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심리학자의 고백

완벽하지 못한 존재_어느 심리학자의 고백_이지안

2024.07.29 | 조회 8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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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문화

총 20여명의 작가들이 세상의 모든 문화에 대한 이야기를 매일 전해드립니다.

 

상담을 하면서 감정일기를 써보게 하는 경우가 많다. 하루를 돌아보며 가장 마음에 남는 일에 대해서 쓰고 그 때 느낀 감정의 이름과 강도를 체크하는 과제다.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은 사람마다 다른 모양을 하고 있었지만, 뭉툭하게 가려내보면 비슷한 이유로 모아졌다. ‘내가 바보 같이 느껴질 때’, ‘제대로 처신을 못했을 때’, ‘부족한 엄마 혹은 딸이라고 느낄 때’가 그런 경우였다. 스스로가 ‘충분하지 않다’는 느낌이다.

그렇다고 매일 시간을 허투루 보내는 것은 아니다. 온종일 긴장한 상태에서 맡을 일을 처리해낸다. 회사에서 조금이라도 일을 더 잘 하기 위해, 물건을 살 때 가장 좋은 옵션을 선택하기 위해, 아이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기 위해 몸에 힘을 잔뜩 준다. 그 와중에 틈틈이 친구와 약속을 잡고 이메일이나 SNS 알림을 확인한다. 이다지도 쉼 없이 무언가를 하는데 왜 충분치 못한다고 느끼는 걸까.

이미지 출처_Isto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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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가 고도화되고 성과를 중시하는 능력주의가 발달할수록 학업 성취, 업무 성과, 대인관계나 가족, 외모나 건강 등에서 요구되는 잣대는 촘촘하고 다양해진다. 특히 정해진 성공의 길, 삶의 보편적인 기준이 중요한 문화권에서는 더 그렇다. 학교나 직장, 사는 동네나 아파트의 이름까지 가지 않더라도, 옷차림이나 말솜씨가 적당히 세련되고, 각종 트렌드나 재테크, 양육 관련 정보를 어느 정도 잘 알고 있어야 한다는 압박을 받는다. ‘나이 서른이라면’, ‘젊은 여성이라면’, ‘엄마라면과 같이 나이나 성별에 따라서도 다른 기대가 덧입혀진다.

우리를 둘러싼 표준적인 기준이 뚜렷할수록 우리가 그 기준에 미달한다는 것은 분명해진다. 거미줄처럼 얽힌 기대망에서 어느 하나에는 삐끗하기 마련이므로, 우리는 늘 ‘충분하지 못한’ 느낌을 갖고 살게 된다. 언제나 어딘가는 부족하고 부적절한 사람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이 충분하지 못한 느낌은 우울이나 불안으로 이어지기 쉬운 취약한 고리가 된다.

낙오되지 않기 위해 애쓰는 완벽주의도 강해진다. 완벽주의를 대상에 따라 자기지향, 타인지향, 사회부과 완벽주의로 나누기도 하는데, 최근 연구에서는 청년들 사이에서 사회나 타인이 부여하는 기대를 충족시키고자 하는, ‘사회부과 완벽주의(socially prescribed perfectionism)’가 가파른 속도로 심해지고 있음이 밝혀졌다. 자기만의 높은 기준으로 스스로를 몰아 부치는 자기지향 완벽주의나 비현실적 기준을 타인에게 들이대는 타인지향 완벽주의에 비해 사회부과 완벽주의는 불안이나 우울감, 자살 위험성이 더 많고, 스트레스도 더 심해지게 만든다.

사회부과 완벽주의가 높으면 외부에서 정해놓은 기준에 도달해야 한다는 압박감 때문에 스스로 삶을 주도적으로 이끌어간다는 느낌을 갖지 못하고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할지, 자기 삶이 타인의 평가 기준에 잘 맞는지 자꾸 돌아보게 된다. 수치심이나 죄책감을 자주 느끼게 되는 것은 당연한 결과다. 무엇보다 타인이 정해놓은 기준에 맞추다보면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을 놓칠 수 있다. 우리의 주의력은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신경과학자인 대니얼 레비틴(Daniel J. Levitin) 교수에 따르면, 우리가 동시에 주의를 기울일 수 있는 대상은 그 개수가 정해져 있고, 어느 하나에 주의를 기울이면 필연적으로 다른 무언가로부터 주의를 거두어들이게 된다. 심지어 하루에 어느 정도의 판단을 내리고 나면 더 이상 신중하거나 좋은 판단을 내리기 힘들어진다. 사회의 기준과 익혀야 하는 정보가 많을수록 주의는 분산되고 어디선가 구멍이 생길 수밖에 없다. 늘 열심히 하는데 어딘가는 부족한 상태가 되는 것이다.

이미지 출처_Isto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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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용품을 고르는 일부터 진로를 결정하는 일까지 사회가 아무리 삶의 모든 순간에 완벽함을 요구한다고 하더라도, 어디에 주의를 쏟으며 살지는 내가 선택할 수 있다. 내게 중요한 영역을 가려내어 그곳에 주의력을 모으고, 나머지 영역에서는 기준에 미치지 못하더라도 받아들여 본다. 실은 다 잘 해내고 싶었을 테지만, 그러지 못해 애석하지만, 내게 중요한 것에 집중하기 위해 그렇지 않은 곳에는 의도적으로 힘을 빼는 것이다.


