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간예또

나의 영웅은 죽었어. 이제 나는 혼자야.

[순간예또] 열한 번째 편지. '고백'에 대한 이야기.

2024.04.19 | 조회 4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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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예또

꿈과 사랑, 희망을 노래하는 행운의 편지.

 

 

안녕! 야심한 새벽에 마감을 위해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는 예또야.

나 세상에 얼마 전에 완전 지독한 술병이 났지 뭐니.

예전엔 술집 가면 술집 안주 거덜 내냐고 핀잔 듣던 게 나였는데 트레이너 생활을 하면서부터는 안주를 안 먹는 게 버릇이 됐거든.

술 먹을 때 같이 먹는 안주가 살 제일 많이 찌는 거 알지?

그래서 의외로 술만 먹으면 살이 안 쪄. 대신 술이 엄청 빨리 취할 뿐.

내가 그래서 지난 일요일에 오랜만에 만난 친구랑 너무 반갑고 기쁜 나머지 장장 10시간을 먹은 거야 소주를... 그것도 오로지 물과 함께...

취하지 않고 배길 수가 있겠니. 나는 그 술자리 1차 중반부부터 기억이 안 나.

거진 12시간 정도를 기절했다가 일어났는데도 숙취는 나아지질 않더라.

이틀을 꼬박 누워있었더니 그제야 회복이 됐어. 참 이젠 진짜 나이 못 속이겠다.

그 와중에 웃긴 건 뭔 줄 알아? 나 화장 참 꼼꼼하게 잘 지우고 잤더라.

이걸 웃어야 돼, 울어야 돼?

 

'사랑' 얘기를 쓰는 주간이 오면 이상하게 맘이 참 답답해.

어떤 사랑 이야기를 적어야 하는지 모르겠거든.

분명 눈에 보이지 않아도 항상 곁에 있는 게 사랑인데, 나한텐 왜 이렇게 어려운지 모르겠어.

남녀 간의 사랑이야기를 하자니 딱히 지금 할 만한 말이 없고,

가족 간의 사랑이야기를 하자니 우리 집이 엄청 끈끈하고 애틋한 가풍도 아니거든.

그래서 지난날들에 무슨 이야기를 적었나 하고 슬쩍 보니 맙소사 연거푸 이별에 대한 이야기들 뿐이었네.

아, 좀 참담하다. 내가 이렇게 사랑이 메마른 사람이었나.

 

나는 우리 집 외동딸이야. 게다가 아버지 나이 마흔 가까이에 얻은 첫 딸이고.

정이 많은 우리 아버지는 나를 어렸을 때부터 애지중지 키우셨어.

그렇다고 오냐오냐는 아니었어. 초등학교 저학년정도 금쪽이 시절까진 종종 맞으며 자랐으니까.

내가 일곱 살 때 부모님의 맞벌이 때문에 중국에 있던 친척집에 1년 정도 맡겨졌던 때가 있었어.

아버지는 밤마다 내가 보고 싶어서 내 방 내 침대 위에 이불을 끌어안고 우시곤 했대.

시 쓰기를 좋아하는 우리 아버지는 일주일에 한 번씩 내게 편지와 직접 쓴 동시를 보내주시곤 했어.

[순간예또]가 있기 이전에 우리 아버지표 [주간최정진]이 있었던 셈이지.

퇴근 후 동료나 친구들과 술잔 기울이는 게 아닌, 타지에 있는 딸을 그리워하며 한 번도 빠짐없이 꼬박꼬박 편지를 쓰는 일은 분명 쉽지 않은 일 일거야.

어렸을 때의 나는 그 사랑과 애정을 당연시했었지만 말이야.

 

그러던 아버지였지만 언제부터였을까... 점점 생기를 잃게 되셨어.

아마 이혼을 하시면서 나를 오롯이 혼자 힘으로 키워내야 한다는 부담감을 짊어지게 되었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어.

아버지는 퇴근을 하고 돌아오시면 나와 간단한 저녁식사를 하고 망부석처럼 소파에 앉아 티비를 보시거나 컴퓨터로 바둑을 두셨어.

이따금씩 술을 많이 드시는 날엔 고래고래 본인의 억울함과 한을 소리치거나 걸어 잠근 내 방문을 밤새 두들기셨고.

언젠가부터 나는 아버지가 편하지 않았어. 아니, 솔직히 좀 혼란스러웠어.

평소의 아버지와 술에 취한 아버지는 마치 다른 사람 같았거든.

내가 아버지를 사랑하는 건지 미워하는 건지도 알 수 없었어.

아버지 같은 사람과 결혼하겠다며 어리광부리던 때에 내가 알던 아버지의 모습은,

언제부턴가 찾아볼 수가 없게 되었으니까.

