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주 말고 극장구경

잘 있었나, 포트 극장

2026.10.19 | 조회 5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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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구독자님, 한 주간 잘 지내셨나요? 지난주 통영 답사를 잘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생각했던 것보다 골목골목에 묻어나는 이야기가 많아 행복한 비명을 질렀어요. 그중엔 <유실물 보관소>에 담아내지 않고는 못 배기는 경험도 있었습니다. 오늘의 편지엔 통영의 극장을 담으려고 합니다.

주인 없는 맥줏집이 남긴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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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제일 기대했던 건 다찌였어요. 통영에 있는 ‘다찌’문화는 메뉴 고를 필요가 없잖아요. 주인이 엄선해 준 신선한 안주를 주는 대로 먹으며 바다 마을에 왔다는 걸 오래 느끼고 싶었거든요. 문제는 유명한 다찌일수록 1인은 안 받아준다는 거예요. 동행을 구해볼까 생각하다가, 해가 지기가 무섭게 어두워진 강구안을 바라보며 마음을 접었어요. 타협점으로 찾아간 곳은 다찌 사이에 끼어있는 맥줏집이었어요. 

그런 날 있잖아요. 뭘 해도 잘 안 풀리는 날이요. 이때까지만 해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맥줏집 문도 잠겨있었거든요. 먼저 와계시던 분이 사장님이 안 계신 거 같다고 하셔서 돌아가야 하나 싶었는데, 맞은편 가게 사장님이 잠깐 어디 가셨다고 곧 오신다고 하더라고요? 사장님을 기다리면서 먼저 와계시던 분과 대화를 좀 나누었어요. 손님이시냐고 여쭤보니 뭘 좀 떼러 왔다고 하시더라고요. 뭘 떼러 왔다는 건가 싶었는데 포스터를 떼시는 거래요. 알고 보니 며칠 전, 이 부근에서 전시를 진행하셨고 홍보차 맥줏집 문 앞에 붙였던 포스터를 떼러 오셨던 기획자분이셨어요. 제가 답사차 통영에 왔다고 하니, 아직 전시장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는데 가보겠냐고 물어보시지 뭐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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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날 있잖아요. 하나도 안 풀린다고 생각했는데 뒤늦게 찾아온 행운이 앞에 겪은 모든 불편을 소거하는 날이요. 그렇게, 다찌집도 못 가고 맥줏집도 못 간 저는 20년 전에 문 닫은 폐극장에 들어가는 호사를 누리게 됩니다. 

잘 있었나 포트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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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통영을 대표하는 극장으로 봉래극장과 포트극장이 있었다고 합니다. 누군가는 <타이타닉>을, 누군가는 <노팅힐>을 누군가는 <해리포터와 마법사의 돌>을 이 극장에서 보았겠지요. 오래된 동네에 살다 보면 박제된 간판이 과거를 상상하게 만드는 장소들이 있잖아요. 기획자님은 어린 시절부터 문 닫은 포트극장에 들어가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셨다고 해요. 극장을 전시장으로 만들기 위해 2대 극장주께 연락을 취했을 때, 20년 전 문 닫은 극장을 누가 궁금해 할까, 반신반의 하셨다고 하는데요. 극장 문보다 열기 어려웠을 마음의 문을 열어주신 극장주님께 감사할 정도로 빛나는 전시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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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트극장을 이용했던 사람들의 답변을 모아서 AI로 구현한 그 시절 풍경도 흥미로웠고요. 극장주께서 보관하시던 그 시절 영화 포스터가 잔뜩 붙은 벽면도, 시간이 쌓여 풍기는 퀴퀴한 냄새까지 애틋했어요. 좋아하는 영화 제목을 쓰면 티켓처럼 도장을 찍어주시기도 했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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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작스레 맞닥뜨린 인생 영화가 뭐냐는 질문에는 섣불리 답하지 못했고요. 통영 온다고 복습하듯 본 영화 <하하하>의 제목을 적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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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저곳 모두 열어 보여주시는 기획자님 덕분에 상영관과 영사실도 둘러볼 수 있었어요. 상영관에서 재밌었던 부분은 구멍이 송송 뚫린 스크린입니다. 스크린 뒤쪽에 음향 시설이 있어서 소리가 나오게 하려고 스크린에 구멍이 뚫려있는 것이래요. 신기하지 않은가요? 영사실엔 누군가 취사를 했던 흔적이 남아 있었어요. 옛날엔 영사 기사님들이 전국을 돌며 영화를 상영하시다 보니, 영사실을 숙직실처럼 사용했던 흔적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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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장까지 가는 길엔 계단이 없습니다. 경사로를 지그재그로 오르다 보면 금세 상영관 앞에 도착하지요. 옛날엔 다음 영화를 기다리는 관객들이 이 경사로 위에 줄을 서 기다렸다고 하는데요. 삼삼오오 모여 그 시절의 관심사를 주고받으며 시간 때우는 사람들의 모습이 그려지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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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엔 영화 보러 가자는 말을 극장 구경 가자고 했다고 하지요? 극장에 가는 일이 그만큼 드문 일이라 그렇게 표현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어느덧 그 귀한 단관극장의 시대도 지나고 멀티플렉스도 영업 적자로 문을 닫는 추세지요. 리모컨 하나로 어디든 영화관이 될 수 있는 시절이 도래하니, 역설적으로 극장 구경의 가치를 체감해요. 어느 지역의 어느 지점이 아닌 제 이름을 가진 극장의 역사를 살펴 볼 수 있어 감사했습니다. 2026년, 두 번의 전시로 추억과 흥미를 불러일으킨 <잘 있었나, 포트극장>의 빈번한 재개봉을 멀리서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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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트극장에 다녀온 뒤, 통영의 다른 극장들은 어떤 이야기를 품고 있을지 궁금해졌습니다.

