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지인들과 점심을 먹는 자리에서 각자 휴대폰 속 건강 앱을 열고 지난 한 주의 걸음 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많이 걷는 사람은 매일 만 걸음 이상을 걷는다 했고, 하루종일 집에 있는 날에는 150걸음도 채 못 된다는 사람도 있었다. 그 숫자들 속에서 문득 나의 걷기 생활에 대해 생각해보고 싶어졌다.
집에서 걷다 feat. OTT
내가 매일 걸음 수를 확인하기 시작한 건 코로나19로 강제 집콕 생활을 하게 되었을 때였다. 어쩔 수없이 나는 집 안에서 걸었다. 집에서는 직선거리로 몇 걸음 나오지 않으니, 벽을 따라 집을 크게 돌았다. 하지만 그렇게 걷는 일은 지루했다. 평소 멍 때리기,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하기를 잘 하는 편인데도, 어쩐 일인지 그렇게 걸을 때는 생각이 잘 떠오르지가 않았다. 쳇바퀴 돈다는 게 이런 건가 싶었다. 지루함을 견뎌보기 위해 유튜브를 여러 개 구독했다. 앱으로 바로바로 늘어나는 걸음 수를 계속 확인하면서, 숫자가 채워지는 재미 덕도 조금 본 것 같긴 하다.
생각해보면 코로나 전에도 사람들은 이런 걷기를 했다. 헬스장 런닝머신 위에서 걷고 달리는 일은 현대인에게는 제법 익숙한 일이 됐다. 냉난방 시스템으로 실내온도가 조절되고, 늦은 밤에도 환한 조명 아래에서 걸을 수 있다. 아무리 많이 걸어도 공간은 최소한만 써도 된다니. 좁은 도시의 바쁜 생활자들이 말 그대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꾸준히 몸의 운동과 벌크업을 하기에는 아주 훌륭하다. 게다가 우리에겐 시간 가는 줄 모르게 해줄 OTT들이 있지 않은가.
그런데 어쩐지 나는 이 걷기에 재미를 붙이기가 어렵다. 어쩔 수 없이 집 안을 돌던 일도 너무 지루했던 나머지 안 좋은 기억으로 남았고, 이제는 다시 하게 되지 않을 것 같다. 대신, 나는 걷기 위해 바깥으로 나간다.
어린 시절의 혼자 걷기
나는 아주 오래전부터 걷는 것을 좋아했다. 다니던 국민학교가 집에서 먼 편이어서 매일 20분씩 왕복 40분을 걸어야 했다. 걷다 보니 익숙해졌고, 심심하거나 답답할 때는 자연스럽게 신발을 신고 나가 어디로든 걸어갔던 것 같다. 내가 어릴 적에는 지금처럼 금쪽이의 마음을 알아주는 어른들이 별로 없었다. 그저 굶기지 않고 따뜻하게 옷 입히면 대충 좋은 부모라 생각했던 시절이어서, 어린 아이의 혼란스러운 마음이란 것은 스스로 알아서 처리해야 했다. 그럴 때 나는 걸을 수 있었고, 요즘처럼 아이의 안전에 대한 단속도 철저하지 않았던 때라, 아무 때나 아무 데로나 걸어갔다가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함께 조잘거릴 친구도 없이 걷는 일이 그저 좋았던 나는 루소의 말처럼 걸으면서 ‘나의 영혼을 속박에서 풀어주고, 사유에 더 많은 용기를 불어넣어주고, 나를 존재들의 광활한 바다에 빠지게’ 해주었는지도 모르겠다.
루소의 이야기에서 떠오른 건 이런 느낌이다.
이것은 나의 몸이 열린 공간과 만나 이루어지는 성장이다. 아마도 어린 시절 나의 걷기는 그렇게 나를 자라게 하지 않았을까.
집 앞 거리를 걷다
오늘 아침에도 집을 나서서 길을 걸었다. 몇 개의 건물을 지났고,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탔다. 버스가 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잠시 길 건너의 나무들을 바라보았다. 그 정도 거리에서 보기에는 아직 봄눈이 보이지는 않았다. ‘남쪽 동네에는 벌써 목련이 피었다던데, 다음 주 정도면 여기도 꽃을 볼 수 있으려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잠깐 들른 집 앞 편의점에는 처음 보는 알바생이 있었고, 버스 정류장에는 나처럼 버스를 기다리는 서너 명의 사람들이 있었다. 아직 한 겨울 패딩을 입은 사람도 있고, 벌써 밝은 크림색 트렌치코트를 입은 사람도 있었다. ‘저 옆에 서 있는 목련나무에 꽃이 활짝 피면 저 코트색과 비슷하겠네’ 생각했다. 그러자 갑자기 기분이 좋아졌다. 머지않아 곳곳에 꽃나무들이 만들어내는 봄의 그림을 볼 수 있을테니 말이다.
나만큼이나 걷기를 좋아하는 것 같은 작가 리베카 솔닛은 우리가 열린 공간에서 걸을 때 ‘몸의 움직임’과 ‘눈의 볼거리’가 만나 ‘마음의 움직임’이 일어난다고 말한다. 그래서 걷는 일은 ‘모호한 일이면서 동시에 무한히 풍부한 일’이 된다.
매일 걷는 집 앞길에는 건물들, 횡단보도, 신호등, 정류장 등 도시의 시설들이 거의 항상 같은 모습으로 있다. 하지만 그곳을 걸어서 지나는 나는 매번 조금씩 다르다. 기분, 생각, 그리고 몸 컨디션 등이 한 번도 같은 순간이란 없다. 그뿐 아니다. 길 위에서 만나는 자연과 사람들도 매번 다른 모습이다. 그래서 같은 공간을 걷고 있지만, 매번 다른 마음의 움직임이 우리를 찾아온다. 예측할 수도 없고 결코 반복되는 일이 없다. 모호한데 풍부하고, 모호해서 더 풍부하고 무한해서 더 매력적이다.
epilog 걷기와 사색
매일의 걸음 수를 안다는 것이 가져다주는 유익이 꽤 되는 것 같다. 너무 오래 걷지 않고 있는 나를 움직이게 해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고마운 존재다. 하지만 각종 OTT에서 흘러나오는 화면을 보며 하루의 걸음 수를 꽉 채운다면, 인생의 어떤 재미와 의미는 사라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걷는 일에 대해 사유한 18세기 사상가 루소의 말은 그런 내게 밖으로 나가서 걸으라고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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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김근영
이주, 이동의 경험이 많다. 90년대 문화사회학을 공부한 것을 최고의 행운으로 여긴다. 다양한 공간을 넘어 다니며 느끼고 의문을 품었던 것들에 대하여 공부하며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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