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지금 카페에 앉아 글을 쓰고 있습니다. 커피 찾아가라고 카페 안 모니터로 쩌렁쩌렁 알려주는 최첨단(?) 카페에 있습니다.
노트북을 켜놓고 앉아 작업하는 사람
연인과 투닥대며 음료를 마시는 사람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대화를 나누는 사람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며 느릿느릿 커피를 마시는 사람
지금 저는 위의 사람들과 함께 이 최첨단 카페를 공유하고 있습니다.
곁눈질로 곁에 앉은 사람들을 살펴보다가 문득
오가는 모든 사람과 스몰토크, 딥토크가 만연했다던 100년 전 경성의 다방 이야기를 보내드리고 싶어졌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그 시절 경성을 주름잡던 예술가들의 아지트,
낙랑파라에 대한 이야기를 적어보려 합니다.
그럼, 시작해보겠습니다.
1932년 힙하게 시작된 낙랑파라
소공동 105번지에 약 백 년 전인 1932년 <낙랑파라>가 세워집니다. 낙랑파라, 이름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이 이름은 고구려에 함락된 낙랑+ 응접실을 뜻하는 'parlour'를 일본식 발음인 '파라'로 붙여 만든 합성어였습니다. 응접실을 외국어로 표현하는 것이야, 서구문물에 관심이 많았던 당시 동향상 충분히 가능한 시도였을 텐데요. 고구려에 함락된 낙랑, 호동왕자와 슬픈 러브스토리를 나누었던 낙랑공주의 고향 '낙랑'이 여기서 왜 나오는 걸까요?
그 이유는 1920년대 당시에 대대적으로 출토된 낙랑지역의 유물과 관계가 있다고 해요. 이 당시, 일제에 의해 묻혀있던 낙랑지역의 유물들이 대거 발견되면서 자연스럽게 대중의 관심이 신비한 낙랑 유물들로 쏠렸다고 합니다.
실제로, 낙랑파라의 곳곳에는 낙랑 유물을 연상케 하는 디테일이 있었다고 해요.
오늘날의 카페와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만큼, 분명한 콘셉트를 가지고 있었던 공간 같아서 놀라운 마음이 드는데요. 이 멋진 공간을 운영하던 주인장이 누구였을지 궁금하지 않으세요?
다방을 차린 사람은 일본에서 미대를 졸업한 이순석이었습니다. 예술에 조예가 깊었던 사람답게, 이순석은 낙랑파라를 예술가들이 사랑할 수밖에 없는 공간으로 만들어냅니다. 아티스트라면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는 감각적인 인테리어는 물론이었고요. 러시아 민요, 스페인 춤곡 등 이국적인 음악으로 다른 카페와 차별점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 1층엔 다방. 2층엔 아틀리에를 겸해서 예술가들이 함께 의견을 주고받을 수 있는 장을 만들었습니다.
미술, 음악, 문학 등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들이 낙랑파라에 참새방앗간 드나들듯 했던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죠.
이순석의 정성은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다방을 선택하는 데에 중요한 이유 중 하나였던 마담을 선정하는 일에도 심혈을 기울이는데요. 그 결과, 당시 조선에서 큰 사랑을 받고 있던 영화배우 김연실을 낙랑파라의 마담으로 고용합니다. 고용인이었던 김연실은 몇 년 뒤, 낙랑파라를 인수하고 상호를 낙랑으로 바꾸기도 했는데요. <낙랑>은 1940년대까지 핫플레이스로 굳건히 자리를 지키며 문인, 영화인들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낙랑파라 단골 리스트 : 구인회와 목일회
그렇다면, 이 낙랑파라를 하루에 한 번씩 방문하던 단골들은 누가 있었을까요? 크게 두 단체가 이 낙랑파라를 아지트 삼았다고 알려져 있는데요. 먼저, 아홉 명의 문인들이 결성한 단체 구인회가 단골 리스트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이들은 순수문학을 쓰겠다는 마음을 한 데 모아 주에 2~3회씩 만나 각자의 글을 읽고 대화하곤 했습니다. 초기 멤버들로 계속 유지가 되었던 것은 아니었으나 멤버가 바뀌더라도 전 인원이 아홉 명이라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 이름에 충실한 위트있는 단체였습니다. 이 구인회 멤버들 중에서도 이상과 박태원이 특히 낙랑파라와 관련한 많은 이야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더치페이를 했다는 그 남자, 이상
낙랑파라를 검색하면 가장 먼저 나오는 글은 재밌게도 이상이 백 년 전부터 더치페이했다는 내용입니다. 테이블 전체의 값을 치를 법도 한데, 이상은 자신이 마신 찻값만을 테이블에 올려놓고 유유히 떠났다고 하는데요. 알아보면 알아볼수록, 이상은 참 특별한 사람이네요.
낙랑파라를 작업실 삼았던 소설가 구보씨, 박태원
낙랑파라를 오늘날 사람들이 기억하게 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사람이라 하면, 박태원을 빼놓을 수 있을까요? 제 동생이 문학에 관심이 별로 없거든요. 며칠 전에 무슨 얘길 하다가 우연히 낙랑파라와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이 대화 주제가 되었었는데요, 동생이 '아 거기! 칼피스 파는 곳 아냐?' 해서 깜짝 놀랐답니다. 학교 문학 교과서에서 그 부분을 읽고 '가루빠스(칼피스)'를 꼭 마셔보고 싶다는 생각했었다나요.