할 말 많은 봉래극장

봉래극장 [출처 :경남도민일보] 
봉래극장 [출처 :경남도민일보] 

앞서, 1980년대 통영엔 두 개의 극장이 있다고 말씀드렸지요. 하나가 포트극장이라면 다른 하나는 봉래극장입니다. 봉래극장은 ‘봉래좌’라는 이름으로 1914년 개관했습니다. 좌(座)’는 당시 일본식 극장 명칭입니다. 경상도 최초로 문을 연 극장이었다고 하는데요. 지금은 사라지고 없지만 2000년대 초까지는 건물 원형이 남아 있었다고 하니, 상영한 작품 수만큼, 어쩌면 그보다 더 많은 극장의 에피소드를 품고 있겠지요. 그중 얘기하고 싶은 건 세계적인 작곡가, 윤이상과 봉래극장의 이야기입니다. 윤이상은 어린 시절 아버지와 봉래극장에 가서 종종 공연을 보곤 했다고 합니다. 일본식 극장이지만 전통 연희극을 하기도 했다는데요. 그 시절 들었던 공연단 음악을 비롯한 통영의 소리가 그의 음악에 중요한 토양이 되었다고 합니다. 

작곡가 윤이상 [출처 : 중앙일보]
작곡가 윤이상 [출처 : 중앙일보]

윤이상에게 봉래극장은 영감의 원천임과 동시에 첫 번째 무대가 되기도 했습니다. 과거엔 무성영화 공연 사이, 악단의 연주가 있었다고 하는데요. 언젠가 윤이상이 작곡했던 음악의 악보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악단에 의해 연주되고 있었다고 합니다. 재능이 있는 건지 알 수 없던 시절, 퍼져 나간 자작곡의 존재는 얼마나 큰 효능감이 되었을까요. 장르는 다르지만 어쩐지 영화 <시네마 천국>의 한 부분을 변주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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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느낀 통영의 인상은 낭만의 림프순환이 잘 되는 도시라는 점입니다. 너른 바다 위에 조성된 한반도 첫 번째 군사도시엔 다양한 물자와 문화가 있었습니다. 자원이 첫 번째 낭만을 틔웠고요. 언젠가 누군가가 틔운 낭만에 자부심을 가진 사람들이 그 이후로도 예술과 낭만의 선순환을 만들고 있었습니다. 언젠가부터 이 땅에 잠시 머물다 떠날 우리가 다음 사람에게 무엇을 남겨줄 수 있을지 생각합니다. 누군가가 틔운 낭만을 다른 누군가가 정성껏 옮겨 심는 일. 통영에 깃든 오래된 낭만이 앞으로도 그렇게 분갈이를 거듭하며 살아남기를 바랍니다.

추신 : 도망갈 곳이 많은 사람은 그만큼 행복해질 방법이 많은 사람이겠지요. 누구든지 어딘가로 도망가게 하려고 국내 도시 이야기를 전해드리곤 하는데요. 바람 부는 날엔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면, 무언가 그리운 마음이 들 땐 통영에 가세요. 11월에 있을 통영 강의의 마지막은 이렇게 끝내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편지를 읽고 계신 구독자님께 제일 먼저 떼어내 전해드려요! 늘 감사합니다. 다음 주에 또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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