넓어지는 삶

이탈리아 여행 이야기(3) 베니스 우물 이야기_월요

2024.02.12 | 조회 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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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요일들

우리들의 이상적인 시간 기록 일지

“어머나, 이를 어쩌나!” 루시가 외쳤다. “나는 정말 다시 읽고 싶은데. 최소한 기억이라도 해보자.… 그건… 오, 세상에, 모두 잊어버렸어. …. 이건 정말 묘한 책이구나. 내가 어떻게 그 이야기를 잊었을까? 한 개의 컵, 한 자루의 검, 한 그루의 나무 그리고 초록 언덕에 대한 이야기였는데..….” <C.S. 루이스, 나니아 연대기 중 새벽 출정호의 항해 중에서>

어린 루시가 마법사의 책을 읽으면서 한 말이다. 마법의 책이기에 루시는 그 책을 다시 넘겨 확인할 수도 없었고 그 이야기를 다시 기억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 후에 루시가 ‘좋은 이야기’라고 할 때는 루시는 항상 그 마법책에서 본 잊혀진 이야기를 기억했다고 한다. 베니스를 생각할 때 “한 개의 컵, 한 자루의 검… “ 하고 외쳤던 루시의 외침이 기억이 난다. 물론 컵과 검 대신 하나의 마을, 하나의 우물 하나의 성당… 이렇게.

우리 가족이 베니스에 대해 가진 지식은 주로 급하게 여행 준비하며 틈틈이 들은 몇 개의 유튜브였다. 베니스의 오버 투어리즘에 대한 문제라든지, 알베르토의 베니스 맛집 소개, 베니스에서 바가지 쓰지 않는 법 정도의 지식을 가지고 베니스에 도착했다. 알베르토가 베니스에서는 길을 잃는 것이 더 좋은 여행법이라고 해서 그 말을 믿기로 했다. ^^ 첫날 추천받은 야경투어를 하고 다음 날 좋았던 곳을 다시 방문하자 정도의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베니스에 도착해서 감상은 우와였다. 이건 마치 에버랜드 놀이동산 확장판에 온 것 같은데! (그야말로 수준 낮은 감상이다.^^) 수로가 온 도시를 뒤덮고 있고 곤돌라와 수상버스가 그곳을 다니는 도시, 차나 오토바이는 물론 자전거도 금지되어 있는 도시, 아스팔트가 아닌 판석이 깔려 있고 120여 개의 섬을 400개가 넘는 다리가 연결하고 있는 도시. (수레를 끌고 다니는 택배 기사들을 봤는데 베니스에서는 더한층 극한 직업인듯) 성마르코 광장과 두칼레 궁전의 화려함과 두 사람이 겨우 지날 협소한 골목이 공존하는 도시. 도대체 이 도시는 어떻게 생긴 걸까? 하루 동안 곳곳을 돌아다니며 베니스에 대한 궁금증이 소복히 쌓였다.

저녁 무렵에 출발하는 베니스 야경 투어 가이드는 귀염성 있는 젊은 여성분이었는데 인원을 확인하더니 익숙하게 우리를 골목골목으로 인도하기 시작했다. 허리에도 오지 않는다는 수로 깊이며 초등학교는 있는데 운동장이 없어 아이들이 불쌍하다는 이야기, 또 스파이더맨 파 프롬 홈을 촬영했다는 스폿을 알려준 것도 재미있었지만 가장 공을 들여 설명한 것은 베니스의 초기 역사였다. 우리를 빈터에 앉혀놓고는 어찌나 재미있게 이야기하는지, 좋은 의미로 개그맨 스탠딩 코미디를 보는 것 같았다. 주로 젊은이들인 우리 일행이 조르르 앉아 왔다 갔다 하며 귀여운 가이드 선생님의 열정적인 설명을 귀를 기울이고 있자니 유치원생들인 것 같아 웃음이 났다.

나는 (그리고 우리 가족은) 이 오래된 도시 베니스가 인공 섬인 것을 처음 알았다. 훈족의 침입을 피해 로마 사람들이 인공적으로 만든 도시라고 했다. 오갈 데 없는 사람들이 야만족을 피하기 위해 진흙 펄과 같은 곳에 임시 거주할 곳을 쌓아나간 것이 베니스의 시작이었다. 낮에는 조용히 숨어 지내다가 밤이 되면 물과 식량을 가져오기 위해 목숨을 걸고 육지로 건너갔다고 한다. (베니스가 난민들이 세운 도시인 것을 알게 되니 우리 남편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딸과 나는 눈을 맞추고 속삭였다. “아빠 꽂혔다” 남편은 개인적으로 난민 단체를 후원하고 있다.) 정착민들은 기다란 나무 말뚝을 진흙과 모래 속에 굳게 박아 넣었고, 점토를 부어 넣어 단단하게 굳혀 건물을 올릴 수 있는 땅을 다졌다. 