 

다른 모든 자식들이 그러듯, 나도 내 부모님께 자랑스러운 딸이 되고 싶었어.

아버지는 언제나 내가 하는 모든 선택과 결정들을 응원해 주신 편이었는데,

아버지의 그런 절대적인 지지 덕분에 나도 여태껏 주체적인 삶을 살 수 있었던 것 같아.

이 부분은 아버지께 정말 평생 고마워할 부분이야. 돈으로도 살 수 없는 무한한 자신감을 주신 것.

하지만 이것 외에는 예전처럼 아버지를 존경하고 닮고 싶은 부분을 찾을 수가 없더라.

내가 너무 커버린 탓도 있겠고 아버지가 너무 작아진 이유도 있겠지.

 

 


얼마 전에 작은 고모가 가족들과 함께 우리 집에 왔었어.

그녀는 집을 둘러보다가 이내 뭔가 이상한 듯 물었지.

"오빠, 강아지는 어디 갔어?"

잠시 착잡한 표정을 짓던 아버지가 대꾸했어.

"... 집을 나갔어. 걔 때문에 내가 요즘 잠도 못 자고 미치겠어."

그러자 대뜸 그녀가 뭐라고 했는 줄 알아?

"아이구 오히려 잘 됐네. 키우는 개 없으면 냄새 안 나고 집 더럽혀질 일 없고. 좋아, 오빠 잘 됐어요."

그녀의 그런 반응은 놀랍지도 않았어. 원래 다른 사람 호사에 축하 못 해주고 아픔에 공감 못 해주는 이기적이고 못된 여자였으니까.

내가 놀랐던 건 아버지의 반응이었어. 

아버지는 그 얘기에 어떤 반박이나 꾸지람, 혹은 언짢다는 기색조차 없이 그 사건으로 얼마나 자신이 힘든지에 대해서만 줄줄 늘어놓기 시작했거든.

아, 그때 나는 다시 깨달은 거야. 

우리 아버지는 자기 가족이 욕봐도 그보다는 자기 얘기가 더 중요한 사람이란 걸.

 

그러니 어렴풋이 떠오르는 몇 가지 기억들이 있더라.

명절에 다 같이 모인 자리에서 작은 고모와 작은 엄마가 손윗 형제인 우리 엄마를 무시하고 깔보는 말을 해도 아버지는 침묵하였던 일. 

내가 초경을 한지 얼마 되지 않았던 때에 할머니 장례식장에서 생리에 익숙지 않아 힘들어하고 있는데 작은 고모가 "넌 엄마 없이 여기 왔으니 엄마 몫까지 네가 일해야 돼"라는 말을 해도 아버지는 침묵하였던 일.

어쩌다 합석하게 된 아버지 동네 친구들이 모인 술자리에서 나를 스스로 연극배우라고 소개하니 한 친구분께서 대뜸 "야, 나 배우랑 한 번 자보는 게 소원인데"라는 말을 하는데도 아버지는 끝끝내 침묵하였던 일.

 

아, 그랬구나. 아버지는 무언가를 지킬 수 있는 힘이 없는 사람이었구나.

그래서 엄마를 놓쳤고, 마꼬도 놓쳤고, 결국엔 나까지도 놓치게 되겠구나.

아니, 어쩌면 이미 그날 날 놓쳤을지도 몰라.

더 이상 아버지에게 기대할 구석도 없었거든.

 

한때 나의 영웅이자 존경하는 대상이었던 누군가가 추락하는 걸 지켜보는 일은 참 너무 슬픈 일이야.

그날 나의 영웅은 죽었어. 그것도 아주 처참한 모습으로.

내가 평생 존경하던 내 아버지가 고작 그런 사람이라는 걸 깨닫게 되자 나는 너무 괴로웠어.

어디에 내 마음을 의지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혼란스러웠어.

난 형제도 없고 엄마랑도 멀멀한데, 아버지도 아니면 난 이제 힘들 때 어디에 의지를 해야 하지?

마음 터놓고 의지할 수 있는 내 가족은 어디에 있지?

 

가족이 없다는 건 되게 외로운 거구나. 

나는 이제 고아의 마음을 조금, 아주 조금은 공감할 수 있을 것 같아.

세상에 홀로 남은 기분이라는 게 어떤 기분인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러니 최근 들어 이런 일을 겪고 느낀 내게 사랑이라는 게 얼마나 와닿을 수 있었겠어.

그 얄팍한 감정이 얼마나 부질없게 느껴졌겠어.

 

'아버지 같은 사람'이었던 어렸을 적 나의 이상형은 어느 새부터 '아버지와 거리가 먼 사람'이 되어버린 것 같아.

