소라는 값은 사계절 모든 날을 바탕으로 계산되고 나는 우리 사이의 제목을 이미 혼자 알고 있었어

 

 

다가오는 미래 앞에서 우리는

 

차의 뒷문이 달칵, 하고 열렸다 나는 졸고 있었는데 눈을 뜨자 아버지가 올려다 보였다 그 뒤로 펼쳐진 벚꽃이 불꽃놀이처럼 흩어지고 있었다 우수수 흩날리는 벚꽃을 보며 사람들은 탄성을 자아내고 있었다 구경을 가자는 아버지의 말씀에 나는 차의 바깥으로 발을 옮겼다 벚꽃 나무 아래에는 많은 차들이 주차되어 있었다 모두 누구의 것일까 차는 비어 있었고 사람들은 행복해 보였다 누군가의 어깨에 앉아있는 아이들부터 사진을 찍는 연인들까지 잠시 벚꽃과 서로만으로도 충분해 보이는 시간 그 속에서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를 상태였다 대학을 졸업했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었다 적응하고 있다고 여기기로 했는데 왜 그리 주변에서는 새 소식을 전하려고 하는지 주모자는 누구야? 학사모는 바람에 날아간 것 같고 사람들은 두리번거렸다 무엇이 우리를 이렇게 만든 거야 시간이 꽃 뒤에 숨어있었고 꽃잎과 함께 떨어졌다 앞으로 무얼 하고 싶니 아버지는 내게 물으셨다 사람들은 다시 차를 타러 갔다 무엇을 위해 태어났는지 알고 서두르는 걸까 벚곷이 핀 거리는 밤이 깊어갈수록 사람들을 잃었다 전 아무래도 걸어가야겠어요 무슨 소리니 얼른 가야지 말씀하시는 아버지에게 흰 머리카락이 매달려 있었다 나는 내 볼을 만져보았다 꽃잎이 묻었다고 착각했다가 그대로 볼을 잡아당겨보았다 뜨고도 더 떠야 할 눈이 있었다

 

 

판독

 

하루는 전차 위에 서 있었다 열린 문을 내려다보자 들어가려고 하는 건지 이곳에서 나와 돌아보고 있는 건지 순간 나조차 구분하지 못했다 "결국 다시 들어가려나 보군요 저처럼" 다른 전차를 타고 있는 사람이 뚜껑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말했다 그 사람은 전차를 타고 어디론가 갔다 전차의 뒷모습을 보는 건지 그 사람의 뒷모습을 보는 건지 나는 무릎을 굽히고 전차를 쿵 쿵 두드려보았다 움직이지 않았다 전차가 되어야 전차를 움직일 수 있었다 누군가의 명령이 자꾸 안쪽에서 크게 들렸다 따르지 않으면 큰일이라도 나듯 스스로가 전차와 구분되지 않았다 훗날 기억 속에 전차만 있고 내가 없으면 어쩌지? "전쟁이 곧 끝날 테니 걱정 마세요." 무전이 계속 들렸다 나는 믿을 수 없었다 결정되기도 전에 가해지는 판단이 있었으므로

 

 

저기 아직 사람들이 있네요 우산이 없는데도요

 

막내 화가가 허겁지겁 달려오더니 비 소식이 있다고 알린다 우리는 길에 전시해놓은 그림을 건물 안으로 들인다 입구는 어수선해지고 밖에서 비가 한 방울씩 떨어지기 시작한다 "저기 아직 사람들이 있네요 우산이 없는데도요" 막내 화가가 가리킨 쪽을 보니 태연하게 담배를 피우며 비 맞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막내 화가를 잡아당긴다 "이리로 오렴 비 맞겠다" 우리는 그림과 함께 건물 안에서 서서 비를 본다 창문에 툭 툭 부딪히며 비가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있다 "우리가 물러난 건가요?" 막내 화가가 당장이라도 비에 뛰어들 기세로 물어온다 오래 준비해온 전시인 만큼 더 거리로 내보이고 싶은 마음을 나는 이해하지만 말려야 한다 "그림은 정작 자연 현상 앞에서는 보호받아야 하거든 순식간에 망가질 수 있어" 비가 세차게 내리자 사람들이 피우던 담배를 끄고 서둘러 흩어진다 누군가는 우산을 펼쳐든다 '그럼에도 사랑을 계속하겠다는 사람이 있고 저기 우산이 없어도 태언히 비를 맞으며 걷는 사람도 있고' 말하다가 나도 물러나기 싫다는 생각이 든다 오늘 전시는 여기서 마감! 기획자의 말이 들린다 우리는 우산을 펼치고 국수를 먹으러 간다 식당에 들어가 앉는데 옷이 군데군데 비에 젖어 있다 사랑은 예술이 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하는 거라는 생각을 잠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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