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 처음 유럽여행을 간다고 하면 갈법한 로마, 파리, 런던과 같은 낭만의 도시를 선택하는 것과 달리, 나는 첫 유럽 여행의 목적지를 독일의 베를린으로 선택했다. 대학교 여름방학을 이용해 40일이라는 긴 여행 기간 동안 다른 나라로 거의 이동하지 않고 독일의 다양한 도시들을 돌아봤다. 대학 수업이나 책을 읽으며 가끔씩 접하는 독일에 대한 이야기가 왜 그렇게 매력적이었는지, 가보지도 않은 독일이라는 나라에 대한 관심은 커져갔다. 그렇게 첫 독일 여행을 떠난 지가 벌써 딱 10년 전이다.
지금은 독일 생활 3년차, 베를린에서 기차로 꼬박 6시간은 달려야 도착하는 본이라는 작은 도시에서 살고 있다. 틈날 때마다 여러 도시를 다니다보니 어느덧 독일의 도시만 12개를 방문했고, 다음달이면 13번째 도시를 여행할 예정이다. 한국에서도 국내 여행을 이렇게 많이 다닌 적이 없었는데 독일에서만 국내 여행을 부지런히 다니는 게 새삼 신기하기도 하다.
뚜벅이를 위한 나라
독일은 자동차로 유명한 나라이고, 속도 제한이 없어 시속 200km 이상으로 시원하게 달릴 수 있는 고속도로(아우토반)를 보러 여행을 오는 사람들도 많지만, 반대로 차가 없는 뚜벅이들이 여행하기에도 아주 좋다. 특히나 몇년 전부터 시작된 도이칠란트 티켓(독일 전역의 기차, 지하철, 버스, 트램을 월 49유로의 정액 요금만 내고 무제한 이용할 수 있는 티켓) 덕분에 추가로 교통비를 내지 않고 원하는 도시는 어디든 갈 수 있다. 덕분에 뚜벅이인 우리 부부는 비수기를 이용해 부지런히 기차를 타고 독일의 여러 도시를 여행할 수 있었다.
한국에서 국내 여행을 하기 어려웠던 이유는 생각보다 차없이도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는 도시가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관광 도시로 유명한 제주도도 운전을 하지 않으면 이동의 제약이 많았고, 나름대로 관광지라 홍보를 하는 지방 도시들도 대중교통에만 의존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배차 간격이 1시간인 마을 버스를 기다려야 하거나, 저녁 8시 이후로는 대중 교통을 이용할 수 없는 곳이 많았다. 밤새 심야 버스를 운영하고, 카카오택시와 배달 어플, 24시간 이용 시설들이 붐비는 서울의 편리함에 비해 소도시로 갈수록 대중교통 접근성이 떨어지고 편의성이 낮아진다.
대도시라 구분되는 베를린, 뮌헨, 함부르크, 쾰른을 여행하다보면 확실히 유동 인구도 많고 대중교통도 발달되어 있고 대형 쇼핑몰이나 가게들도 많다. 그렇다고 해서 소도시라 불리는 카셀, 아헨, 본, 브륄, 코블렌츠 등을 가도 대중 교통이나 서비스에서 크게 불편을 느낀 적도 없다. 대도시에는 더 다양한 선택지와 이벤트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소도시에 살기 때문에 생필품을 사기 위해 운전을 해야한다거나, 밤에는 이동이 어려운 것도 아니다. 독일 전역을 연결하는 기차의 운영 정보를 하나의 앱으로 확인할 수 있기 때문에 어떤 도시를 가도 똑같은 앱을 사용하고, 기차 역에 내리면 크고 작은 차이가 있을 뿐 역의 분위기도 대부분 흡사하다.
어떤 도시를 가든 강가의 테라스에 앉아 맥주를 마시게 된다
생각해보면 서울은 고층 빌딩이 가득한 강남의 풍경과 경복궁을 둘러싼 돌담으로 이어지는 종로의 풍경, 대학 캠퍼스가 상징적인 신촌의 풍경이 선명하게 차이가 난다. 서울 안에서도 이렇게 다른데, 서울을 벗어나면 엄청난 다양성이 펼쳐진다. 해수욕장이 넓게 펼쳐진 동해 바다를 품은 도시들은 저마다의 해산물 요리를 자랑하며 다른 도시에서는 경험하지 못한 낯선 것들을 경험할 수 있다. 굽이진 해안도로를 달리며 지역 특산물을 경험하며 도시를 벗어나는 경험에 취해있다보면 그야말로 여행의 즐거움은 극에 달한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 고층 빌딩으로 가득한 회사로 출근하려고 하면 여행의 풍경이 꿈처럼 멀게 느껴진다.
