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쨌든, 사랑하니까

박경리의 '토지'로 시작하는 2024년 한가위_우나별

2024.09.17 | 조회 9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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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요일들

우리들의 이상적인 시간 기록 일지

곧 추석이라고 한다. 맞다. 곧 추석이다. 타국살이를 오랜 시간 하다 보니 한국의 명절이 남의 나라 축제처럼 점점 멀게만 느껴질 때가 있다. 한국인과 살고 있지 않고, 한국인과 어울리지 않으니 이렇게 느껴지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일 일지도 모르겠다.

얼마 전부터 읽기 시작한 박경리 선생님의 ‘토지’는 1897년 한가위를 배경으로 그 긴 이야기의 문을 연다. 참으로 재미난 우연이다. 2024년 한가위가 다가올 즈음 토지의 첫 장을 열었다는 것은 말이다.

풍성하고 즐거운 한가위 보내시라는 인사를 의례적으로 주고받으며 살던 나는 문득 이 책의 앞부분의 몇 장을 들척이다가 추석.. 한가위가 이토록 쓸쓸하고 아플 수 있는 축제였는가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되었다. 가슴이 아려와 다음으로 넘어가지 못하고 몇 번을 읽고, 또 읽었는지 모르겠다. 안 그래도 요즘 번뇌와의 사투로 지쳐가는 나에게 삶과 죽음을 좀 더 깊게 생각해 볼 수 있는 또 다른 생각의 문을 열어준 책이다.

가을의 대지에는 열매를 맺어놓고 쓰러진 잔해가 굴러 있다. 여기저기 얼마든지 굴러 있다. 쓸쓸하고 안쓰럽고 엄숙한 잔해 위를 검시하듯 맴돌던 찬 바람은 어느 서슬엔가 사람들 마음에 부딪쳐와서 서러운 추억의 현을 건드려주기도 한다. 사람들은 하고많은 이별을 생각해 보는 것이다. 흉년에 초근목피를 감당 못하고 죽어간 늙은 부모를, 돌림병에 약 한 첩을 써보지 못하고 죽인 자식을 거적에 말아서 묻은 동산을, 민란 때 관가에 끌려가서 원통하게 맞아 죽은 남편을, 지금은 흙 속에서 잠이 들어버린 그 숱한 이웃들을, 바람은 서러운 추억의 현을 가만가만 흔들어준다.

“저승에나 가서 잘 사는가.”

사람들은 익어가는 들판의 곡식에서 위안을 얻기도 한다. 그러나 들판의 익어가는 곡식은 쓰라린 마음에 못을 박기도 한다. 가난하게 굶주리며 살다 간 사람들 때문에…

"이만하면 묵을 긴데…”

풍요하고 떠들썩하면서도 쓸쓸하고 가슴 아픈 축제, 한산 세모시 같은 한가위가 지나고 나면 산기슭에서 먼, 먼 지평선까지 텅 비어버린 들판은 놀을 받고 허무하게 누워 있을 것이다.

- 박경리의 '토지', 1권 중에서…

내가 특별히 가을을 탄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은 없다. 가을은 수확의 계절이고, 뭐니 뭐니 해도 천고마비의 계절 아니겠는가? 무더운 여름에 집 나갔던 식욕이 눈치도 없이 기어 들어온다는 그런 계절 말이다. 나는 그 시끌벅적함이 예전부터 불편했다. 단풍놀이보다 봄의 꽃놀이를 더 마음 놓고 좋아했단 것도 나이가 든 요즘에서야 알아차리게 되었다. 가을은 화려하고 아름답지만 아프다. 기형도의 ‘10월’이라는 시를 수백 번 읊조리던 날들이 있었다. 끝내 내 사랑하는 시월의 숲은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중얼거리며 말이다. 뜨거운 여름을 견뎌내고 풍성하게 익어가는 곡식들이 황금빛 물결을 만들며 바람에 일렁일 때, 떠나간 이들을 안쓰러워하는 애통한 마음을 감출 수 없겠지만 여전히 그 아름다운 황금빛 들판은 잘못이 없다.