내가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언뜻 그려지지 않는다면 수용전념치료(Acceptance and Commitment Therapy)에서 권하는 방법을 써볼 수 있다. 그 중 하나는 내 장례식에서 나의 속마음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 나에 대해 어떤 추모사를 해 줄지 생각해보는 것이다. 생전의 내가 어떤 것에 가장 마음을 쏟았고 무엇을 위해 살았는지 말해준다면, 어떤 이야기를 듣고 싶은가. 그 질문에 가장 우선으로 떠오르는 말이 곧 내가 삶에서 집중하기 원하는 부분일 테다.

가령 자녀에게 좋은 엄마였다.”고 기억되길 원하는 사람이라면, ‘자녀양육이라는 영역에서 어떤 부분에 주의를 두고 싶은지 선택할 수 있다. ‘좋은 양육자라는 모호한 타이틀은 많은 역할을 포함한다. 정서적 지지, 시의적절한 조언, 학업 지원, 건강한 식단 제공 등 양육자로서 자녀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이 많기 때문이다. 다 중요해 보이지만 다 잘 할 수는 없다. 내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역할은 무엇일까. 그것에 선택적으로 집중하는 것이다. 나머지에는 그만큼 충실할 수 없는 안타까운 현실을 인정하면서

이제 추모사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쓸 차례다. “자녀를 따뜻하게 지지하고 이해해준 엄마였다”라는 메시지가 남길 바란다면, 자녀와 있는 시간만큼은 자녀가 충분히 이해받는다는 것을 느끼게 하는데 보다 집중할 수 있다. 이것이 삶의 핵심 가치, 즉 내가 ‘충분히 잘 사는 삶’을 위해 선택하는 기준이 된다.

이미지 출처_Isto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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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사 이 기준에 따라 살지 못한다 하더라도 실패한 삶은 아니다. 우리는 ‘오늘은 잘 실천했으니 100점’이라거나 ‘오늘은 아이를 이해해주지 못했으니 0점’과 같이 스스로를 극단적으로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그날의 나는 50이나 60만큼의 애를 썼을 텐데도, 100점에 도달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그 모든 것을 ‘0’으로 환산해버린다. 더구나 가치는 결과를 평가하기 위한 기준이 아니다. 캄캄한 바다 위 등대와 같이 내가 어느 쪽으로 가야할지 알려주는 방향계에 가깝다. 그날의 나는 방향에 맞게 50이나 60만큼 전진한 셈이다. 방향키를 잘못 돌려 등대와 멀어졌다면 다시 등대 쪽으로 방향을 돌리면 된다. 방향을 바꾸는 순간도 가치를 향해서 항해하고 있는 것과 같다. 그러다보면 언젠가는 등대 근처까지 도달해 있을 것이다.

우리는 완벽하지 못한 존재다. 잘못된 결정을 내리기도 하고 어떤 부분에선 한참 부족하고 무능해 보이기도 한다. 이 때문에 손해를 보고 먼 길을 돌아가고 타인을 실망시킬 수도 있겠지만, 나 자신에게 중요한 것에 주의를 쏟느라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일을 할 수 있는 만큼만 해보겠다는 용기를 가지는 것, 그 경계 바깥에 있는 것에는 힘을 빼는 것. 그것이 무결한 완벽을 강요하고 불안을 조장하는 세상 속에서 꿋꿋이 자기 삶을 살아내는 길일 테다.


 

<참고문헌>

데니얼 J. 레비틴 (2015). 정리하는 뇌. 김성훈 역. 와이즈베리.

이문선 & 이동훈 (2014). 내현적 자기애와 사회적으로 부과된 완벽주의의 관계에서 수치심과 자기비난의 매개효과. 한국심리학회지: 상담 및 심리치료. 26(4), 973-992.

Besser, A., Flett, G. L., & Hewitt, P. L. (2010). Perfectionistic self-presentation and trait perfectionism in social problem-solving ability and depressive symptoms. Journal of Applied Social Psychology, 40(8), 2121–2154.

Curran, T., & Hill, A. P. (2019). Perfectionism is increasing over time: A meta-analysis of birth cohort differences from 1989 to 2016. Psychological bulletin, 145(4), 410429.

Tangney, J. P. (2002). Perfectionism and the self-conscious emotions: Shame, guilt, embarrassment, and pride. In G. L. Flett & P. L. Hewitt (Eds.), Perfectionism: Theory, research, and treatment (pp. 199215).


 

쓴이_이지안

여전히 마음 공부가 가장 어려운 심리학자입니다. <나를 돌보는 다정한 시간>, <나의 시간을 안아주고 싶어서>를 공저로 출간하였고, 심리학 관련 연구소에서 일하며 상담을 합니다.  

캄캄한 마음 속을 헤맬 때 심리학이 이정표가 되어주곤 했습니다. 같은 고민의 시간을 지나고 있는 이들에게 닿길 바라며, 심리학을 통과하며 성장한 이야기, 심리학자의 눈으로 본 일상 이야기를 전합니다.

상담 블로그 https://blog.naver.com/hello_kir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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