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적 시기와 청년 예술

공중에 새 제목이 쓰이듯이

<독립적 시기와 청년 예술 1화>

2023.11.26 | 조회 28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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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월의 어느 여름날, 나는 양손으로 캐리어를 끌고 뜨거운 태양빛을 맞아 땀을 흘리고 있었다. 서울의 어느 횡단보도 앞에 서 있었는데 무더운 날씨가 건너편에서 아지랑이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어쩌면 빠르게 달리는 자동차들의 속력이 만들어내는 착시일지도 몰랐다. 도로에서는 수많은 자동차들이 끊임없이 줄을 이루어 달리고 있었다. 나는 저 차 안의 사람들은 어떤 기분일까 생각하고 있었다. 단순히 풍경을 보는 게 아니라 풍경 속 생활에 이입했다. 그렇다. 나는 서울로 올라왔다. 스물일곱. 만으로는 스물다섯인 나는 여행이 아니라 살기 위해 서울로 왔다.

 

 살아야 했다. 직업을 구하고 4대 보험을 들고 납세의 의무를 다하면서 이 나라의 경제 활동 인구가 되어야 했다. 대학을 졸업한 지는 약 4개월. 부산 토박이인데다가 국문학과 출신인 나는 지난겨울부터 일자리를 알아보았으나 나를 불러주는 곳은 없었을뿐더러 입사 지원을 받는 회사의 수도 많지 않았다. 일자리가 없다는 뉴스들이 체감되었다. 지역을 서울로 변경하여 검색하니 훨씬 많았다. 나는 그래도 부산에 있고 싶어 4개월 내내 겨우 채용 공고를 긁어모아 약 30여 개의 일자리에 지원했지만 무소식이었고 마냥 기다리며 시간만 보내기에는 스물일곱이란 나이가 적지 않았다. 그러던 와중 서울에서 나를 불러주는 곳이 있었다. 나는 결정해야 했다. 이대로 고향에 남아 계속해서 있을 것인가. 서울로 갈 것인가.

 

 갈게. 서울로.

 

 그 말을 가족에게 했을 때 나는 오히려 이런 말을 하는 나 자신이 의외라고 느끼지 않는다는 점에 놀랐다. 어쩌면 은연중에 서울로 가게 되리라고 짐작하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어릴 적부터 부모님께 "나중에 서울로 가야지."라는 말을 지겹도록 들어서였을 수도, 주변의 친구들이 하나씩 서울로 떠나서일 수도 있었다. 그리고 서울이 일자리가 많다는 점을 점차 체감해서일 수도 있었다. 서서히 나는 현실을 보게 되었다. 물론 부산에 남아있는 친구들이 아직은 많았다. 그렇지만 각 모임마다 모든 구성원이 부산에 남아있는 경우는 없었다. 5명 중 1명꼴은 이미 서울로 간 셈이었다. 그 현상으로부터 느꼈다. 아, 이젠 예전처럼 모두 부산에서 쉬이 만날 수 없겠구나. 그렇다면 나는 부산에 있을 것인가. 떠날 것인가. 사실 이 질문에 내 자의가 반영되기는 어려웠다. 마냥 부산 일자리에서 연락 오기를 기다릴 순 없었고 당장은 떠나야만 일을 할 수 있으니까.

 

 떠나기는 싫지만.

 

 떠나야 했다. 객관적으로 바라본다면 그래야 했다. 일자리가 불러주었으니 가야 했고 예술인으로서도 조금 더 넓은 경우를 얻으려면 가야 했다. 오래전부터 들어온 말들이었다. 한 번 사는 인생, 서울에서 살아봐야지. 시훈아. 서울에는 문화 예술 분야 시장이 훨씬 크게 형성되어 있어. 네가 서울에 살았으면 어쩌면 더욱 빠르고 많이 알려졌을지도 모르겠어. 시훈 씨, 지방은 아무래도 한계가 있죠. 서울에 오면 새로운 세계를 경험할 수 있을 거예요. 그 말들에 진저리가 났으나 나는 결국 받아들여야 했다. 그토록 거부감을 느끼던 서울 공화국 현상을 나도 피해 갈 수 없었고 사랑하는 고향을 떠나야 했다.