오늘은 성당에서 추석을 맞이하여 합동 위령미사를 봉헌했다. 한인 성당을 나가기 시작한 것은 스페인에 있을 때부터였다. 영국에 살면서 영국 성당에서는 보지 못했던 정성스러운 차례상과 함께 돌아가신 가족들과 조상을 기억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위령미사를 봉헌하면서 문득 유난히 따뜻했던 봄에 돌아가신 우리 할머니, 외할아버지뿐만 아니라 '토지'를 통해 알게 된 가난과 굶주림에 고통받다 떠난 많은 이들의 죽음도 함께 기리게 되었다.

나보다 앞서 삶을 살았던 그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의 탄생과 죽음 가운데 지금 나의 삶이 내 사람들의 삶 가운데 이렇게 기적처럼 존재하고 있지 않은가? 지금 나에게 주어진 삶이 얼마나 큰 기적과 같은 것인지 모른 채 자꾸 나를 탓을 하고, 세상 탓을 했다. 항상 감사를 전하기 이전에 욕심을 내고 갖지 못한 것들 때문에 괴로워했던 것 같다. 내 뜻대로 되는 것이 하나도 없다 생각하고 짜증을 부렸다. 어린아이들에게는 바르게 행동하라 가르치면서 정작 나는 한없이 철없는 아이처럼 생각하고 살아온 것 같았다.

오늘 신부님께서 책 한 권을 소개해 주셨다. 17세기 스페인에서 중국으로 선교를 갔다가 중국어로 책을 쓰셨다는 판토하 신부님의 ‘칠극’이라는 책이다. 다행히 온라인 서점에 있어 쉽게 내용을 찾아 읽어볼 수 있었다. 이것 또한 참으로 감사할 일이다. 앞으로 시간이 될 때마다 틈틈이 다 읽어볼 생각이다. 오늘은 신부님께서 함께 나눠주신 ‘탐욕’에 관한 내용을 읽으며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아 보려 노력했다.

어쩌면 재물뿐만이 아니라 나의 몸뚱이와 생명 또한 내가 소유한 것이라는 생각을 버려야겠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나에게 허락하신 것들, 잠시 나에게 맡겨진 것들이라 생각하니 나 자신과, 남편, 그리고 아이들을 바라보는 마음이 조금은 편안해짐을 느낀다.

이는 불교의 공(空) 사상, 즉 만물이 서로의 관계로만 얽혀 있을 뿐 자아가 없는 무아의 상태이기 때문에 실체가 없는 공(空)이라는 말씀과 맥을 함께 하는 것 같다. 아무것도 내 것인 것이 없는데 자꾸만 이렇게 매달리고 있는지 모르겠다. 어쩌면 그것을 사랑이란 이름으로 퉁쳐서 얘기해 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러지 않으려고 한다. 자꾸 내 마음대로 하려는 마음이 커지는 것을 어떻게 사랑하기 때문이라는 핑계를 댈 수 있을까?

나는 다시 박경리의 토지 서문의 첫 문장으로 돌아왔다.

‘시간은 각일각 태어나고 죽어간다’

- 박경리의 '토지', 1권 중에서…

우리 삶 자체에는 실체가 없다. 우리 인간의 편의에 의해 만들어 놓은 시간의 개념 한가운데에 나와 내 삶을 두고 온갖 의미를 더하고, 지나간 것을 후회하고, 무언가를 간절히 원하고, 갖지 못해 괴로워한다. 결국 우리는 흘러가는 강물에 물과 같은 존재 아니던가? 그저 연결돼있어 물줄기로 보일 뿐, 뚜렷한 실체도 없이 끊임없이 세월에 밀려 한없이 나타나고 한없이 사라지는 그런 존재.

