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치고 아무것도 하기 싫은데 시간과 여력이 되면 도서관에 간다. 이럴 때는 지적인 자극을 주는 작가보다는 나를 좀 쉬게 하는 책을 찾는다. 감정싸움에 지치고 싶지 않아 로맨스는 피하고 아무 생각 없이 읽을 수 있는 추리소설이나 SF를 많이 찾는데, 그게 너무 두꺼우면 ‘몰라도 되는 사건 속으로 들어가 그 복잡한 전개를 다 따라가야 한다고?’ 싶은 생각이 들어 단편집을 선호한다 (한숨)
코니 윌리스와의 첫 만남은 <10대를 위한 SF 걸작선>이었다. 실려있는 십여 편이 넘는 단편 중에 코리 윌리스의 <클레어리가에서 온 편지>가 가장 마음에 남았다. 우선 주인공 화자인 어린 소녀가 마음속으로 가족에 대하여 투덜거리면서 한적한 마을 길을 폴짝폴짝 뛰어다니는 SF 답지 않은 도입부가 좋았다. 일상의 평범한 이야기인 것 같았는데 갑자기 휘몰아치다가 사람을 멍하게 만드는 결말에 이르게 되면 처음부터 모든 사건이 맞아들어가고 이전 이야기들이 재해석되며 여운이 남게 되는 것이 좋았다. (더 이야기하면 스포가 될까 봐 여기까지…)
코니 윌리스는 SF계의 수다쟁이라 불린다. (그녀의 많은 자료조사와 탁월한 줄거리를 수다로 폄훼한다고 속상해하는 팬들도 있지만) 그것도 아주 신나게 이야기하는 유머스러운 대화의 달인이다. 문장이 쉽고 어찌나 정신없이 치고 나가는지 읽다 보면 생각 없이 그 페이스에 말려들고 만다. 다루는 주제는 폭넓고 깊다. 게다가 그 폭풍 같은 수다는 마지막에 정교하게 맞아들어간다. 기발한 엔딩에 마지막에 가서 ‘어?’하고 입을 벌리고 있다가 처음부터 다시 읽게 되곤 한다. (사실 좋은 반전을 가진 작품들은 다 독자들을 이렇게 만든다)
이 작가의 여러 단편집을 읽게 되니 장편을 읽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작가의 후기를 보면 시간 여행을 다룬 단편 「화재감시원」은 작가가 영국의 세인트 폴 성당을 방문했을 때 모티브를 얻었다고 한다. (당장 그 자리에서 돌아다니며 성당 내부 스케치 글을 쓰기 시작했단다… 그 열정이 부럽다) 그 단편은 옥스퍼드 시간 여행 시리즈로 불리는 장편 3부작『둠즈데이북』(1992), 『개는 말할 것도 없고』(1998), 『블랙아웃』(2010), 『올클리어』(2010)으로 이어지는데 각 장편이 아주 두꺼운 책 두 권씩인 어마어마한 분량이다. 그걸 다 읽었는데, 엄청난 사료 조사가 선행되었을 법한, 읽을만한 가치가 있는 책들이었다.
코리 윌리스는 한국에서도 꽤 인기가 있는 작가다, 그녀의 중단편을 모은 ‘코니 윌리스 걸작선’ 『화재감시원』(2015)과 『여왕마저도』(2016)를 비롯, 유행의 근원을 추적한 『양 목에 방울 달기』(2016), 완벽한 소통과 사랑을 다룬 『크로스토크』(2016), 크리스마스 단편집 『빨간 구두 꺼져! 나는 로켓 무용단이 되고 싶었다고!』(2017), 『고양이 발 살인사건』(2017) 등이 번역 소개되어 있다. 청소년을 위한 단편으로 나온 DA(2006)도 나를 행복하게 만든 작품이다.
작가 리스트에서 한 번 다루어보자고 마음먹었던 작가였기 때문에 지난 여름 도서관에 들러서 의무감으로 『크로스토크』를 빌려 읽었다. 코니 윌리스라는 작가가 아니라면 읽지 않았을 책이었다. 일단 엄청 두꺼운 책 상하 권으로 이루어져 있고 첫 번째 챕터에서 바로 뻔한 멜로물의 수를 다 보여준다. 여주인공에게는 남들이 부러워하는 성공지향적인 남자친구가 있고, 검은 곱슬머리에 도통 꾸미지 않는 퉁명스러운 괴짜 남사친이 주위를 맴돌고 있다. 이건 마치 일일드라마 첫 회에 응 쟤랑 쟤랑 되고 쟤랑 쟤랑 엮이겠구나 싶은 줄거리가 너무 일찍 모습을 드러낸 것 같았다. 그런데, 나의 예상은 거기까지. 그 다음 이야기부터는 그 뻔한 결론으로 가는 길이 예측불허였다. 방정식인 줄 알았는데 기하 문제인 듯한(이것은 히가시노 게이고의 표현을 빌려 쓴 것이다) 전개와 결론이었다. 로코인 줄 알았는데 SF였다가 역사물로 마쳤다고 하면 스포가 될까?
이렇게 코리 윌리스는 명랑하게 독자의 예상을 깨는 작가다. 이 글을 쓰다 보니 코리 윌리스의 올해 번역된 다른 작품이 나와있는 것을 발견했다. 『로즈웰 가는 길』 외계인이 나오는 코믹한 소설이라는데 다음 도서관 갈 때 찾아봐야겠다. 인기가 많은 작가라 쉽게 차례가 올 것 같지 않지만.
마지막으로 코리 윌리스의 작가 후기를 첨부한다. 그녀의 작품은 이렇게 세상에 나왔다.
"아무리 많은 거절 쪽지를 받고, 아무리 낙담했다 하더라도 계속 쓰세요" : <클리어리 가족이 보낸 편지> 저자 후기 by 코니 윌리스 (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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