 

 네가 서울로 간다고? 믿기지 않아. 너는 부산에 남을 거라 생각했는데.

 

 모든 친구들이 내게 그 말을 해주었다. 부산에서 출판 활동을 했고 작품들에 부산을 향한 애정을 담아왔으니까. 어디 가서 자기소개할 때도 부산 출신임을 잊지 않고 언급했다. 친구들 사이에서는 시훈=부산이 공식화되어 있었다. 그랬던 공식이 깨지는 것은 친구들에게 충격이었나 보다. 언제나 광안리에서 맥주 한잔하고, 송상현 광장으로 불러내서 산책하고, 서면의 김치찌개 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동아대학교를 다닐 것 같은 시훈이었으니까. 지역 예술가로서 언제나 수도권 중심화에 맞서 지역 문화 활성화에 이바지했을 것 같았으니까. 그러나 나는 졸업했고, 그동안 지역 문화 활성화에 힘쓴 노력에 비해 얻은 게 없었다. 정체되어 있을 수는 없었고 친구들에게 말해야 했다. 이제 난 그럴 수 없어. 앞을 봐야겠어. 마치 예전에 발표한 노래와 같은 곡은 더 이상 쓸 수 없다고 말하는 가수의 기분이었다.

 

 다행히 친구들은 나의 그런 말에 긍정적인 자극을 받았음을 전했다. 시훈에게 일어난 본격적인 변화에 본인들도 뭔가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너의 떠남은 우리에게 있어 또 하나의 국면이야. 다들 네가 떠나면서 분주해지기 시작했어. 아, 이거 진짜 시작이구나. 우리도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되겠구나. 더 열심히 살아야겠구나. 나의 떠남을 긍정적으로 소화해 주어서 고마웠고 기억하기를 부탁하듯 말했다. 나는 고향을 사랑해. 고향에서의 활동에 정말 최선을 다했어.

 

그리고 이제 서울에 서 있었다.

사랑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

 2023년 3분기 기준, 통계청 국가 통계 포털에 따르면 수도권으로 유입된 20대는 4만 7천 명에 달했다. 전국 각지에서는 청년이 유출되었고 그 결과 인구분포도를 보면 서울 쪽이 폭발할 만큼 부풀어져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러한 기형적인 구조에 결국 나도 함께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서울에 가기로 결정했을 때 가슴이 답답한 것은 괜히 그런 게 아니었다. 올라온 건 2분기였지만 이미 괴이해질 대로 괴이해진 구성에 속한다고 생각을 하니 나 자신도 사회의 이상 현상에 이바지하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정부는 지역 주도형 일자리 사업, 지역 예술인 지원 등의 대책을 내놓았지만 서울로의 청년 유출은 완화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것은 일시적인 정책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청년 프로그램들에 참여하여 장기적인 관점에서 바라보고 수도와 지역 간의 심리적 문화적 인프라적 격차를 해소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내기도 했지만 정책에 반영되지는 못했다. 내게 남은 그 목소리로 이제 난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사회 현상에 관련된 대학원 진학을 포기한 것도 비슷한 이유에서였다. 결국 어떤 논리를 내어도 정부적 차원의 해결 방안 마련이 필요하다는 결론 앞에 막혔기 때문이었다. 나는 실질적인 해결을 원했지만 알고 있었다. 서울공화국 현상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버렸고 이것을 바꾼다는 것은 한국이라는 사회 체제를 상당 부분 전복시켜야 한다는 것을. 정부도 알고 있지만 어쩌면 알기에 그러지 않는 것일지도 몰랐다. 이런 생각을 할 때면 스스로가 반사회적인 인물이 된 것 같았다. '반서울이 곧 반사회였군.'

 

 답답함을 해소하는 방법으로 택한 건 나를 행위 예술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자, 나는 발버둥 쳤으나 어쩔 수 없이 결국 서울로 가고 말았다. 나의 경로는 한국 사회가 낳은 산물이다. 이제 뜻대로 되라지. 내가 어떻게 되는지 보라지. 이것이 전국적으로 알려질 예술일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어떤 홍보도 없이 전시된 독립 예술 작품과도 같은 내게 아무도 관심이 없을 거라고 비관하려던 찰나 엄마에게서 전화가 왔다.