요즘 부쩍 둘째 까치가 나에게 죽음과 사후세계에 대한 질문을 한다. “엄마도 안 가봐서 디테일한 설명은 해줄 수 없지만…”으로 운을 떼며 아이에게 되도록 성의껏 대답을 해 주려고 노력한다. 그런데 갑자기, “엄마는 하늘나라에 가도 나를 기억해 줄 거예요? 난 엄마 거 하나도 안 버리고 간직할 거예요."라고 말을 하는데, 순간 깜짝 놀라 울컥했다. 나도 언젠가는 이 아이를 두고 떠날 텐데, 이 자그마한 아이가 나를 그리워하며, 기억할 무언가를 안고 살아갈 수도 있겠구나.. 그리고 나는 이 아이에게 그만큼 소중한 존재였구나.. 한참 힘들 때에도 나를 버티게 해주는 것이 대단한 신념이나 위대한 무언가가 아니라. 이렇게 내 곁에서 숨 쉬고 있는 이토록 작은 존재라는 사실을 깨달으며 나 자신을 미워하고 자책하며 지냈던 지난 시간들이 부끄러워했다.

살면서 우리는 수많은 깨달음의 순간을 맞닥뜨리지만 여전히 깨달은 것을 실천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그래서 자꾸만 내 마음속 숙제들이 쌓여가는 기분이 들 때가 많았다.

뭔가 텅 빈 머리엔 지식을, 텅 빈 가슴엔 지혜를 차곡차곡 쌓아 나가야 하는 것이 어른 됨이라 생각해서였던 것 같기도 하다. 그렇게 버거웠던 마음이 오늘 조금 가벼워진 것 같기도 하다. 어쩌면 내가 갖고 있는 결핍들은 채워서 해결될 것들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 어쩌면 더 비워내고, 더 나눠야 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어떻게 마음을 비워나가야 할지는 아직 나는 모른다. 요즘 한창 진행 중인 집 청소만큼이나 내 마음속 청소의 속도도 더디다. 그래도 매일 조금씩 비워나가고, 나누다 보면 또 요령이 생기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해보는 밤이다.

2024년의 한가위, 추석은 유난히 쓸쓸하고 외롭다. 하지만 그 어느 해보다 마음이 풍성함을 느낀다. 감사함을 더하니 더할 나위 없는 한가위를 잘 보낼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고 말이다. 어제 첫째 또치가 한글학교에서 만들었다고 들고 온 ‘송편 만들기’ 책자가 너무 귀엽게 느껴졌다.

“엄마, 우리 집에 쌀가루 있어요? 꿀은요? 참깨랑 팥도 있어요?” 하면서 반짝이는 눈으로 나에게 말을 걸어오는 아이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한껏 기대에 차 있었다. 엄마랑 같이 집에서 송편을 만들어보고 싶어 하는 아이의 간절한 모습을 바라보는데 어찌나 사랑스러웠는지 모른다.

그래서 나는 내일 야심 차게 아이들과 송편을 만들어 보려고 한다. 맛도 모양도 보장할 수 없지만.. 이 넓은 우주, 우리 셋만 알고 흘러가버릴 이 시간들이 나와 아이들의 기억 속에서라도 영원히 남아 우리를 연결시켜줄 고리가 되어주길 바라면서 말이다.

2024년 추석을 맞이해 박경리의 ‘토지’, 기형도의 ‘10월’, 추석맞이 위령미사, 판토하 신부님의 ‘칠극’, 불교의 ‘공(空) 사상’, 그리고 8살 꼬맹이가 한글학교에서 만들어온 ‘송편 만들기’ 책자까지.. 오늘 나의 아무 말 대잔치도 무척이나 풍성하다. 밑도 끝도 없는 나의 아무 말 대잔치 글을 끝까지 읽어주신 독자님들이 계시다면 그 어느 해보다 풍성한 한가위 보내셨길 진심으로 기원하는 나의 마음도 함께 전해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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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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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또민

    0
    about 2 months 전

    요즘은 딸아이랑 둘만 달랑 지내다 보니 추석이고 뭐고 아무 생각 없었는데 우나님 덕분에 풍성한 추석 이야기 받아 갑니다. 송편을 직접 하지는 못하더라도 딸아이랑 둘이서 나눌 추석 특별식을 한 번 기획해 봐야겠어요^^ 우나님 가족도 추석 잘 보내시길~

    ㄴ 답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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