칼피스를 파는 낙랑파라는 카페를 전전하며 글을 쓰던 노마드 소설가 구보 박태원의 1순위 작업실이었습니다. 위에 말씀드린 것처럼, 소설 속에 낙랑파라가 등장함은 물론이고요. <피로>라는 소설은 낙랑파라에서 집필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어요.
그 당시 기록을 찾아보면, 박태원과 이상이 환상의 한 쌍이었다는 얘기가 많이 나옵니다. 특히 둘이서 죽이 잘 맞아 마담들을 놀리고 농담 따먹기를 몇 번 하다 보면 외상으로 술 먹는 건 일도 아니었다는 기록들이 있는데요. 이 언어의 마술사들이 한 곳에서 껄껄대며 나누는 농담은 어떤 내용들이었을지 너무 궁금하네요.
낙랑파라를 주름 잡던 다음 집단은 미술계에 있습니다. 서양미술을 그리기 위해 함께했던 단체, 목일회가 바로 그 주인공입니다. 이 목일회가 특별한 것은 단순히 서양미술을 모사하는 게 아니라 k-서양화를 그리기 위해 고민하던 집단이라는 점이에요. 어떻게 하면 한국적인 서양화를 그릴 수 있을지 생각했었다는데 고전적인 낙랑과 파라를 붙여 이름을 지었던 낙랑파라와 결이 너무 잘 맞는 집단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목일회 중에서도 낙랑파라를 자주 찾던 사람은 한국의 툴르즈로트렉으로 알려진 화가, 구본웅이었습니다.
구본웅은 앞서 언급된 구인회의 문인 이상과도 막역한 사이였기 때문에 이들의 만남 장소는 늘 낙랑파라였죠.
동시대에 활동했던 시인 김소운은 기록을 통해, 당시 낙랑파라에 가면 매일 볼 수 있는 인물이 구본웅과 이상이었으며 때로는 박태원도 끼어 있었다고 30년대 낙랑파라를 회상했습니다.
1932년부터 1940년까지 낙랑파라는 8년간 예술가들의 고뇌와 열정 그리고 낭만을 담아내며 자리를 지켰습니다. 중일전쟁이 터지며 카페를 운영하기 어려웠던 김연실은 낙랑파라를 처분하고 만주로 떠납니다. 예술가들의 아지트는 식민지 조선의 현실 속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습니다.
두 번째 낙랑에 대하여 '연희동 낙랑파라'
예술가들이 모여 함께 이야기를 나누던 낙랑파라는 1940년 한반도에서 사라졌습니다. 그 시절 낙랑파라가 서 있던 소공동 105번지에는 2023년 현재, <더 플라자 호텔>이 서 있습니다. 낙랑파라에서 예술을 꿈꾸던 사람도, 낙랑의 주인이던 이순석과 김연실도 모두 세상을 떠나고 없습니다. 다만 그 시절에 대한 짧은 이야기들만이 전해지는데요. 이야기는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지요. 낙랑파라가 품은 유효한 이야기를 입고 연희동에 생겨난 두 번째 낙랑파라가 있습니다.
1930년대의 낙랑파라가 낙랑으로 대표되는 고전적인 아름다움과 파라로 표현되는 이국적임을 간직한 이야기의 장이었다면요. 2020년대의 낙랑파라는 과거, 그곳에 있었던 낙랑과 현재 이곳에 있는 낙랑, 시간을 잇는 이야기의 장입니다. 단순히 음료만을 파는 게 아니라, 시간을 간직하고 있는 빈티지한 아이템들을 함께 판매하고 있습니다. 낙랑 유물에서 콘셉트를 빌렸던 이순석처럼, 두 번째 낙랑파라 역시 색이 바랜 실내 장식들이 시간여행 온 것 같은 착각을 일으켜요. 도심 한복판에서 아날로그의 조각을 붙잡고 싶을 때, 두번째 낙랑에 가보시는 건 어떨까요?
오늘은 1930년 예술가들의 사랑을 받던 다방, 낙랑파라를 만나보았습니다.
백 년 전 사람들의 문화공간을 만나고 보니 문득 궁금해지는 건 백 년 뒤 미래예요.
오늘날 우리가 향유하는 문화의 모습은 백 년 뒤 어떤 이야기로 남아있을까요?
매일 시청역 부근으로 출근하면서도, 플라자 호텔의 독특한 외관을 보며 호캉스나 하고 싶다고 생각하면서도 이곳에 낙랑파라가 있었다는 사실은 이번 편지를 준비하며 처음 알았습니다. 출근길에 플라자 호텔을 또 만날 텐데요. 내일 만나는 소공동 105번지에서는 희미하게나마 낙랑의 조각을 떠올릴 것 같습니다.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 주에도 지나간 시절의 재미있는 이야기를 담아 편지할게요.
그럼 이만 총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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