 

 아들. 잘 갔니. 동사무소에서 전입 신고 확인하고 임대 계약서에 도장도 받아야 한다. 네, 네. 나는 횡단보도 건너기를 미루고 근처 어느 벤치에 앉아 전화를 받았다. 전화기를 꼭 쥐고 통신 전파가 되어보는 생각을 했다. 300km를 넘는 거리를 지나 부산에 있는 엄마, 우리 집, 그리고 우리 동네와 점점 더 나아가 광안리, 남포동 하단 등등... 다대포에서는 파도가 치고 있겠지? 동아대에서는 학생들이 지금도 공부하고 있겠지? 그러나 내 눈앞에는 서울이 있었다. 이야기의 큰 틀이 달라진 것 같았다. 같은 날씨여도 부산에 있을 때와는 느낌이 달랐다. 푸른 나무들과 뜨거운 햇빛 속에서 다른 세상의 청춘이 시작된 것 같았다. 이것은 연속극이지만 독립된 별개의 시리즈. 누리던 고향을 뒤로 한 나의 앞으로 당장 새로운 제목이 뜰 것만 같았다.

 

 전화를 끊고 나는 손바닥을 바라보았다. 빨갛게 선이 생겨 있었다. 캐리어의 손잡이를 오래 쥔 흔적이었다. 두 개 중 하나의 캐리어에는 CD, 책 등이 있었다. 본가에 있는 수백 장의 그것들을 전부 가져올 수는 없었기에 당장 서울살이를 하게 되면 내가 자주 찾게 될 것 같은 것들만 엄선한 모음이었다. 하늘로 비행기가 지나갔고 건물들이 전부 높았다. 무거운 예술 작품만을 끙끙대며 운반하고 있는 한여름의 내가 너무 작게 느껴졌다.

 

 챙겨온 작품들에는 묘한 공통점이 있었는데 다음 주제들을 다루는 것이었다.

 

 (청년의 상처와 고독 그리고 방황하는 심리를 묘사한 작품) ex. 아웃사이더 <Maestro>, 리쌍 <Hexagonal>, Kendrick lamar <Good kid m.a.a.d city>, Daniel Caesar <Case study 01>, Green Day <Dookie> 등

 (도시에서 살아가면서 겪는 피로, 우울감, 성취감, 낭만 등을 골고루 담아낸 작품) ex. Radiohead <Ok Computer>, Drake <Views>, Khalid <Free Spilit> 등

(방 안에서 예술을 보존해주고 성공할 의욕을 돋구어주는 작품) ex. Bill evans <Village Vanguard at Sunday>, Weyes Blood <Titanic Rising>, J Cole <2014 Forest Hills Drive> 등


*

 서울로 올라오기 전날, 나는 다대포 바다를 보러 갔다. 유년기를 보낸 동네에 고스란히 계속해서 살아있는 바다. 나는 성장하면서 종종 그곳으로 가곤 했는데 그날은 유난히 바다가 비하게 말을 건네는 듯했다. 이제 그만 찾아와도 된다. 넌 너무 많이 찾아왔고 이제 그 사랑은 충분히 알았으니 떠나도 된다. 파도는 계속해서 주워 담는 생각처럼 들렸다. 잘 될 것이야. 잘 될 것이야.


*

  전입 신고 확인을 위해 찾은 동사무소는 제법 한적했다. 점심시간이 가까워져서 그럴 수도 있었다. 번호표를 뽑자 바로 딩동거리며 알림판에 대기번호 숫자가 빨갛게 떴다. 나는 그쪽으로 갔다. 무슨 일로 오셨는데요. 어... 전입 신고 확인하러 왔는데요. 그때 직원은 '또 올라왔네' 하는 표정이었다. 내가 캐리어에서 꺼낸 몇 가지 서류들을 받아들더니 이건 필요 없어요, 이거 맞나요. 주세요. 쾅. 쾅. 도장을 찍는 직원은 이 일에 넌더리가 난다는 듯한 느낌을 풍겼다. 그게 그 사람의 의도가 아니라 단지 지방 사람인 내가 느끼는 피해의식이었다고 하더라도 그다지 좋은 경험은 아니었다.

