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과 두달 전까지 내가 바라보는 세상의 대부분은 정면이나 아래쪽이었다. 눈을 뜨면, 정면에 보이는 유리창에 낀 서리의 양을 체크하고 날씨를 확인하려 고개를 내려 시선은 휴대폰으로 향했다. 문 밖을 나서도 마찬가지였다. 목적지는 정해져 있었고, 정시에 도착하기 위해 종종거리는 발걸음을 내딛으며 앞만 바라봤다. 그 사이 나의 주변에 누가 지나가는지, 하늘 색깔이 어땠는지에 대한 기억은 몇 조각도 남아있지 않았다. 머릿속에 남은 아침 풍경은 휴대폰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사람들의 뒤통수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다 올해 초, 휴직이 시작되었다. 지난 몇 년간 회사와 대학원 다니는 것을 병행했는데, 수업을 듣는 것 까지는 어떻게든 할 수 있었지만, 논문까지 야무지게 마무리하는 것은 버거웠다. 그렇게 휴직을 결심하고, 졸업이라는 결승점을 통과하기 위한 여정이 시작되었다. 쉬기 위한 휴가가 아니었기 때문에 매일 아침 출근하는 것처럼 똑같이 일어나 아침을 먹고, 책상에 앉아 하루를 시작했다. 달라진 건 밖에 나가지 않는 것 뿐, 시선은 정면 혹은 아래 그대로였다. 눈을 뜨면 창밖으로, 휴대폰으로 다음엔 노트북으로 이어졌다. 조금 달라진 점은 영하 10도를 오르내리는 추위 속에서 땅만 보며 걷지 않아도, 출퇴근 지옥철 안에서 사람들 뒤통수를 바라보지 않아도 되는 것이었다. 따뜻한 방에서 커피잔을 바라보며 시작하는 하루라 조금은 더 가뿐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그 기분은 며칠이 가지 않았다. 오후 두 시가 될 때면 나도 모르게 눈꺼풀이 내려가고, 한 발만 내밀면 쏙 들어갈 수 있는 침대로 몸이 기울어 지곤 했다. 가끔 ‘잠깐만 누웠다 일어나야지’ 라는 마음으로 기댔던 이불 속에서 깜빡 아닌 개운한 기분으로 잠든 후 일어날 때면 소중한 하루를 날린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가끔은 ‘오늘은 망했네. 이러다 논문을 다 못쓰면 어떡하지?’라는 불안감과 자책감까지 올라오곤 했다. 어렵게 만들어낸 시간을 그렇게 날려 버릴 수는 없었다.
며칠이 흐르고, ‘아침에 출근하는 것처럼 똑같이 밖으로 나가 운동을 하고 하루를 시작하면 어떨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혹여나 시간을 낭비할까 살짝 고민이 되기도 했지만, 평소보다 조금 더 일찍 일어나 출근한다고 생각하면 한 시간 남짓한 시간은 아깝게 느껴지지 않았다. 결심한 다음날이 되었다. 하루의 시작이 달라질 것 같았지만 큰 변화는 없었다. 유리창과 휴대폰을 바라보며 온도를 체크했고, 두터운 외투를 껴 입은 채 문 밖으로 나섰다.
눈앞에 들어온 풍경도 몇 주전 보던 아침과 똑같았다.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커피를 손에 쥔 채 지하철 역으로 걸어가는 이들과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눈에 들어왔다. ‘아 추운데 다시 들어갈까?’라는 마음이 살짝 올라왔지만 꾹 참고 걸어 나갔다. 아무 생각 앞만 보고 가다 보니, 나도 모르게 지하철역 방향으로 갈 뻔 하기도 했다. 하지만 얼른 집 근처 한강 방향으로 발을 옮겼다. 그렇게 나의 아침 산책과 운동 그 어느 중간쯤 순간이 시작되었다.