반면 독일의 도시들을 여행하다보면 새로운 풍경을 보고 설레고, 낯선 음식을 먹으며 감탄할 일은 별로 없다. 애초에 서울처럼 고층 빌딩으로 빽빽한 도시의 풍경이 존재하지 않고, 대부분 3-5층의 낮은 건물들이 대부분이다. 지역마다 유명한 맛집이나 카페를 찾으면 새로운 것은 없다. 우리 동네에서 먹던 것을 다른 지역에서도 먹는다. 카페를 가도 새로운 메뉴를 기대할 수 없고 대부분 먹던 것과 똑같은 커피를 먹는다. 독일 전역에 걸쳐 수십 여 개의 크고 작은 강이 있는데, 그에 반해 바다를 볼 수 있는 지역은 거의 없다. 그러다보니 동네마다 강을 하나씩 끼고 있어서 어떤 지역을 가도 강을 볼 수 있다는 게 지극히 독일스러운 풍경이기도 하다. 그나마 지역마다 특색있는 와인과 맥주를 기대하며 새로움을 찾을 수 있다. 그러니까 독일 여행의 코스를 단순화하면 기차를 타고, 익숙한 음식을 먹고, 늘 마시던 커피를 마시며, 강을 보고, 익숙한 풍경 속 미묘하게 다른 지점들을 찾아다니며 새로운 술을 찾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표준화된 경험이 주는 의미
한국은 도시마다의 차이가 커서 국내 여행만으로도 색다르고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다면 독일은 규모 외에는 도시마다의 차이가 근소한 편이라 익숙함 속에서 소소한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 한편으로는 지루하게 느껴질 수 있겠지만, 오히려 여행을 하다보면 어떤 도시에서든 잘 살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한다. 한국에서는 서울을 벗어나면 너무 많은 인프라에서 멀어지는 것이 아닐까, 환경이 갑자기 달라지면 적응할 수 있을까 걱정을 한 적도 있다. 반면 독일에서는 어떤 도시를 가도 표준화된 대중 교통 시스템과 비슷한 식문화, 생활에 필요한 최소한의 인프라는 어떤 도시든 골고루 갖추고 있다보니 한국에서처럼 서울 같은 특정 도시에 집착하지도 않게 된다.
도시마다 골고루 퍼져있는 유명 대학들, 각 도시마다 고유한 분위기는 가지고 있지만 생활에 필요한 최소 인프라는 비슷하게 갖춘 편의성(“이렇게 작은 시골 마을에도 대형 마트가 있다고?” 하고 늘 놀라곤 한다.), 한 도시에만 집중되지 않고 분산된 기업들까지. 따져볼수록 독일은 사는 도시가 다르다고 해도 경험의 양과 질이 격차가 적고, 나라의 크기는 크지만 각 도시가 촘촘하게 연결되어 있는 느낌을 받곤 한다. 오히려 다양한 도시를 다닐수록 “독일만의, 독일스러운" 비슷한 경험의 형태가 매력적이라는 느낌도 받는다. 다음달에 가게 될 열 세 번째 도시인 트리어도 열심히 정보를 찾아보면 트리어 대학과 모젤강과 모젤 와인, 오래된 유적지 정도를 기대할 수 있는데 우리 동네 와인이랑 어떻게 다를지 소소한 설렘만큼이나 얼마나 나에게 익숙해진 “독일스러운" 경험을 또 목격할지 기대된다.
* '독일에서 살게 될 줄은' 글쓴이 - 메이
유학생 남편과 함께 독일에서 신혼 생활을 꾸리며 보고 듣고 경험하는 이야기. 프리랜서로 일하며, 독일어를 배우면서, 일상의 풍경들을 낯선 시선으로 관찰하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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