식수 문제도 해결해야 했다. 바닷물을 마실 수도 없고 진흙에서 지하수가 나오지도 않았지만 빗물이 있었다. 지하에 거꾸로 된 돔 모양으로 돌을 깔고 그 속을 자갈과 굵은 모래로 채웠다. 빗물은 경사진 바닥을 따라 모여 설치된 구멍으로 흘러 들어가고 여과되어 우물에 고였다. 베니스인들은 가운데 광장을 두고 우물을 설치하고 성당을 세웠다. 그리고 둘러싼 건물을 지었고 마을 단위인 캄포(campo)를 형성했다. 난민들이 몰려오며 이런 마을 단위는 하나씩 늘어갔고 베니스의 작은 광장은 하나의 마을, 하나의 동질적인 집단의 이야기를 담은 동네가 되었다.

베니스의 길들은 끊긴 것 같은데 이어져 있기도 하고 큰 길이다 싶은 길이 갑자기 수로에 막히기도 한다. 두 사람이 겨우 통과하게 좁기도 하다가 갑자기 눈이 확 트이는 광장이 나온다. 이런 베니스의 묘한 길들은 우리 뿐 아니라 그 옛적 침입자들도 혼란스럽게 했다. 베니스인들은 다리나 몇 개의 좁은 골목만 막으면 캄포를 방어할 수 있었고 한동안 베니스의 지도는 국가 기밀이었다고 한다. 

이렇게 원래 땅이 없는 도시였기에 봉건제가 힘을 쓸 수 없었고 귀족과 평민의 차이가 크지 않은 곳이 또한 베니스였다. 돈 많은 평민도 구걸하는 귀족도 가능한 이 자유로운 분위기의 도시는 해운업의 강점을 살려 소금과 각종 향신료를 교역하며 부를 쌓았고 르네상스를 화려하게 누렸다. 

베니스는 화려한 도시다. 베네치아 공화국은 한때 동지중해를 제패했다. 콘스탄티노플에서 가져왔다는 네 마리 청동 말이며 황금과 보석으로 내부를 온통 뒤덮은 성 마르코 성당의 화려함은 어떻게 표현할 길이 없다. 아름다운 주랑으로 둘러싸여 있는 성 마르코 광장은 지금도 100여 년의 역사를 가진 축제 기간에 화려한 가면과 의상을 갖춰 입은 사람들로 가득 찬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 가족은 무엇보다도 난민들이 건설한 베니스를 만났다. 그 후로 베니스에서의 여정은 우물 찾기 미션이 되었다. 헤매고 헤매며 작은 다리를 건너 건물 사이 골목을 지나면 어김없이 광장이 나오고 아마 여기가 성당이었을지도… 싶은 건물이 있고 또 광장 한 쪽에는 반드시 우물이 있었다. 지금은 사용하지 않아 뚜껑이 덮여있어서 설명을 듣기 전까지는 우물인지도 몰랐다. 가끔 그곳에 앉아 다리를 흔들며 젤라또를 먹는 젊은이들도 있었는데 벤치라기에는 너무 높고(뜀틀 정도의 높이?) 뚜껑 윗부분이 경사가 있어서 벤치는 아닌데 싶긴 했다. 

베니스에서 가장 좋았던 것이 무엇인지를 서로 이야기했을 때 나는 우물 이야기를 했다. 베니스의 우물에는 고향을 떠난 아픔을 딛고 새로운 터전에서 힘들여 어떻게든 머물 자리를 구하는 초기 정착민들의 절실함이 담겨 있었다. 다리를 건너면 하나의 마을, 하나의 광장, 하나의 우물 그리고 어딘가 있었을 하나의 성당…. 넓은 광장은 넓은 대로 작은 광장은 작은 대로 하나의 우물로 인하여 베니스는 더욱 흥미롭고 사랑스러운, 우리 가족이 가장 사랑한 도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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