깜깜한 굴다리를 지나 한강 안으로 들어서니 나도 모르게 고개가 하늘 위쪽으로 올라갔다. 불과 몇 분 전까지는 회색 빌딩들과 뿌연 공기가 가득 찬 도로 사이에서 앞만 바라보고 걷느라 하늘색과, 구름의 모양을 생각할 수조차 없었는데, 눈 앞에 투명하고 파란 하늘이 나를 기다리고 있던 것 같았다. ‘어? 오늘 날씨가 이렇게 맑았나?’ 미묘한 이질감이 나를 휩싸는 듯했다. 그렇게 강 가까이로 천천히 발을 떼며 나아갔다. 고개는 위로 옆으로 여러 곳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급하게 온 것도, 옆에 누군가 있는 것도 아니다 보니 강 말고도 여러 풍경이 온 몸으로 다가왔다. 철컹철컹 다리 위로 지나가는 지하철 소리, 저 멀리 강 건너 굴뚝에서 올라오는 하얀 연기, 손 끝에 스치는 차가운 공기의 감촉까지. 하루의 시작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한강 입구를 수백 번 들락거리면서도 발견하지 못했던, 아니 살펴보지 못했던 표지판도 발견했다.
그 순간이 이틀, 그리고 일주일이 넘어서며 매일 만나는 눈 앞의 이미지들이 미묘하게 달라지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같은 시간이라도 햇살의 세기가 조금씩 더 강해지고 있는 느낌이 들어 봄이 오는 것을 새삼 실감했다. 미세먼지가 가득해 코 끝이 간지럽던 다음날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 먼지 한 가닥 없는 바람이 얼굴을 스쳤다. 손 끝에 느껴지는 바람의 온도도 조금씩 따뜻해진 것 같았다. 날씨가 변덕을 부리는 날에는 잿빛 하늘을 만나기도, 추운 겨울로 다시 돌아가는 것 같기도 했다. 시간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매일 조금씩 온 몸을 통해 변화가 느껴지는 듯했다. 그러다 흘러가는 시간을 잡아보고 싶어 한강에 도착한 후 하늘과, 강과, 반사되는 모든 순간을 바라보고 사진으로 남겨 보았다. 며칠이 지나 사진들을 돌려보니 그 차이는 더 확연하게 느껴졌다. ‘지금까지 앞만 보고 살았구나’라는 사실이 새삼 실감되는 순간이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일부러 저 멀리 시선을 두고 걸어 보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평소엔 똑같이 조급해 보이기만 했던 사람들의 표정까지 보였다. 어느 날엔 길을 걷다 깜짝 놀랐다. 요 며칠 새 유튜브에서 자주 만났던 외국인 강연자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영상을 통해 만난 그에게 동기부여를 받던 찰나여서 유난히 더 반가웠다. 몇 초 뒤, 나의 시선을 느낀 그와 눈이 마주쳤고, 평소 나라면 절대 하지 않을 인사를 먼저 건넸다. “@@@님이시죠? 강연 잘 보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는 처음엔 당황했지만, 이내 미소를 살짝 머금고 나의 인사를 받아 주었다.
그건 무척 신기한 경험이었다. 아마 몇 달 전의 나였다면 목적지를 향해 바쁘게 걸어가느라 그를 알아보지 못했을 지도 모르겠다. 시선만 조금 넓혔을 뿐인데, 우연한 순간들이 나의 주변에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매일 달라지는 아침 하늘의 색깔, 손끝에 스치는 바람의 촉감을 만난 것 같이 이번 기간 동안 아직 발견하지 못한 숨은 기회나 가능성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고개를 들어 하루를 시작하고 난 뒤 낮의 모습도 조금 달라졌다. 가끔 올라오던 무기력과, 나를 유혹하던 이불과도 작별 인사까지는 아니지만 몇 발자국 더 멀어졌고, 논문 연구 속도에는 가속이 붙고 있다.
지금의 하루가 나에게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었는지, 매일 달라지는 아침 하늘색과, 손끝에 느껴지는 바람의 감촉을 스치며 실감하고 있다. 그렇게 겨울의 막바지를 보내고 새로운 봄을 기다리는 중이다.
* 글쓴이 - 지은이
우연히 만난 이들과 함께 만든 순간을 기록합니다. 감정을 글로 풀어내는 것을 좋아하며 <세상의 모든 청년> 프로젝트에 참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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