오죽하면 내가 키가 큰 사람을 좋아하는 것도 아버지의 영향이 있지 않을까 싶을 정도니까.

내가 아버지의 씨를 받아 엄마의 뱃속에서 잉태된 건 거스를 수 없는 진리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난 아버지 같은 남자 만나서 엄마 같은 인생을 살게 될까 봐 겁이 나. 

아버지한테 물려받은 글재주와 엄마한테 물려받은 끼는 너무 감사하지만,

인생의 모습까지 그들에게 물려받고 싶진 않아. 

나는 엄마처럼 미련하게 살고 싶지도, 아버지처럼 외롭게 살고 싶지도 않아.

그게 참 죄송스럽기도 하고 모순이기도 해.

그들을 사랑하는 마음과는 별개로 멀어지고 싶은 마음도 존재한다는 게.

 

떠들어봤자 가문에 먹칠하는 꼴이라 혼자 속으로만 끙끙댔는데 차라리 이렇게 털어놓고 나니까 속 편하다.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적는 날이니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적을까, 최근에 술 먹고 만난 남자들 이야기를 적을까 고민하다가 내 본능이 이끄는 대로 적은 글이거든.

사실 나 이 얘기가 엄청 하고 싶었던 거였나 봐. 성격상 떠벌리고 나면 속편해지는 사람이거든, 내가.

 

[순간예또]를 운영하다 보니 생각하지 못했던 좋은 점이 하나 있더라.

오랜만에 만난 사이라도 내 근황을 속속들이 알고 있으니 내가 굳이 직접 말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

그래서 때로는 "나도 그런 일이 있었어"하며 쉽게 서로 공감해 줄 수도 있고,

"그런 일이 있었던데 힘들었겠다"하며 쉽게 위로를 주고받을 수도 있더라고.

내가 오늘 했던 이 이야기도 누군가에겐 또 의외의 울림을 줄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요즘 이렇게 사랑에 큰 신경을 못 쓰며 살아.

구독자는 어때? 사랑 많이 하고 있어?

혹은 나처럼 큰 실망할 일은 없었어?

나의 이 자랑스럽지 못한 이야기가 구독자에게 작은 위로 혹은 생각할 거리가 되어준다면 좋겠다.

나보다 더 나은 가족을 가졌다면 그 자체만으로도 행운인 거고,

나보다도 못한 가족을 가졌다면 더 좋은 가족을 직접 꾸리면 되는 거니까.

나는 항상 그런 마음으로 백년해로할 신랑감 찾고 있거든.

괜찮아, 사랑도 일도 다 때가 있는 거니까.

구독자가 좋은 사람이라면 언제든 좋은 기회와 좋은 인연이 다가올 거야.

 

맞아, 사실은 이거 다 나에게 해주고 싶은 말.

구독자에게도 들려주고 싶지만 나에게도 들려주고 싶은 말.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겠냐만은, 이 정도 흔들렸으면 이만 피어도 되지 않을까.

도대체 얼마나 멋진 꽃을 피우게 해 주시려고 이렇게까지 나를 흔드는 건가.

 

이번 계절은 바람이 좀 짓궂다, 그치?

괜찮아.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이랬어.

흔들리고 때로는 주저앉고 쓰러져도 돼.

꺾이지만 않으면 언젠가 꽃은 피게 될 테니까.

 

이번 봄은 나에게 조금 아픈 계절이네.

아마 올해 남은 세 계절이 너무 좋을 건가 봐.

다음 사랑이야기는 정말 설레는 이야기로 돌아올 수 있었으면 좋겠다.

다들 내 몫까지 사랑 충만한 한 달 보내!

그럼 다음 편지에서 또 보자, 안녕!

 

 

 

 

 

 