 

 제2의 수도라 불릴 정도로 큰 도시인 부산 출신도 이러한데 다른 지역 출신들은 또 어떠할까. 나는 조금 겸손해지면서도 모두를 다독이고 싶어지는 소망 또한 들었다. 오만해 보일 수도 있겠지만 내가 글을 써온 이유가 비슷한 결이었기에 나는 갑자기 그런 게 아니라고 말할 수 있었다. 나의 상황을 담아내고 세상에 드러내는 것. 항상 그 생각으로 글을 쓰고 살아오다 보니 어느새 나라는 글감은 곧 우리를 담아내게 되기도 했다. 우리는 분열되어서는 안 되고 각자 고향의 아름다움을 나누며 함께 나아가야 한다! 그 마음은 내게 계속 있을 것이었다. 이미 서울로 와버린 내가 할 말은 아니었지만 나는 그 마음만은 지키고 싶었다. 내겐 서울 출신 친구들도 많았다. 나는 그들도 모두 좋아했고 우리는 저마다 직면한 문제가 다르겠지만 동시대를 살고 있었다. 앞으로도 자판 위에 올려질 내 손은 더욱 무게를 많이 느낄 것이었다. 말과 행동에 책임을 지는 삶. 신념을 지킬 삶. 더 드러내야 할 게 많은 손. 내 손이 칠 것들은 지금 저 직원이 치고 있는 것과는 다를 것이었다.

 

 직원은 자판을 툭 툭 쳐냈다. 이제 청년 유입 통계에 나도 1이 되어 추가되고 있는 걸까. 나는 눈을 질끈 감고 침을 삼켰다. 아, 서울 사람이 되었구나. 끝났습니다. 가져가세요. 나는 서류들을 받아들었다. 그리고 엄마에게 문자를 보냈다. 전입 신고 완료. 그런데 전출 신고는 안 하나? 나는 궁금해져 그 자리에서 검색해 보았다.

 

 - 전입 신고 시 자동으로 되니 이제 전출 신고는 하지 않아도 됩니다.

 

 자동으로 되었다고 하지만 직접 한 게 아니니 나는 전출 신고 없이 서울 시민과 부산 시민을 병행하게 된 듯했다. 그 느낌이 나를 달래주었다. 지갑 속에는 부산에서 사용되는 동백전 카드와 시립 도서관 카드가 아직 있었다.

 

 동사무소를 나서서 버스를 15분쯤 타고 내렸다. 식당가가 나타났고 점심시간이어서 많은 사람들이 구두 소리를 또각또각 내며 걸어 다니고 있었다. 오피스 동네라고 불릴 정도로 수많은 회사들이 밀집해 있었다. 나는 한쪽 건물을 지긋이 바라보고 있었다. 입사할 회사가 있는 건물이었다. IT 업종이었고 나는 지원 업무로 발탁되었다. 이제 나는 저 회사에서 어떤 일을 하고 어떤 사람들을 만나게 될까. 사회인과 예술인으로서의 균형을 어떻게 잡아나가게 될까. 건물을 보면서 앞으로 쌓인 일들을 생각하며 햄버거 가게로 들어갔다. 치즈 버거를 주문하고 기다리는데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고향의 방송국에서 취직하여 열심히 살고 있는 이었다.

 

"어디야."

"서울로 왔지."

"기어이 도착했구나. 여기 점심시간이라서 전화해 봤어. 네가 부산에 없다니. 신기하다."

"부산에 네가 있잖아. 자랑스러워."

"나도 네가 자랑스럽다. 야."

"이렇게 된 거 계속해서 지금을 써나갈 거야."

"계속 연락할 거야."

 

 다음 향할 곳은 부동산이었다. 혼자 살 방을 확인하고 계약을 마무리해야 했다. 나는 치즈 버거에 겹겹이 쌓인 식재료를 음미하며 앞으로 해야 할 활동을 생각했다. 글 잘 쓰기. 사람들 잘 만나기. 여행하기. 잘 살기... 나는 우물 우물거리며 창밖을 봤다. 버거 속 케첩의 맛이 짜기도 했고 새콤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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