새벽 세 시, 나는 런던 루튼공항에 있었다. 아니 더 엄밀히 말하자면 나는 런던 루튼공항에서 울고 있었다. 나 홀로 배낭여행 9개월 차, 갑자기 들이닥친 형용 못할 감정에 공항 구석 바닥에 주저앉아 흐르는 눈물만 하염없이 닦아내고 있는데 몇몇의 지나가는 사람들은 내가 사연 있는 여자처럼 보였는지 흘깃거리며 쳐다보다가도 이내 내 기분을 헤아린다는 듯이 못 본 체 시선을 거두었다. 이 답답한 심정을 누군가에게 털어놓고 위로받고 싶은데 야속한 시차 때문에 한국은 평일의 대낮이었다. 그 시간에 통화가 가능할만한 친구가 마땅히 떠오르지 않아 어쩔 수 없이 아버지에게 SOS를 쳤다. 아버지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이 시간이면 분명 일어나서 TV를 보고 있을 시간인데 전화가 연거푸 닿지 않자 불안한 마음이 조금씩 피어올랐다. 30여분 남짓 후, 아버지는 옆집 김 씨 농장 일을 도와주는 중이라 바빴다며 짧은 메시지를 하나 보냈다. 나는 잠깐 통화 가능하냐 물었고, 아버지는 이따가 점심식사 후에 연락을 주겠다고 했다. 나는 그동안 최대한 분위기를 환기시키고 감정을 추스르며 아버지의 연락을 기다렸다. 이미 습기를 가득 머문 채 잠겨있는 목소리인데도 아버지는 무슨 일이 있냐고 묻지 않았다. 밝게 꾸민 내 말투가 목소리를 잘 커버했던 모양인지 별 이상한 기색을 느끼지 못하신 것 같았다. 이미 깊게 파인 미간 사이 주름들에 나에 대한 시름으로 주름을 하나 더 늘게 하고싶지 않았던 나는 아버지가 눈치채지 못한 것을 다행으로 여기며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연기를 했다. 그냥, 오랜만에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고 하면서. 아버지는 다시 일을 도우러 가야 한다며 비행기 잘 타라는 마지막 인사를 건네며 전화를 끊었다. 엷은 억지웃음을 띄우며 전화를 끊은 나는 이내 다시 우울해졌다. 1월 8일, 그날은 내 생일 전 날이었다. 아버지가 생일 미리 축하한다는 말 한마디를 해주지 않은 것이 이내 섭섭했다. '그래, 생일 전 날이니까 모를 수도 있지'하며 스스로를 위로했지만 이럴 때 설마 했던 예감은 왜 항상 틀리는 법이 없을까. 아버지는 내 생일날에도 아무 연락이 없었다. 나름 귀하게 자란 외동딸인데 올해 나의 생일날엔 어머니에게도, 아버지에게도 아무런 연락을 받을 수 없었다. '그럴 수도 있지'라며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넘기고 싶었지만 많은 수도 아니고 단 셋뿐인 우리 가족인데 부모님에게 아무런 축하를 받지 못했다는 사실이 못내 서운했다. 그러면서도 퍼뜩 '앞으로 본인들 생일 때 섭섭하다는 말은 못 하시겠네' 따위의 생각을 하는 내가 경멸스러웠다. 적지 않은 20대 후반의 나이에 고작 가족에게 생일 하나 챙겨 받지 못한 것 때문에 머릿속이 복잡해지는 꼴이라니. 사실 이건 내가 다 자초한 일이다. 늦은 나이에 귀하게 얻은 외동딸 애지중지 키우시며 하고 싶은 일 다 하면서 살 수 있도록 해주느라 여태까지 고생하는 부모님을 내가 어찌 원망할 수 있을까. 그럼에도 이기적인 이 딸은 '내가 번 돈 내가 알아서 쓰는 거니까 참견하지 마시라'라고 하며 1년 전 퇴사를 하고 해외로 가는 비행기표를 사서 훌쩍 떠나버렸다. 부모님께 손을 벌리는 입장은 아니지만 용돈 하나 넉넉하게 드리지 못하는 딸. 그게 바로 지금의 내 모습이다. 부모님의 도움을 받는 것이 당연한 입장인 학생 때였다면 마냥 서운하기만 했을 이 일이 하고 싶은 일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나이에 벌어지니 한없이 서운하기보다 죄책감이 몰려온다. 이 나이 먹도록 유일한 자식 생일 하나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바쁘게 지내시는 부모님께 도움이 되는 딸이 아닌 것 같아서. 사실 솔직히 말하자면 부모님이 정말 바빠서 잊으셨는지 나보다 다른 일에 더 신경 쓸게 많으신 건지는 확실하게 알지 못한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 여기는 가풍 덕분에 모두 흩어져 살면서도 살가운 인사를 자주 나누는 편은 아니니까. 그저 내가 그렇게 믿고 싶은 걸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내가 선택당한 가족'은 이렇게 살아간다. 기념일을 기념하며 살아가는 것은 사치처럼 여기며. 어쩔 수 없다. 사람 마음이 모두 다 내 맘 같은 건 아니니. 다만 한 가지 다짐을 했다. 기념일 잘 챙겨주는 남자를 만나서 그와 함께 꾸릴 '내가 선택한 가족'은 이렇게 살아가지 않겠다고. 돈과 시간이 부족할지언정 낭만은 부족하지 않게 살아가겠다고. 이런 생각이 점점 구체적으로 드는 걸 보니 나도 나이를 먹어가며 이렇게 변해가는가 보다. (2023.01.13 기록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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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또다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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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 days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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